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32강(눅24:27-3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20. 18:55

누가복음 강해 232(24:27-3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26()

 

글로바와 시므온이 예수님의 말씀과 성찬식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깨닫게 되다(24:27-31).

 

예수님께서는 의사 누가의 기록에 따르게 되면, 주후 32 4 15 금요일에 골고다언덕 십자가에서 운명을 하시게 됩니다. 참고로 날자계산의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이 세례 요한의 공생애의 시작과 같은 해로 추정이 됩니다. 그때가 로마의 두번째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통치 15년입니다(3:1).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인 티베리우스는 주후 14년에 황제가 되었으므로 주후 28년이 바로 그의 통치 15년입니다. 해에 세례 요한이 공생애를 먼저 시작하고 후에 그가 나사렛 예수님께 요단 강가에서 세례를 것으로 보입니다”(3:21-22).

그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4번의 유월절을 지내시면서 주로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복음사역을 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이며 기간은 3 6개월입니다. 그런데 공생애의 끝은 주후 32 4 14 유월절 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네번째로 맞이하시는 유월절의 저녁에는 특별히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가지시고자 하십니다(22:12-15). 이유는 자리에서 자신의 고난과 그것을 기념하는 성찬식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22:14-20).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함께하시고 또한 자리에서 성찬식 의식을 제정하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밤에 대제사장과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가 보낸 병정과 하인들에 의하여 체포가 되신 것입니다. 다음날 4 15 금요일에는 전격적으로 십자가 처형이 결정이 되고 오전 9시에 못이 박히시고 오후 3시경에 운명을 하십니다. 그리고 당일 저녁에 골고다 언덕 근처에 있는 바위굴 묘실에 안치가 되신 것입니다(23:52-54).

당시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하고 있는 십자가 죽으심을 바라보고 있는 유대인들의 시각은 크게 보아 두가지입니다; 첫째,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처단하는 것이 지극히 옳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예수가 주장하고 있는 만민구원사상과 영생구원사상이 유대교리와 어긋나고 있으며 특히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모독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14:60-65, 10:30-33). 둘째,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서 추종하던 자들은 배신감을 느끼며 크게 실망하고 맙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메시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선민의 나라를 재건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게도 나사렛 예수는 모든 사도와 제자들의 기대를 배신하고서 스스로 십자가 처형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실패한 메시아입니다. 그러한 메시아는 이상 그들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유대교지도자들은 마치 큰일을 성취한 것처럼 만족을 하고 있으며 반면에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크게 낙담을 하고 있는 가운데 안식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지나고 다음날 새벽이 되자 갑자기 이상한 소식이 들려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덤을 가로막고 있던 바위가 경비병들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하게 옮겨져 있으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밤새 지키고 있던 성전의 경비병들로부터 그러한 보고를 듣게 대제사장과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는 당혹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를 정치적으로 쉽게 처리하고자 합니다. 우선 경비병들의 입을 막습니다. 다음에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고서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고 소문을 내도록 조치한 것입니다(28:11-15).

한편, 그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로부터 그러한 이야기를 듣게 11사도와 여러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여전히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첫째, 여인들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 천사들의 메시지만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천사들의 메시지가 메시아의 부활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과 예수님의 생전의 예언을 그대로 믿으라고 하는 것인데 사도와 제자들은 그것이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비록 예수님께서 자신의 대속의 죽으심과 3일만의 부활을 믿으라고 여러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언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와 제자들이 아는 한에 있어서는 그러한 예언이 성취가 사례가 역사 이래로 전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되살리시는 능력을 3번이나 베푸신 사실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베다니의 나사로와 같은 경우에는 무덤속에 들어간 이미 4일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되살리신 것입니다(11:39-44). 그렇지만 그러한 놀라운 능력을 행하고 있던 당사자 예수님이 이제는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예수님을 되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부활시키시면 됩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살리시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지는 못합니다. 이유는 역사 이래로 하나님께서 죽은 선지자를 다시 살리신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지자들의 글과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보게 되면 사도들이 놓치고 있는 대목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의 의로운 종이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존귀하게 되는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52:13-53:12). 그러한 사실을 시편에서 다윗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10:1-7). 그리고 모세는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고 전부 선지자가 되는 시대가 오기를 소원하고 있으며 선지자 요엘은 그러한 시대가 반드시 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28-32).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얼마 전에 사도들에게 자신과 함께 고난과 시험을 견디게 되면 하나님나라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되는 때가 오게 된다고 구체적으로 예언을 해주고 계십니다(22:28-30). 모든 예언은 마디로, 영생구원에 관한 내용이며 그것을 얻을 있도록 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예언을 곧이 대로 믿을 수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과 제자들이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하면서 것은 그러한 영생의 부활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베다니의 나사로가 무덤속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되살아 나왔지만 그것은 다시 향년이 다가오기 전까지 잠시 세상에서 목숨을 유지하고 살게 되는 이적에 불과합니다. , 다시는 죽지 아니하는 그러한 영생의 부활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의문에 대하여 종지부를 찍고 있는 내용이 본문의 말씀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에게 친히 하신 말씀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용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되는 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24:26). 그러므로 그렇게 영생구원의 문이 열리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선지자들의 글과 예수님의 예언을 그대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시고 축사를 하시고 떼어 주실 때에 그들의 눈이 영적으로 밝아졌다는 것입니다(24:30-31).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이에 모세 모든 선지자의 시작하여 모든 성경 자기에 관한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4:27);

(1)   엠마오의 고향집으로 가고 있는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하신 정체를 숨기시면서 히브리정경에 적혀 있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에 대하여 설명을 하십니다. 훗날 의사 누가가 글로바와 그의 아들 시므온에게서 설명을 듣고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위의 구절입니다(24:27). 내용은 첫째, 모세오경과 둘째, 선지서와 셋째, 기타 역사서 성문서에 골고루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그날 저녁에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을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11사도와 여러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면서(24:36-40, 20:19)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24:44). 말씀에 비추어 보면 본문에서 모든 성경(히브리정경) ”(24:27)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주로 시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있습니다. , 광범위한 역사서와 성문서에서부터 시편으로 압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24:27, 44). 참고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에 관한 히브리정경의 예언이 성취가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할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시편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3일에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24:44-46).

(3)   구체적으로, 모세오경과 선지서와 성문서 가운데서 메시아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을 찾아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18:15).

2)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 “이는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이라 것임이라.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9:6-7), “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 오리니 그가 거하는 곳이 영화로우리라”(11:10).

3)       여호와께서 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수들로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110:1),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위에 서실 것이라.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5-26).

둘째로,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24:28-29);

(1)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어떻게 하면 자신의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고 많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가르침 받을 수가 있을까요? 비결이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방법은 마디로, 매정한 현대인의 모습이 아니고 인정이 살아 숨쉬고 있는 전근대인의 모습과 같습니다(24:28-29).

(2)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예수님께서 메시아에 관한 히브리정경의 예언의 말씀을 자세히 제자에게 설명해주는 사이에 어느덧 엠마오의 마을 가까이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글로바와 시므온의 집이 마을에 있는 것을 진작에 알고 계십니다. 옛날 부모님과 함께 매년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가고 오는 길에 머물렀던 숙부 글로바의 집이 있는 동네이니 어찌 그것을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2:43-44) 하지만 자신의 몸은 아직 완전한 영생의 몸이 아닙니다(20:17). 그러므로 조용한 곳에서 홀로 지내다가 자신이 새로이 입은 부활의 몸이 온전하게 영적인 몸으로 변화가 되면 그때 시공간을 뛰어넘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으로 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11사도와 여러 제자들을 만나고자 하십니다(24:33-36, 20:19). 그러한 일정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를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치려고 하십니다(24:28).

2)      둘째, 연장자인 글로바가 예수님의 팔을 잡아 끌고서 여러 말로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24:29a). 사실 글로바의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해가 지려고 하면 서너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식사 도중에 사람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깨닫게 글로바가 사실을 급히 전하기 위하여 25 떨어진 예루살렘으로 다시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24:33a). 그것은 아직 해가 지지 아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해가 이미 져서 어두워졌다고 한다면 아무리 급해도 다음날 새벽에 해가 떠야 길을 떠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글로바가 다시 찾아간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여전히 11사도와 여러 제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24:33b). 그들에게 글로바가 새소식을 전해주면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날 저녁시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곳에 닫힌 방문을 투과하여 나타나시는 것입니다(24:34-36, 20:19).

3)      셋째, 아무리 길이 급해도 그렇게 식사라도 함께 하시고 하루 묵어 가시라고 주인이 길손의 팔을 잡아 끌고 있으면 손님은 못이기는 하고서 주인의 권유를 호의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고대사회의 모습입니다. 한국에서도 근대화가 시작되는 1960 이전에는 시골에서 곧잘 그러한 모습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화가 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부터 너무나 삭막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대 가부장사회와 전근대적인 인정 어린 사회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가 되고 있는 성경 이야기에 대해서는 현대인들에게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도 고대사회의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고 있습니다(24:29b).

셋째로,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24:30-31);

(1)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 들였기 때문에 글로바의 집에 놀라운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늦은 점심식사를 나누고 있는 자리에서 갑자기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거행하시는 것입니다(24:30). 떡을 가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자 떡을 받아 먹은 글로바와 아들 시므온의 영적인 눈이 밝아지고 있습니다. 즉시 길손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깨닫게 됩니다(24:31a).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성취가 되었다는 사실까지 단숨에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길에 오면서 예수님께서 풀이해주신 말씀이 마음속 뜨거운 감격으로 치솟고 있는 것입니다(24:32).

(2)   그러한 감격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앉으신 자리를 주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간이동을 하시고 자리를 떠나 버리신 후입니다(24:31b).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한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복음사역이 일단은 끝났다고 하는 표시입니다. 이제부터는 50 후에 오시는 또다른 보혜사 성령님에게 맡겨도 되는 상태입니다(24:49, 14:16-17, 1:8). 제자가 말씀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과 부활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으니 앞으로 성령님 안에서 영적인 삶을 살아갈 준비가 이미 갖추어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풀이하여 천국의 복음으로 전해주시는 예수님을 성도는 이야기만 듣고 그냥 지나쳐 가시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 들여야만 합니다.

그렇게 행한 글로바의 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가지의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찬식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있는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감격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제자로서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옛날 글로바의 집에 임한 은혜가 오늘날에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