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OBS교재(손진길 작성)

출애굽기 제47과(손진길 작성)

손진길 2020. 12. 2. 17:31

출애굽기 제47 (23:20-33) <OBS3-47>(손진길 작성)

 

[Q1] 하나님의 제사장의 나라가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어떠한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선포되어 있는가?

·         2가지 선행 작업이 거듭 강조 되고 있음; 그 첫째는 가나안 원주민 6부족을 완전히 축출하는 것임(23:23, 27-31). 두 번째는 원주민들의 신상을 완전히 파괴하고(23:24) 그들의 신과 언약하지 못하게 함(23:32).

·         그와 같이 원주민들의 거주권과 문화권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격리 • 축출 시키는 이유는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문화와 종교에 물드는 것을 지극히 염려하기 때문으로 나타나고 있음(23:33). 그것은 완전한 의미의 출애굽을 이루어가는 과정인 것임.

 

[Q2] B.C. 1876년경 야곱 일행이 가나안 땅을 떠난 후 470년 만에 실제로 여호수아가 24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되는데(3:17) 그와 같이 원주민을 내쫓고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말살하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차지하는 행위는 정당한 것인가? 아니면 부당한 것인가?

·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오경을 통하여 그 정당성을 2가지로 주장하고 있음; 첫째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줄 것을 여러 차례 약속했기 때문임(12:7, 13:15, 15:18, 26:4, 28:13, 35:12, 48:4). 그리고 야곱과 그 아들 12명이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룬 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나안으로 입성하여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예언이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15:13-16, 46:3-4, 48:21, 50:24, 3:8. 6:8, 13:3-5, 23:20).

·         그런데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은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Plus 이지만 원주민인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와 같은 청천벽력이며 모든 삶의 터전과 생산수단 그리고 문화까지 말살을 당하는 통한의 Minus 인 것임. 과연 이러한 Zero Sum Game에 의존하여 제사장의 나라를 올바르게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내재되어 있음. 일반적인 정복전쟁이면 땅 주인이 바뀌고 지역의 패권국이 새로이 등장하는 일은 고대사에서는 흔한 일에 속함, 그러나 하나님의 제사장의 나라가 건설되는 첫 시도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제로섬 게임에 입각한 민족 touch’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할 것임.

 

[Q3] 예사롭지 아니한 정복 전쟁에 의한 제사장 나라의 건설이 결국 훗날의 역사에서 실패작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실패의 주요인은 무엇으로 볼 수 있는가?

·         고대문명의 연결지역 가나안에 제사장의 나라가 서게 되면 그 영적인 영향력을 동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서로는 애굽까지 미칠 수 있을 것임. 그러므로 그 지정학적인 중요성에 비중을 두고서 그와 같이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민족 touch’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보임.

·         그러나 그 과정에 있어서 삽입된 ①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나친 선민의식, ②이웃의 민족들을 향한 적대감과 정복욕, 12부족 내에서의 갈등 • 내전 (20:46-48), ④심지어는 땅의 축복에 급급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 보다는 당장 보이는 이적과 역사에 매어 달리는 행위, ⑤그리고 율법에 대한 아전인수(我田引水,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다 대는 행위, 즉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그러한 명분의 조작)격인 조문화(條文化, 법률로 만들어 가는 명문화를 말함)와 해석 그리고 그것에 의존한 자기 의()의 정당화에 이르기까지 문제투성이, 상처투성이의 역사가 전개된 것임(15:3-9, 21:13, 23:2-36, 18:11-12, 10:3).

·         그것에 대한 개혁과 치료가 메시아에 의해서 이루어진 개인 touch’이며 성령세례로 능력 받은 각 개인이 복음으로 집안 touch’, ‘민족 touch’를 이루어 나가는 것임. 따라서 개인의 변화가 없는 민족구원은 구두선(口頭禪, 말로만 하는 공염불)에 불과하며 이방을 차별하는 선민의식은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음.

 

[Q4] 결국 하나님의 섭리(역사의 방향)는 실패를 통하여 우리들이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하나하나 고쳐 나감으로써 드디어 승리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점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예는 무엇인가?

·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더 이상 핍박과 환난이 사라지고 나면 세속화가 진행됨. 그것을 극복하고자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장소(사막, 깊은 숲 속, 바위 굴, 또는 외딴 섬 등지)에서 금욕주의 수행을 고집하는 초기의 수도승들이(소위 “white martyr”들임) 역사 가운데 먼저 나타나고 있음. 그들은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결국은 성내에 수도원, 수녀원을 만들어 수행도 하고 말씀 선포와 가르침에 나서게 됨.

·         요컨대, 먼저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개인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임. 그 다음에 의식의 사회화가 역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 즉 사회의 종교개혁은 경건주의자, 고행주의자, 또는 말씀 깨달은 자들의 사회적 실천과 적용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음. 그 좋은 예가 12C~13C 에 또 나타나고 있음. 당시 상업이 발달하고 종교의 세속화가 너무 심해지자 시골에서 무작정 도시에 몰려든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돕기 위하여 탁발수도승’(Mendicant friar: Francis & Dominic)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음. 그들의 움직임이 오래된 수도원, 수녀원 제도의 개혁으로까지 발전되어 나간 것임.

 

[Q5]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         가나안 원주민의 물러감과 이스라엘 민족의 땅 차지가 마치 같은 날 인수인계를 하듯이 시기를 딱 맞추어가면서 하나하나 이루어지게 함(23:30). 그로써 땅이 황무(荒蕪)하여지는 시간적 공백이 없도록 섭리한 것임(23:29).

·         아울러 땅 주인 바뀌는 긴박한 순간을 엿볼 수 있음. 이스라엘 민족이 마치 밀물같이 대거 한꺼번에 쳐들어가자 원주민들이 썰물같이 우르르 쫓겨나가는 형국인 것임. 그렇게 전쟁을 치르면서 동시에 땅의 인수인계가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 결국 그것은 일종의 땅뺏기 전쟁인 것임. 원주민들을 완전히 죽이거나 몰아내고서 그 땅을 완벽하게 새로 소유하는 것임.

·         그것은 민족만 다르지 한 세대가 모두 죽고 다음 세대가 그 기업을 완전히 인수하는 것과 상당히 닮아 있음. 그렇다면 인류의 정복과 점령의 역사도 자연의 순환과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임. 한 마디로, 땅뺏기에 열중을 한다면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미물들의 생존의 법칙과 별로 다르지 아니하게 되는 것임. 그러므로 사람들이 소위 만물의 영장으로 존엄성을 가지고 살려면 그 정도의 경지를 넘어서야만 할 것임. 공존공영의 법칙과 상생의 법칙을 배우고 익히며 또한 역사 가운데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생명사랑임. 그렇게 플러스 섬’(Plus Sum)적인 방법으로 살아가야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는 차원 높은 영적인 영생의 축복이 창조주로부터 다시 임하는 것이라고 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