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의 2호2룡(손진길 소설)

7세기의 2호2룡83(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4. 19. 12:20

7세기의 2283(손진길 소설)

 

서기 696년 가을에 천리장성 서쪽 영주지방을 탈출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은 1년이나 걸려서 이듬해 697년 가을이 되어서야 영주와 길림 지역 동모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천문령에 도달한다. 그와 같이 발걸음이 한없이 더딘 이유가 다음과 같다;

(1)  첫째로, 거란의 전사 30만명을 지휘하고 있는 거란 출신 대장군 이해고(李楷)와 장군 색구()697년에 들어서자 줄기차게 그들을 추격하여 토벌하였기 때문이다.

1)   이해고는 본래 거란족장 이진충의 양자였다가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색구는 중랑장이다가 최근에 진급하였기에 그들은 주군인 무주의 여황제 측천무후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영주(榮州)를 떠나 동주(東走, 동쪽으로 달아남)하고 있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의 피해가 엄청나다;

2)   왜의 귀왕국 특수부대 5천명을 이끌고 만주에 들어온 장군 아비697년 여름에 고구려 유민과 거란군과의 전투에 뛰어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대걸걸중상의 전사를 목격하게 된다. 다행히 이해고가 지휘하고 있는 거란군을 물리쳤지만 고구려 유민의 최고지도자를 잃었기에 그 손해가 막심하다. 그때부터 어쩔 수 없이 젊은 장군 대조영이 선친을 대신하여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게 된다.

(2)  둘째로, 그들이 동쪽으로 행진하는 것을 보고서 당군의 지배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이 계속 합세를 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훈련시켜서 군사로 사용하기 위하여 행진이 계속 늦어지고 있다. 그 일을 장군 무오가 크게 돕고 있다.

1)   무오680년에 자신을 따르고 있는 백제의 유민 일부와 함께 만주의 영주에 들어왔다. 하지만 697년 봄에 왜의 무왕국 정예병 5천명을 이끌고 장군 강유광(姜有光)이 만주로 들어와서 동주 중에 있는 장군 무오와 조우했다. 강유광의 군대는 장군 무오의 지휘를 받기 위하여 그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2)   당시 강유광이 무왕 무영의 왕명을 무오에게 전했다; “무왕 전하께서는 만주에서 장조카 무오의 지휘를 받으라고 우리 5천의 정예병에게 왕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목적은 고구려 유민들이 중심이 되어 고구려의 뒤를 잇는 국가를 건설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장군 무오는 동주하고 있는 세력 가운데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천문령(天門)으로 가는 도중에 색구가 지휘하고 있는 거란군 10만명이 걸사비우가 이끌고 있는 말갈인들을 기습한다. 당시 동주하고 있는 제1진은 대조영이 이끌고 있는 고구려 유민들이다. 그 뒤를 무오의 군사 5천명이 엄호하고 있다.

그리고 제2진은 걸사비우가 지휘하고 있는 말갈인들인데 그들은 제1진과 상당히 거리를 두고서 행진하고 있다. 그 틈을 보고서 색구는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10만명의 거란군으로 기습을 시도한 것이다.

10만명의 거란군이 3만명에 불과한 말갈군을 공격하자 수적으로 열세인 말갈군의 희생이 엄청나다. 그것을 보고서 걸사비우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결사적으로 대항한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그마저 적군에게 포위를 당하고 만다.

힘이 빠지기를 기다려서 색구가 말을 달려와서 그만 걸사비우의 목을 치고 만다;

 걸사비우는 목이 잘려 나가는 그 순간까지 먼저 전사한 의형 걸걸중상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의식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걸사비우가 전사하자 그 수급을 긴 칼에 꿰고서 색구가 외친다; “말갈군은 빨리 항복하라. 너희들의 지휘관 걸사비우가 이렇게 죽고 말았다.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이유가 없다!... “. 말갈군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바로 그때에 남쪽에서 달려오는 큰 무리가 있다. 군마의 속도가 굉장하다. 순식간에 전장으로 뛰어들어 거란군을 가려서 치고 있다. 색구는 말갈군의 항복을 기다리고 있다가 졸지에 기습을 당하고 있다. 그는 상대방의 수가 5천에 불과한 것을 보고서 그들을 포위하여 공격하라고 전군에게 외친다.  

그러나 그것은 장군 색구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거란군이 진형을 형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전략의 신이라고 불리고 있는 귀왕 책귀가 양성해 놓은 특수군이다. 그리고 전장을 오래 누빈 상장군 좌백의 아들 아비가 지휘하고 있는 기병인 것이다.

5명의 천부장들이 장군 아비의 지휘에 따라 1천명씩의 기마병을 이끌고 10만에 달하고 있는 거란군들을 5줄기의 강풍처럼 휩쓸고 있다. 맹렬하게 질주하는 군마위에서 그들의 장창이 마치 풍차처럼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전신의 내력이 담겨 있는 그 창의 위력이 대단하다.

그들이 거란군의 진형을 종단하면서 10여차례 장창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나자 적군의 수급이 마치 추풍낙엽처럼 2만개나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서 색구는 모골이 송연하다. 그는 그러한 초능력의 강군과는 계속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즉각 깨닫고 무조건 후퇴를 외치고 만다.

색구의 군대가 하룻길을 정신없이 도망을 치자 그때서야 본진을 만나게 된다. 대장군 이해고가 지휘하고 있는 15만명의 거란군이다. 이해고색구가 단지 6만명의 패잔병만을 거느리고 도망해오자 그를 크게 나무란다. 그리고 21만의 대군을 이끌고 급히 대조영의 뒤를 추격한다;

그런데 대조영 일행이 통과하고 있는 천문령은 천혜의 요새지이다. 왜냐하면, 양편에 높은 산지가 있고 그 사이에 길고도 좁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천문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이르기를 천문령에 매복하게 되면 백만대군이 쳐들어오더라도 두렵지가 아니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기이한 지세를 진작에 살핀 인물이 바로 신라에서 2천의 특수군을 이끌고 북상한 유기룡 대장군이다. 그는 73세의 노장이다. 단지 2천명의 특수군만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그는 697년 초여름에 만주에 들어와서 영주로의 지형부터 꼼꼼하게 점검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추격하고 있는 거란군의 수가 30만명이나 되는 것을 유기룡이 진작에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매복을 하여 적군을 섬멸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그가 운이 좋게도 적지를 찾았다. 그곳이 바로 천문령이다. 그 지형은 마치 그 옛날 평양성에 이르기 전에 펼쳐진 호리병 모양의 사수(蛇水) 계곡과 같다;

그 계곡의 산지 양편에 1천명씩의 특수군을 매복하고나서 유기룡은 계곡에 들어서는 적을 섬멸할 수 있는 도구를 충분하게 갖추기 시작한다. 큰 나무를 베어서 계곡 아래로 굴릴 준비를 한다. 그리고 바위와 큰 돌을 많이 쌓아 둔다. 끝으로, 송진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기름을 엄청 준비한다. 그들은 불화살을 날릴 준비를 하는 것이다.

697년 늦여름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초가을에 들어서자 드디어 멀리서 대조영이 인도하고 있는 고구려 유민들이 보이고 있다. 유기룡은 모른 척하고 그들을 그대로 통과시킨다.

유기룡의 특수군이 얼마나 확실하게 엄폐를 하고 있는지 대조영 일행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천문령 계곡을 빠져나간다. 다만 그 뒤를 엄호하고 있는 무오의 군대가 잠깐 계곡 입구에서 멈추어 선다. 그리고 전령을 보내어 산 위를 잠시 염탐한다.

유기룡의 군대가 워낙 철저하게 은신하고 있기에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한다. 그들은 안심하고서 계곡을 빠져나가고 있다. 그 다음에는 좌룡 유기룡의 친구인 좌호 좌백의 아들 아비 장군이 자신의 군대와 말갈의 군대를 이끌고 계곡을 빠져나간다. 그는 무오의 군대가 별탈없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조심스럽게 이동한 것이다.

유기룡의 특수군이 매복을 한 채 하루를 더 기다리자 멀리서 대군이 접근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장군 이해고와 장군 색구도 노련한 장수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많은 척후를 내보내어 산지를 정밀하게 살핀다.

그것을 보고서 유기룡은 꼭꼭 숨어서 속으로 말한다; “이놈들도 보통이 아니군. 대조영무오 그리고 아비가 매복군을 숨겨 두지나 않았는지 확실하게 살피고 있군!... “. 마침내 척후가 안심을 해도 좋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무려 21만에 달하는 거란군이 서서히 계곡에 들어선다.

긴 천문령 계곡에 거란군이 완전히 들어서자 그때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갑자기 양쪽 계곡에서 바위와 통나무가 큰 소리를 내면서 굴러 떨어진다. 으악 소리를 내면서 군사들이 피하려고 아수라장이다. 그 다음에는 기름이 흘러내린다. 그 뒤를 불화살이 날아들고 있다;

지옥과 같이 변해버린 계곡에서 가장 먼저 미쳐서 날뛰고 있는 것이 군마들이다. 그 다음에는 옷에 불이 붙은 군사들이다. 그들의 외마디소리가 비명이 되어 골짜기를 진동한다. 미처 계곡을 빠져나가지 못한 병사들이 전속력으로 앞으로 내달린다. 긴 계곡을 마침내 탈출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벌써 무오의 기마병들이 창검을 휘두르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맨 뒤를 따라 천문령 계곡에 들어선 거란군들은 얼른 뒤돌아 서서 들어온 계곡을 탈출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뒤를 언제 도착했는지 아비의 기마병들이 막고 있다. 놀라서 이해고색구가 외친다; “빨리 적들을 해치워라. 적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

이해고색구가 외치지 아니하더라도 그들의 군대는 필사적이다. 무조건 장군 아비의 기마병의 창검을 피해서 도망을 쳐야 하기 때문이다. 도망치는 그들의 뒤를 따라 계곡에서 수만명의 병사들이 탈출하고 있다. 머뭇거리고 있으면 그대로 압사를 당할 지경이다.

그날 하루동안 지옥을 방불하게 하는 천문령 계곡의 대 살육현장에서 도망을 친 거란군의 수는 1만명이 채 되지 못한다;

 그 가운데 대장군 이해고가 들어 있다. 장군 색구는 전사하고 말았다. 20만명의 거란군을 해치운 천문령의 대승으로 말미암아 대조영 일행은 무사히 동주를 끝내고 있다. 이제는 도망자가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인 것이다;

그들이 계속 동진하여 그해 겨울에 오늘날의 길림성인 동모산(東牟山)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대조영은 이듬해 곧 서기 698년에 대진국’(大震)의 성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고구려의 뒤를 잇는 국왕이라고 대내외에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17년후에는 나라이름을 발해’(渤海)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아비무오 그리고 유기룡은 개별행동에 나선다. 먼저 유기룡 대장군은 2천명의 기마병을 이끌고 남진한다. 그는 해변길을 따라 남진하면서 저항하고 있는 당군들을 해치우고 있다. 마침내 원산만을 통과하고 무사히 신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장군 무오는 당나라에 끝까지 원수를 갚고자 한다. 선친 무송 장군의 복수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강유광의 협조를 얻어 5천명의 기마병으로 남만주와 한반도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옛날 고구려 성들에 주둔하고 있는 당나라 군사들을 공격한다.

당군들은 대조영의 진국의 병사들이 만주의 중부를 횡단하고 있는 영주로를 점령하고 말았기에 이제는 허리가 끊어진 상태이다. 유일한 탈출구는 서해로 배를 타고 빠져나가는 것인데 그 마저도 쉽지가 않다. 진국의 국왕 대조영이 철저하게 서해를 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태인데 이제는 장군 아비의 군사가 또 쳐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장군 아비의 군대와 장군 무오의 군대가 주로 공격하고 있는 성들은 동부의 성이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무왕국과 귀왕국의 번국(藩國)을 만들라고 하는 무왕 무영과 귀왕 책귀의 명령을 벌써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699년에 들어서자 옛날 고구려의 땅 동해안 지역에 두개의 번왕국이 차례로 들어서고 있다. 북쪽에 있는 것이 무왕국의 번왕국이다. 그 중심지가 나진’(羅津)이고 그곳에 무왕국의 번왕부가 있다. 초대 번왕이 바로 무오이다. 우호로 불리는 무왕 무영의 장조카 무오(無吾)가 드디어 번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남쪽에 있는 것이 귀왕국의 번왕국이다. 그 중심지가 함흥’(咸興)인데 그곳에 귀왕국의 번왕부가 자리잡고 있다. 초대 번왕이 아비이다. 좌호로 불리고 있는 좌백의 아들 아비가 귀왕국의 번왕(藩王)이 된 것이다;

대진국의 국왕 대조영(大祚榮)699년에 남쪽에서 성립이 된 두개의 번왕국의 왕인 무오아비와 친하게 지낸다. 그들이 기마병을 지휘하여 도왔기에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의 전사들이 거란군을 물리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친선관계는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大武藝, 재위: 719 6- 737) 무왕(武王)719년에 즉위한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왜의 왕국들과 우호친선관계가 계속되고 바닷길로 서로 무역에 힘쓴 결과 훗날 발해가 중국에 의하여 해동성국’(海東盛)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통일신라는 발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서로 무역을 하거나 내왕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좌룡인 유기룡 장군이 천문령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기에 대조영의 후손들이 신라를 결코 적대시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것이 통일신라로는 참으로 다행이다. 그들의 북방을 발해가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귀왕 책귀는 왜의 땅에서 어떻게 일본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일까? ;

그가 구상하여 실시하고 있는 왜의 일본화가 훗날 한국의 역사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 그 내용을 살펴보게 되면 7세기의 22의 이야기는 마무리가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