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의 2호2룡(손진길 소설)

7세기의 2호2룡84(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4. 20. 04:04

7세기의 2284(손진길 소설)

 

14. 귀왕 책귀의 일본화 작업

 

  73세의 노장인 좌룡 유기룡 대장군이 서기 697년 늦여름에 신라의 특수군 2천명을 천문령(天門嶺)의 양편 산지에 매복하여 그곳 계곡을 지나고 있는 이해고의 거란군  21만명에게 엄청난 타격을 준 것은 역사에 길이 남는 기적과 같은 대첩이다;

유기룡의 특수군은 그해 697년 말 대조영(大祚榮) 일행이 무사히 동모산(東牟山)에 도달하는 것을 보고서 통일신라로 되돌아가고자 남진을 시작한다. 그들이 동해안을 따라 남진하면서 대항하고 있는 당군을 쳐부수고 있을 때에 그들을 도와준 군대가 바로 귀왕국의 아비 장군이 지휘하고 있는 5천명의 특수군이다.

그것이 고마워서 유기룡은 그들이 한때 점령했던 함흥성아비 장군에게 준다;

 유기룡은 자신의 절친인 좌호 좌백의 아들이 바로 아비 장군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아낌없이 큰 성 함흥성을 양도한 것이다. 친구의 아들 아비를 보고 있으면 서라벌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들 유청람(劉靑藍)의 생각이 절로 난다.

서기 698년 초가을 그들이 함흥성을 점령하여 함께 술자리를 나누고 있을 때에 아비 장군이 대장군 유기룡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좌룡 숙부님, 이제 서라벌로 들어가시면 다시 만나기가 어렵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지낸 시간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

그 말을 듣자 유기룡아비에게 말한다; “나도 자네를 보고 있으니 서라벌에 있는 내 아들 청람이 생각이 절로 나는구만! 두사람이 만나면 정말 좋은 친구가 될 터인데, 허허허… “. 그 말에 아비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빙그레 웃는다;

그 다음에 아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숙부님이 동모산에서 먼저 남진을 하시고 저는 한달 후에 뒤를 따라 남진을 했지요. 그때 698년 정월에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모아 놓고 동모산에서 대진국()의 성립을 선포했지요. 그리고 스스로 고구려의 뒤를 잇는 국왕이라고 선언했어요. 그것을 보고서 저는 우리 군이 할 일을 모두 한 것으로 판단하고 남진을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유기룡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어서 아비에게 묻는다; “혹시 자네가 곧바로 배를 타고 귀왕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남진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내 친구 귀왕이나 상장군 좌백이라고 하면 분명히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 같은데!... “.

그 말에 장군 아비가 싱긋 웃으면서 대답한다; “하하하, 저의 아버지나 숙부님들은 지혜가 남다르고 경륜이 대단하십니다. 그렇지요. 사실은 다른 명령을 받아서 저희들이 남진한 것입니다. 고구려를 승계하는 새로운 왕국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성립이 되면 저희 귀왕국이 그들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무역을 하게 되지요. 그때를 대비하여 번국(藩國)을 이곳에 세우고자 하는 것이지요, 하하하… “.

그 말을 들은 유기룡이 허허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그렇지, 허허허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나는 신라의 군부에 그러한 나의 생각을 말하지 아니했어. 그 이유는 아무래도 우리 신라가 대진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아야 하기에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싶지가 않아서 그런 거야. 말하자면… “.

좌룡 유기룡이 잠시 숨을 쉬고서 이어 말한다; “우리 신라대진국은 서로 불가침 불가근으로 지내는 것이 더 이익이 될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어. 만약에 우리 두나라가 가까워지면 당나라의 후신인 무주(武周)가 매우 경계를 할 것이야. 그 점을 생각하면 우방도 적국도 아닌 상태가 좋아요. 그렇지만 그들이 북쪽에서 우리 통일신라의 국경을 지켜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허허허... “;

그 말을 듣자 아비가 크게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그가 속으로 생각한다; “아버지가 평소에 3친구의 자랑을 많이 하시더니 좌룡 유기룡 숙부님도 대단하신 경륜과 지혜의 소유자이시구나. 과연 한 시대를 풍비하신 인물들이야!... “.

아비와 헤어지고 유기룡의 군대는 원산만을 지나 신라의 국경으로 들어온다. 그의 군대가 698년 가을에 신라의 서라벌로 개선하자 유기룡 대장군을 보좌했던 최호령 장군이 상세하게 군부에 대장군 유기룡의 전공을 보고한다. 신라의 조정에서는 그 공을 인정하여 유기룡을 상장군으로, 최호령을 대장군으로 삼는다;

일계급 특진이 이루어진 것이다. 백제출신의 장군으로는 유일하게 유기룡이 신라 군부의 최고계급인 상장군이 된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상장군으로 은퇴를 한 김관수 대감이 축하를 한다. 그리고 유기룡의 아내 오해미가 그렇게 좋아한다. 더구나 신라의 조정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 유청람이 무척 기뻐한다.

아들 유청람은 마치 책귀처럼 문무에 두루 뛰어난 인재이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서라벌에서 실시한 문과와 무과시험에 전부 합격을 하고 처음에는 무관으로 근무했다. 나중에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첩보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조정에서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아들 청람을 보고 있으면 유기룡은 참으로 그 이름을 잘 지었다고 하는 생각을 하고서 빙그레 웃는다. 그것은 아비보다 자식이 더 뛰어나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청출어람’(靑出於藍)에서 651년말에 따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듬해 699년 봄에 75세의 상장군 유기룡이 군에서 전역을 한다. 그는 서라벌에 살면서 이제는 편하게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 아내 오해미도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녀는 시간이 나면 서라벌에 설치가 되어 있는 오덕관에 들린다. 오덕의 상단은 국내에서는 사비성에 상단 본부가 있고 서라벌에 오덕관이 있다. 그리고 해외에서는 등주와 야마토에 역시 오덕관이 운영되고 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전쟁상태가 된다고 하더라도 경제활동은 무역을 통하여 지속이 되고 있다. 따라서 백제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오덕상단이 지금은 서라벌에서 더 활발하게 상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덕상단의 창시자 오덕(吳德)의 딸인 오해미는 일흔이 넘은 나이이지만 아직도 오덕관에 나가서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

한편 열도인 ()에서 귀왕으로 불리고 있는 책귀는 만주에 파견한 장군 아비로부터 계속 소식을 듣고 있다. 697년 늦여름에 천문령에서 대승을 거둔 결과 토벌군이 완전히 물러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697년말에 오늘날 길림으로 불리고 있는 동모산에 도착한 대조영698년초에 대진국을 세우고 국왕이 되어 강한 군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천리장성 너머 서쪽의 땅에는 북방의 돌궐족이 남진하여 점령하고 있다. 그에 따라 측천무후의 무주국은 산해관 서남쪽으로 물러가고 말았다. 한마디로, 대조영의 대진국이 그 옛날 고구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귀왕 책귀는 사라진 백제를 왜의 땅에서 확실하게 재건하고자 한다;

그것이 이름하여 왜의 일본화 작업이다. 귀왕 책귀일본(日本)이라고 하는 이름을 고집하고 있는 이유는 그 옛날 중국의 산동과 동해안 그리고 왜의 땅에 커다란 번국을 가지고 있었던 백제의 이름이 바로 해가 뜨는 본국이라는 의미에서 일본으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백제의 국왕이 바로 일본의 천황으로서 대륙과 열도의 번왕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귀왕 책귀는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방계왕국의 연맹왕을 일본의 천황으로 삼고 자신이 천황의 장인으로서 왜의 천하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는 더 먼 미래를 머리속에 그리고 있다; “훗날 내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열도에서 일본의 천황은 귀왕국과 무왕국 그리고 번왕국과 힘을 합하여 한반도는 물론 중국대륙으로 진출할 것이다.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시대가 일본의 국력을 키우게 되면 반드시 미래에 다가올 것이다!... “.

그와 같은 의미에서 귀왕 책귀는 다음과 같은 사업을 국책사업으로 적극 추진하고 있다;

(1)  첫째로, 방계왕국의 연맹왕을 일본제국의 천황(天皇)으로 삼는 대신에 천황의 아내를 귀왕국의 공주나 무왕국의 공주 또는 그 옛날 직계왕국의 공주로 삼는다. 구체적으로, 귀왕 책귀가 방계왕국의 대비인 카라이찌미와 합의하여 처음 세운 천황이 부여천무(扶餘天武)인데 그 아내가 귀왕의 공주인 책유리(策琉璃)이다. 그 다음에는 부여천무의 장남인 부여지통(扶餘持統)이 천황이 되었는데 그 아내가 무왕의 공주인 무하련(無夏蓮)이다. 부여지통 천황이 8년만에 요절하자 그의 동생 부여문무(扶餘文武)가 서기 697년에 천황의 자리에 오르고 있다. 귀왕 책귀는 대왕대비 카라이찌미와 협의하여 천황의 아내로 그 옛날 직계왕국의 군주였던 부여황(扶餘皇)의 손녀인 부여유미(扶餘唯美) 공주로 결정한다. 그러므로 서기 500년에 야마토제국(大和帝國)을 건설했던 백제의 국왕 무령왕의 직계 후손이 마침내 천황의 아내가 되고 있는 것이다;

  

(2)  둘째로, 왜의 땅에 성립되어 있는 3개의 왕국 곧 귀왕국, 무왕국, 번왕국의 국왕들이 서로 협력하여 일본의 천황을 모시고 국력을 키울 수 있도록 귀왕 책귀가 엄청 신경을 쓰고 있다. 만약 3국의 왕들이 서로 반목하게 되면 일본의 천황은 그 힘을 잃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왕 책귀는 세력균형을 중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큰 성의 수를 가지고 보면 서쪽에서부터 방계왕국이 5, 귀왕국이 8, 번왕국이 4, 무왕국이 7개이다. 그리고 농토의 비옥함과 넓이를 감안하면 귀왕국의 국력이 다른 왕국을 압도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방계왕국의 연맹왕이 일본제국의 천황이 되고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귀왕국이 무왕국이나 번왕국에 대하여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 천하는 태평하다. 따라서 노년에 귀왕 책귀는 태자인 책경민(策敬民)에게 그 점을 주지시키고 있다.

(3)  셋째로, 귀왕 책귀역사책을 만들고 있다. 그것이 일본서기이다. 문무에 달통한 귀왕은 그 옛날 백제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대륙과 열도에 식민지를 번왕국의 이름으로 보유하고 있던 백제는 그야말로 제국과 같았다. 그러므로 백제의 국왕은 해 뜨는 본국의 황제라는 의미에서 일본의 천황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지금은 역사 가운데 사라진 백제의 영광이다. 그것을 귀왕 책귀는 열도에서 되살리려고 한다. 따라서 방계왕국의 연맹왕을 천황으로 삼고 그 아래에 3왕국의 왕들을 신하로 삼고 있다. 그렇지만 실권은 귀왕 책귀와 대비인 카라이찌미가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천황의 아내는 귀왕국, 무왕국, 무령왕의 직계 공주에서 나오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이제는 그러한 내용을 일본서기에 담고서 조속하게 역사책을 만들기 위하여 그 옛날 백제의 역사를 거꾸로 쓰고 있다;

 귀왕의 방법은 그 옛날 백제를 지금의 일본의 천황에 대한 역사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그 방법은 굉장히 간단하다; “백제를 일본으로 바꾸고 주어와 목적어를 바꾸어 버리면 된다. 예를 들면, 백제가 가야의 일부를 식민지로 삼은 역사가 있으면 그것을 일본의 천황이 반도의 가야를 식민지로 삼았다고 기술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꾸민 역사책이 바로 일본서기이다. 그것을 보고서 귀왕 책귀는 만족을 표시한다.

(4)  넷째로, 일본의 글자를 아주 빠르게 만들고 있다. 그 방법은 그 옛날 만주어를 이용하여 신라의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문자(吏讀文字)와 같은 것이다. 그 문자를 통일신라는 중시하지 아니하고 있지만 귀왕 책귀는 다르다. 그는 얼른 이두문과 같은 방법으로 일본의 글자인 히라가나를 만든 것이다;

 한문에 토를 달고서 읽다가 나중에는 아예 한문까지 쉽게 읽도록 히라가나를 적용하고 보니 읽고 쓰기에 아주 편리하다. 역시 문무에 뛰어난 인재가 귀왕 책귀인 것이다.

(5)  다섯째로, 귀왕 책귀는 천황가를 신성시하는 작업을 신하들에게 지시했다. 그 결과 신하들이 꾸며서 올린 신화가 천황가의 역사로 장식이 된다. 그 결과 귀왕 책귀가 대비 카라이찌미와 합의하여 세운 천황 부여천무가 40번째의 천황이 되고 있다;

 신하들은 천황가의 시작을 기원전 660신무천황(神武天皇)으로 꾸미고 있다; “그들은 그 옛날 신화의 시대에 하늘의 권세를 얻은 천황이 무력으로 일본제국을 건설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상당히 기묘하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대칭적으로 서기 660년이 되면 한반도의 일본인 백제가 망하고  왜의 땅에서 다시 일본이 건설되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서기 673년에 방계왕국의 연맹왕에 불과한 부여천무가 귀왕 책귀와 대비 카라이찌미의 합작으로 40대의 천황으로 즉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새로운 시작은 귀왕 책귀가 서기 668년에 고구려가 망하고 5년이 지나자 드디어 한반도에서 백제의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도인 왜에서 새로운 일본을 만들고자 작심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왜의 일본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자가 바로 백제출신의 귀왕 책귀이다. 그는 699년에 75세의 노인이 되자 그 작업을 신하들에게 독촉한다. 그는 자신의 수명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에 일본화 작업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귀왕 책귀는 한평생 극동지역에서 자신의 시대인 7세기를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향년을 보람 있게 맞이하고자 끝까지 노력하고 있다.  그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자신의 향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가 그토록 열심을 보인 왜의 일본화 작업이 훗날 이웃나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