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의 2호2룡(손진길 소설)

7세기의 2호2룡81(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4. 16. 12:30

7세기의 2281(손진길 소설)

 

신라의 국왕 김법민(金法敏, 626- 681)은 단지 중신(重臣) 몇 사람만을 집무실로 부른다. 그리고 원탁회의를 주재한다. 그 자리에서 국왕은 김관수 대장군이 왕명을 받아 만들어온 서류를 다 함께 점검하자고 말한다. 물론 그 자리에는 김관수 대장군이 참석하고 있다.

중신들이 모두 고개를 끄떡이는 것을 보고서 국왕 김법민이 말한다; “짐의 친서로 ()와의 전쟁을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다고 하면 과인은 이와 같은 친서를 몇 번이라도 만들 수가 있어요. 그런데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왜냐하면… “.

김법민이 잠시 숨을 돌리고 이어서 말한다; 이번에는 귀왕의 요구에 따라 이 친서를 가져다 주면 그가 책임지고 우리와의 전쟁을 막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귀왕이 사라지고 나면 그때에는 우리의 친서 하나로 전쟁을 막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짐은 그것이 참으로 걱정입니다!... .

신라국왕 김법민의 판단이 정확하다;

 김관수 대장군과 유기룡 장군이 조기에 국왕의 친서를 가지고 가서 귀왕 책귀에게 바치자 전쟁의 기운이 가시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왜의 절대권력자 귀왕이 사라지게 되자 그 다음 8세기에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가 못한 것이다.

대적관계에 있는 왜가 신라를 좋지 아니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신라의 동남쪽 바다진출을 적극 가로막고 있다. 그러므로 신라는 오직 서쪽 당과의 교류에만 매어 달리고 있다. 그와 같은 통일신라의 애로사항이 완화된 것은 9세기에 들어와서 서기 827년부터 청해진 대사 장보고(張保)의 활약이 나타난 때이다;

그래서 그런지 통일신라의 국왕은 해양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왜의 내침을 대대로 우려하고 있다. 그 결과 훗날 문무왕(文武王)으로 불리게 되는 신라의 국왕 김법민은 생전에 4가지 조치를 마련하고 있다;

첫째, 동해로 침입하는 적군을 막기 위하여 673년에 작고한 삼한일통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의 묘를 서라벌 서편 선도산(仙桃山)에 쓰고 있다;

 그곳에서 호국장군의 기운이 동해로 들어오는 왜적을 막아준다고 선전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안심하고서 생활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둘째, 서라벌 동해안에 호국을 위한 사찰을 세운다. 그것은 부처님의 법력을 빌려서 왜적의 침입을 막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의 국왕 김법민은 그 절 감은사(感恩寺)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서기 681년에 눈을 감는다. 그의 아들이 국왕이 되어 이듬해 682년에 그 사찰을 완성한다;

 그가 훗날 신문왕(神文王)으로 불리게 되는 정명(金政明)이다.

셋째, 김법민은 죽기 전에 자신의 무덤을 서라벌의 동해안 감포() 앞바다에 해중왕릉으로 조성하도록 유언을 남긴다. 그곳 대왕암에서 동해의 용이 되어 왜적의 침입을 막겠다는 숭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의 뜻대로 681년 문무왕이 타계하자 해중왕릉 대왕암이 역사 가운데 등장하게 된다;

넷째, 신라의 국왕 김법민은 귀왕 책귀를 만나 왜의 침입을 사전에 방지하도록 큰 공을 세운 김관수 대장군과 유기룡 장군의 공적을 크게 치하한다. 따라서 일계급 특진을 시킨다. 그에 따라 681년에 김관수는 군부의 최고 직위인 상장군이 되고 유기룡은 신라의 대장군이 된다;

 국왕은 그들에게 장래에도 왜와의 불필요한 전쟁을 막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신라국왕의 정책은 8세기 중반 또 하나의 국책사업으로 나타나고 있다. 훗날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는 서라벌 동편 토함산 정상에 석굴암을 만들고 그곳 돌부처의 이마에 보석을 박아 일출의 강력한 햇빛을 동해바다로 반사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태양의 힘과 부처의 힘을 모두 빌려서 왜의 땅에서 몰려오는 세력을 막아내겠다고 하는 신라조정과 백성들의 염원이 담기어 있는 국책사업이다;

그와 같이 동해상에 자주 출몰하고 있는 왜의 해적들은 신라백성들에게 있어서 매우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어쨌든 서기 680년대에는 신라와 왜의 천황 사이에 발생할 수도 있었던 대규모 전쟁을 신라국왕의 노력으로 사전에 방지하고 있다. 그것은 귀왕 책귀를 방문한 절친 유기룡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나라를 견제하고 그 힘을 분산시키고자 하는 귀왕의 책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과연 그 일은 장군 무오의 활약으로 어떠한 열매를 훗날 맺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통일신라와의 전쟁을 접는 대신에 귀왕 책귀는 사라진 백제의 역사를 왜의 천하에서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해가 뜨는 본국 곧 일본(日本)의 존재를 그 옛날의 반도국가 백제(百濟)가 아니라 이제는 열도인 ()에서 천황(天皇)의 이름으로 되살린다고 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귀왕 책귀는 방계왕국 연맹왕의 섭정인 대비 카라이찌미와 손을 잡고 그녀의 아들인 부여천무(扶餘天武)를 천황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대비와 귀왕은 서로 사돈이 되어 왜의 천하를 실질적으로 호령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귀왕 책귀는 이제 천황의 이름으로 그가 다스리고 있는 왜의 땅을 일본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등장시키고자 한다. 그 일을 위하여 그는 남은 세월동안 어떠한 정책을 실시하게 되는 것일까? 한마디로, 귀왕 책귀가 만들고 있는 왜의 일본화 작업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 것일까?... ;

한편 무오는 서라벌에서 유기룡 장군을 만난 다음에 그와의 개인적인 협력관계를 형성한다. 그 다음에 그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되돌아가서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신라의 첩자와 간자들을 두루 만난다. 그들에게 자신은 당의 동북면 영주지역에 가서 이제부터 당나라의 균열을 조장할 것이라고 말하며 앞으로 협조를 부탁한다.

무오(無吾)가 실제로 만주와 중원 사이에 있는 천리장성의 중부 당나라 변경 영주(榮州)지역에 도착한 시점은 서기 680년경이다;

 그때부터 그는 그곳에서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인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을 먼저 만나고 그 다음에는 말갈족의 지도자인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만나 좋은 친구가 된다.

서로 나이가 50 전후이며 전력이 고구려와 백제의 장수들이었기에 금방 친해진 것이다. 그런데 영주지역에는 또 다른 이민족인 거란족이 역시 당나라의 감시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 그들의 수장이 이진충(李盡忠)이다. 무오는 그와도 친분을 쌓으려고 열심이다. 그 이유는 그가 매우 다혈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족속의 지도자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당나라의 통제가 워낙 심하다. 따라서 무오가 그들을 사용하여 당군에게 저항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가 참으로 힘이 든다. 무정한 세월만 한없이 흘러가고 있다. 10년의 세월이 지나자 무오의 나이가 어느덧 59세기 된다. 그때 그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다.  

먼저 당의 수도인 장안에서 신구 세력이 충돌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아들을 연이어 황제로 세우면서 교묘하게 섭정을 계속하던 여걸 무측천이 마침내 당나라의 이름을 '무주()라고 고치고 스스로 여자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라고 불리는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암중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중앙에서는 측천무후가 강력한 공포정치를 실시하고 있지만 지방에서는 암암리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 당의 치하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북방의 돌궐족들이 서서히 세력을 모으고 있다. 그들이 영주지방에서 당의 통제 아래에 있는 거란족의 수장 이진충에게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고 종용하고 있다.

그에 따라 영웅심리가 큰 이진충이 서기 6965월에 자신을 (북방 유목민 왕의 칭호)이라고 부르면서 반란을 일으키고 영주지방에서 당군을 공격한다. 당나라 군대가 효과적으로 이진충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무오는 재빨리 대걸걸중상걸사비우에게 영주지방을 탈출하자고 제안한다. 무오의 제안을 검토한 대걸걸중상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이진충이 지휘하고 있는 거란족들이 당군을 서남쪽을 밀어내고 있어요. 그에 따라… “;

무오걸사비우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고구려에서 장수로 활약한 바 있는 걸걸중상이 이어서 말한다; “영주지방의 이민족들은 세가지로 갈라지고 있어요. 첫째, 이진충의 거란족과 함께 중원으로 밀고 들어가는 무리들. 둘째, 당군이 결국 승리할 것으로 보고서 아예 당군과 협조하는 무리들. 셋째, 영주지역을 떠나 만주로 들어가고자 하는 무리들입니다. 그 가운데 나는… “.

말을 잠시 끊으며 걸걸중상걸사비우무오를 둘러본다. 두사람이 경청하는 모습을 보고서 자신의 복안을 말한다; “나는 이곳을 떠나 만주로 들어가고 싶어요. 당군이 거란족과 필사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지금의 호기를 이용하여 동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하여 독자세력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지요. 두 분의 생각은 어때요?... ”.

그때 걸사비우무오가 크게 고개를 끄떡이면서 대걸걸중상의 손을 마주 잡는다. 그때부터 고구려유민과 말갈족 그리고 무오가 거느리고 온 소수의 백제 유민들이 행동을 같이하여 동쪽으로 만주 깊숙이 탈출한다. 그것이 이름하여 그들의 역사적인 동주(東走, 동쪽으로의 탈출)사건이다. 과연 그들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되는 것일까?... ;

무오는 자신의 행적을 급히 전령편으로 신라의 대장군 유기룡에게 알린다. 그것을 유기룡은 바다 건너 귀왕 책귀에게 알려준다. 그것을 보고서 귀왕 책귀가 놀라운 계획을 세운다.

그는 특수부대를 만주로 파견하여 무오를 도와주도록 만든다. 귀왕의 목적은 만주에 고구려의 뒤를 잇는 강력한 왕국을 세우도록 하여 효과적으로 당나라를 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일에 귀왕 책귀가 동원하고 있는 특수부대장이 한사람 있는데 그의 이름이 아비이다. 아비는 별호가 좌호(左虎)로 불리고 있는 좌백의 아들이다. 무왕국의 전방사령관으로 오래 근무한 좌백이 나이가 들자 은퇴하여 다시 귀왕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때 그의 아들 아비가 귀왕에게 와서 장수로 생활하게 된다.

좌백은 자신의 장조카 싸울이 모시고 있는 귀왕 책귀와 함께 늙어가고자 생각하고 있다. 그가 어째서 무왕 무영보다 귀왕 책귀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천하를 경영하는 능력에 있어서 책귀가 무영보다 더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좌백은 귀왕 책귀의 곁에 있어야 노년에도 그에게 할 일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좌백의 판단이 맞다. 무왕 무영은 전쟁이 없어지자 별로 할 일이 없지만 귀왕 책귀는 그것이 아니다. 그는 노년에도 할 일이 무척 많다. 구체적으로, 천황의 이름으로 왜의 열도에 일본을 재건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동시에 고구려를 계승하는 새로운 왕국을 통일신라의 북방에 건국하는 일을 계획하고 있다;

귀왕 책귀는 그와 같은 일에 전투경험이 많은 좌백을 참여시키면서 그의 지혜를 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백은 귀왕 책귀의 왕궁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흥미롭고 재미가 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아비가 대를 이어 귀왕국에서 무장으로 크게 활약하는 것이 보기에 좋다.

서기 697년에 장군 아비5천명의 특수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들어간다. 앞으로 그의 활동이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인들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일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일까?...

그보다 먼저 무왕 무영은 자신의 정예병 5천명을 아예 동주(東走) 중에 있는 장조카 무오에게 보낸다. 그리고 신라조정에서는 군부의 대장군 유기룡에게 장군 최호령이 지휘하고 있는 2천명의 특수부대를 데리고 만주로 가서 동족의 국가건설을 도와주라고 비밀지령을 내리고 있다;

그와 같은 입체적인 작전이 빛을 보고 있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동주사건이다. 과연 그들의 앞길은 어떻게 개척이 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