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를 뚫는 햇살(손진길 소설)

가지를 뚫는 햇살24(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4. 2. 8. 06:50

가지를 뚫는 햇살24(손진길 소설)

 

8. 한국의 미래를 연구하는 서운갑 박사

 

20171 20일에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이 직무를 시작하자 미국의 대외정책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서한국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경험하게 된다;

(1)  미국이 새로운 신냉전시대(New Cold War)를 주장하면서 과거 자국에서 해외로 빠져나간 기업들에 대하여 다시 공장을 가지고 미국내로 들어오라고 권장하고 있다. 동시에 다국적기업에 대해서는 미국내에 공장을 짓고 국내에서 생산하지 아니하면 미국시장에 제품을 팔지 못하도록 노골적으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일본의 기업에 이어 한국의 기업들이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진출하고 현지에 생산공장을 짓고 있다.

(2)  그렇지만 인건비가 비싸고 경영자들이 수익의 대부분을 고액의 연봉으로 빼내어가는 미국식 경영이 버젓이 성행하고 있으므로 별로 수익이 발생하거나 국제경쟁력을 가지는 제품을 생산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고 하는 시장에 진출하기 위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의 남부에 공장을 건설하여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한국교민들이 조지아 주로 일자리를 찾아 많이 몰리고 있는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

애틀랜다에서 며칠 쉰 다음에 서운갑 부부와 아들 서한국 그리고 여자친구 지현옥은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를 방문하고 이어서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동남부의 땅끝 마을 키웨스트(Key West)를 방문한다. 플로리다키스 제도의 제일 서쪽 끝이 키웨스트인데 그곳까지 여러 섬이 도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길이가 무려 161km나 된다;

키웨스트에는1952년에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저술하고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930년대에 살던 집이 아직 남아 있다. 그는 미국 서북부의 산간지역 아이다호(Idaho) 주의 케첨(Ketchum)에서 1961년에 총기로 생을 마감하고 말지만 그의 흔적이 미국의 남단 키웨스트에서 그렇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집을 많은 관광객들이 돈을 내고 방문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 수익으로 헤밍웨이가 남겨놓은 수십 마리의 고양이의 자손들을 여전히 키우고 있다. 카리브 연안의 짙은 냄새가 풍기는 바닷바람이 향긋하게 느껴진다. 많은 젊은이들이 쌍쌍이 찾고 있는 것을 보니 서한국지현옥의 마음은 자신들이 신혼여행을 미리 즐기고 있는 것만 같다.

그 모습을 보고서 서운갑황옥주가 빙그레 웃고 있다. 6년 이상 고된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이겨낸 아들과 그 여자친구에게 차제에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어서 멀리 이곳까지 오자고 한 서운갑 부부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이애미에서 자동차로 다니고 있는 동안에는 낮시간이지만 계속 헤드라이트를 켜고서 달렸다. 그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수평선과 지평선 위에 떠있는 태양이 너무 위치가 낮아서 정면에서 직사광선으로 자동차를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강한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시야확보가 어려운 것이다. 또 하나는, 안개가 많다. 그러므로 서로의 안전을 위하여 자동차가 전조등을 켜고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이애미에는 카리브 연안에서 들어온 이민자가 참으로 많다. 유럽인종보다 그들의 수가 더 많은 것이다. 그러한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색다른 도시가 미국에서는 마이애미이고 또한 플로리다 주인 것이다. 

그렇게 플로리다의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있는데 하루는 서한국이 부친에게 말한다; 아버지, 한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현옥의 부모님이 생각보다 수속이 잘 되어 며칠 후에 미국에 들어온다고 해요. 그러니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4사람은 플로리다에서 서둘러 귀가길에 오른다. 이번에는 거의 직선거리로 주행하고 있으므로 텍사스 주 오스틴에 도착하는데 있어서 시간이 많이 단축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오스틴 집에 도착하고 이틀이 지나자 한국에서 출발한 지현옥의 부친 지강욱(池康旭) 교장과 그의 아내 차경옥(車慶玉) 여사가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밟고 있다.

그러므로 지현옥서한국과 함께 공항으로 가서 친정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얼른 집으로 모시고 온다. 이제 사돈으로 만나게 되는 4사람은 오스틴 집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기에 바쁘다. 지강욱 교장과 그의 부인 차여사의 입장에서는 맏딸이 갑자기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므로 다소 어안이 벙벙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사위감을 보니 마음에 든다. 더구나 지강욱 부부는 사돈이 되는 서운갑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참으로 소통이 잘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향이 포항과 청송이므로 그렇게 멀리 떨어진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항에서 동해안을 타고서 올라가면 영덕이고 그곳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면 청송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지강욱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사돈이 되는 서운갑의 나이가 자신보다 3살이 많다. 그러므로 형처럼 든든하다. 그래서 그런지 서운갑이 아들의 결혼비용을 전부 부담하고 있다. 하기야 현지의 조그만 한인교회를 빌려서 담임목사님께 주례를 부탁하고 331일 토요일에 간소하게 결혼식을 거행하고 있기에 큰 돈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 한인교회는 미국침례교회를 빌려서 시간대를 달리하여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런데 마침 미국인 목사가 성도들의 결혼서류에 보증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결혼 공증인(marriage celebrant)이다. 따라서 당일에 결혼서류를 작성하여 공증인의 사인을 받게 되자 신랑 서한국과 신부 지현옥이 무척 기뻐하고 있다;

그 자리에는 뉴욕에서 비행기로 도착한 서한국의 누이 서민경 부부가 딸을 데리고 참석하고 있다. 결혼식이 주말이므로 참석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서운갑 부부는 조용히 아들 서한국을 불러놓고서 긴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서운갑이 옆에 앉아 있는 아내 황옥주를 한번 본 다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떡이자 그때서야 아들 서한국에게 말한다; “한국아, 나와 너의 엄마는 아들인 네가 이제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게 되었으므로 조그만 선물을 하나 너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서운갑이 아들의 눈을 쳐다보면서 이어서 말한다; “우리는 한국이 너의 통장에 10만불을 입금해주고자 한다.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되는 한국이 네가 그 정도의 종자돈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나름대로 마음이 든든할 것이야. 유대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우리도 너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다. 그러니 구좌번호를 내게 알려주고 구좌의 명의를 정확하게 영어로 여기에 적어다오”.

이미 펜과 노트를 준비한 서운갑이 그것을 아들에게 내밀고 있다. 서한국이 통장번호와 그 명의를 적어주면서 말한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5월말부터 휴스턴에 이주하여 직장 생활하면서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그 일에 요긴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좋은 가장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서운갑황옥주가 기꺼운 표정으로 차남 한국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날 곧바로 은행으로 가서 약속한 금액을 서한국의 통장으로 이체한다. 자본의 자유화가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는 미국인지라 수속이 간편하여서 좋다;

결혼식이 끝나고 이틀이 지나자 서운갑 부부는 오스틴 공항에서 국내선을 타고 로스앤젤레스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국제선으로 바꾸어 타고서 서울로 들어간다. 김포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서 참으로 오래간만에 마포의 집으로 들어간다.

장남 서경일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저택인데 서운갑 부부는 집을 떠난 지 반년이 지나서야 다시 귀가한 것이다. 조카딸 서미옥4년 연상인 사촌오빠 서경일 부부의 자녀들을 돌보고 있어서 서운갑 부부는 안심하고서 반년 동안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경일 부부의 입장에서도 사촌 누이 서미옥이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아주고 있기에 그들이 직장에도 나가고 또한 대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있다. 장남인 서경일은 여전히 로펌 법촌’(法村)에서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맏며느리 최영미1981년에 모교에 편입학하여 법학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벌써 졸업을 하고 1984년부터는 도서관에서 죽기 살기로 사법고시준비에 매달리고 있다. 다행히 1981년초부터 사법고시 합격자수가 기존의 150명에서 그 2배수인 300명으로 증가하여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해가 바뀌어 1985년 정월이 되자 기쁜 소식이 들려온다. 최영미가 마침내 35살의 나이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그런데 최영미는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였지만 로펌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그것을 보고서 남편 서경일이 모종의 결단을 내린다;

서경일은 아내와 함께 직접 로펌을 만들어서 경영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따라서 법무법인 CS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다. 그곳에서 최영미 변호사가 남편 서경일 변호사와 함께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서운갑 박사가 하루는 장남 서경일을 불러서 물어본다; “아범은 어째서 회사이름을 SC가 아니라 CS라고 정한 것이냐?... “.

그 말을 듣자 서경일이 진지하게 답변한다; “아버지, 집사람이 변호사를 하면 고객이 많이 늘어날 거예요. 가정법률을 전담하는 변호사가 고객이 많은 법이니까요. 이혼과 상속문제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거든요. 그리고 Lady first이니까 CS로 이름을 정하는 것이 더 좋지요. 앞으로 저보다는 집사람이 더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아들의 말이 맞다. 며느리 최영미가 더 많은 실적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미리 내다보고 있는 서경일도 대단한 변호사임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1985년 여름이 되자 서운갑 박사를 찾아오고 있는 2사람이 있다. 그들이 바로 그 옛날 하와이대학교에서 서박사와 함께 유학생활을 했던 윤광일(尹光一)허숙(許肅)이다. 허숙은 서운갑과 전공이 같아서 정치학박사이고 윤광일은 전공이 달라서 경제학박사이다. 나이는 서운갑 자신에 비해서 윤광일3살 연하이고 허숙5살 연하이다.

서운갑198312월에 만나이로 벌써 60세가 된 사람이다. 그렇지만 1985년 여름에 윤광일허숙은 여전히 50대 후반의 나이이다. 그들은 무슨 일로 오래간만에 서운갑 박사를 찾아오고 있는 것일까?..

서운갑이 자신의 서재에서 두사람에게 커피대접을 하자 친화력이 좋은 허숙이 먼저 말문을 연다; “형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는 요즈음 국방대학원에서 국제관계 교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형님과 저의 숙부님이 하시던 일이 이제는 제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 말을 듣자 서운갑이 웃으면서 말한다; “허허허, 그때는 석사과정이 없었지만 지금은 2년제 석사과정이 설치되어 있어서 많이 바쁘시겠군요. 허숙 박사께서 노고가 크시겠습니다. 그런데 윤광일 박사께서는 요즈음 어디에서 근무하고 계십니까?... “.

그 말에 윤광일 박사가 대답한다; “, 저는 경제부처에 별정직으로 들어가서 오래 근무하다가 수년전부터는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더니 서운갑 박사가 말한다; “경제기획원에서 근무하시다가 KDI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계시는군요. 그래, 윤박사께서는 한국의 경제적 미래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

윤광일이 자신의 의견을 진술한다; “지난 1982년부터 1985년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경제는 고도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까지 개최할 예정이지요. 우리 한국의 변화를 보고서 세계인들이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

그 말을 듣더니 서운갑 박사가 말한다; “그렇겠지요. 우리는 한반도의 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이 제법 큰 나라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세계인들은 잘 모르고 있는 작은 나라이지요. 그러므로 “;

서운갑이 돌연 미소를 띄면서 이어 말한다; 설혹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1950년대에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처참하게 파괴된 서울로 대부분 기억하고 있지요. 그러니 3년후에 서울올림픽이 열리게 되면 그 현대화된 서울의 최근 모습을 보고서 깜짝 놀라게 될 거예요. 옳으신 지적입니다”.

그 말을 듣고 윤광일 박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떡이고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허숙 박사가 나서서 말한다; “형님, 사실은 그래서 우리 2사람이 형님을 찾아왔어요. 우리나라의 미래를 정치, 군사, 그리고 경제적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서로 토론하고 더 깊이 연구하는 모임을 하나 만들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형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 말에 서운갑이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미래연구소를 하나 만들면 좋겠지요. 이제는 우리 한국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완전히 이겼고 또 세계적으로 그 발전상을 모두에게 보여줄 시기도 서울올림픽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 이후의 문제를 정치적 경제적 관점에서 다루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듣자 허숙 박사가 신이 나서 말한다; “그러면 우선 우리 3사람이 국방대학원에서 짝수 달 둘째 토요일에 만나서 한국의 미래를 진단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지요. 나중에 더 많은 학자들이 동참하게 되면 정식으로 하나의 연구소를 만들도록 합시다. 어떻습니까? 동의를 하시면 제가 제반준비를 하겠습니다!”.

윤광일 박사와 함께 서운갑 박사가 좋다고 말하자 일사천리로 그렇게 3사람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진다. 그때부터 그들은 짝수달이 되면 두번째 주말에 국방대학원 소회의실에서 만난다. 한국의 미래에 관하여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또한 더 깊이 연구하는 주제를 분담하여 연구할 수가 있어서 참으로 유익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국방대학원 교수들이 서서히 그 모임에 참여한다. 그리고 여러 대학의 교수들이 소문을 듣고서 참가하기를 시작한다. 나중에는 여의도에서 국회의원과 위원회 직원들이 동참하기를 또한 원하고 있다;

그렇게 되자 가칭 한국미래연구소는 여의도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하고 일년에 2차례 국회도서관 또는 의원회관의 소회의실에서 세미나를 개최하게 된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에 그들은 1987년 큰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는 어떻게 획기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19813월에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가 법적으로 19883월초 이른봄에 끝나도록 되어 있는데 1988년 서울올림픽은 묘하게도 그해 9월말과 10월초라는 가을에 개최가 되도록 되어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는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자신이 개회선언을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이 헌법상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미국의 초대대통령 워싱턴이 되겠다고 자주 말하고 미국에서 그렇게 천명한 전대통령이기에 단임제 7년임기를 정확하게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서울올림픽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한 낌새를 알고서 민주인사들이 한국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줄줄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그 점 때문에 여당인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이 된 노태우 후보와 청와대 사이에 은밀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한 사태를 서운갑 박사는 과연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