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17강(히4:4-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5. 01:21

히브리서 강해 제17(4:4-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5 12()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생의 안식을 성도들이 인생살이 가운데 맛을 보자면 어찌해야 하는가?(4:4-7)

 

히브리서의 저자는 제4장에서 두가지 종류의 안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하나님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영생의 안식입니다(4:3). ②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매주 누릴 수 있는  7일 안식일입니다(4:4).

그런데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안식이나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영생의 안식이나 상관없이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안식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자가 있고 누릴 수 없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4:5-6). 어째서 그렇게 구분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구분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순종하여 그것을 실천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뜻과 어긋난다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불순종하느냐?의 차이입니다(4:6-7). 그 내용을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하여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7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4:4-5);

(1)  일반적으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히브리정경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에 들어오게 되면 그렇지 못한 대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7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4:4). 그것은 모세오경인 창세기 제2장 앞부분에 실려 있는 글을 원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2:2).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므로 당연히 히브리서의 저자가 잘 알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7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4:4a)라고 불분명하게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말함으로써 다른 의도를 고의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도대체 저자의 숨겨진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2)  초대교회에서 처음에는 유대교인들이 제7일 안식일에 회당예배를 드리듯이 그렇게 성도들이 안식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안식일 다음날에도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이틀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세월이 갈수록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7일 안식일과 안식일 다음날 가운데 하루를 선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배일의 선택문제를 둘러싸고서 두가지 주장이 팽팽합니다;

1)    첫째,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도 당연히 선민들의 할례와 율법의 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제7일 안식일 예배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에 유대교에서 정죄가 되어 안식일 전날에 십자가에서 처형이 되시고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서는 다음날인 주일이 더 낫다고 많은 성도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주일을 선호하는 세력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 때문입니다. 최초로 성령님이 강림하신 오순절이 두번째 초실절이며 또한 안식일 다음날이기 때문에 주일을 선호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일을 예배일로 초대교회가 선택함으로써 전통적인 유대교와의 차이를 두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셋째, 그렇다면 히브리정경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어느 쪽의 주장에 호응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는 유대주의자인 전자가 아니고 복음주의자인 후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창세기 제2장 첫머리에 있는 글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라고 말문을 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4)    넷째, 히브리서의 저자의 생각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자면 다음 두가지로 보입니다; ①첫째, 그는 제7일 안식일보다는 그리스도와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참된 안식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②둘째, 히브리서 저자 역시 사도 바울처럼 어느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은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14:5-6).

(3)  히브리서의 저자는 제7일 안식일 예배냐 아니면 그 다음날 주일 예배이냐 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4:5). 그것은 성도가 예배인생을 살아감으로써 아버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영생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를 못하게 된다고 하면 그러한 성도의 삶이란 진정으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천국의 영생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궁극적인 문제이며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의 예배인생은 육신을 입고서 이 세상에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어서 참으로 절대절명의 문제입니다.

둘째로,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4:6);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4:6a);

1)    히브리서 저자의 분석이 날카롭습니다. 그는 시편 제95편의 말씀,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95:11)를 원용하면서 그 뜻을 하나님께서 노하시는 경우에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를 못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경우에는 들어갈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영생의 안식에 들어갈 정도로 제대로 믿음생활을 하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육신의 몸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 완전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경우라고 보고 있습니다(2:9).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 뒤를 따라 부활과 안식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2:10).

(2)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4:6b);

1)    이미 여러 번 히브리서 저자가 언급을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3:8-1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가운데 크게 두 차례 여호와 하나님을 대노(大怒, 크게 노함)하게 만들어 민족말살의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다행히 모세의 간절한 중보의 기도로 즉각적인 죽음을 면했지만 광야생활 40년 동안에 기성세대(旣成世代, 이미 어른이 된 세대)가 전부 죽고 마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이 시내 산 아래에서 발생한 금송아지 우상사건(32:1-10) 그리고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발생한 정탐꾼들의 보고에 따른 백성들의 절망과 하나님 원망 사건입니다(14:1-5).

2)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키고 광야생활을 통하여 율법교육을 철저히 시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용하여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구원의 큰 복을 나누어 주시고자 하십니다(12:3, 19:4-6). 그와 같은 하나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재목인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불신앙으로 일관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생활과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의 안식을 누리는 복을 얻지를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로,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4:7);

(1)  상당히 당황스러운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시편에 본문과 같은 구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저자를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익명의 시편인 제95편 내용의 일부입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95:7-8). 그렇다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히브리정경에 무식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무책임하게 원용하고 있는 구절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 왕의 이름을 인용하고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2)  오늘이라고 하는 용어와 관련하여 다윗의 예언에 속하고 있는 시편 제110편의 내용을 묵상해보게 되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110:1);

1)    이 땅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좌정하십니다(2:30-36). 그리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임재시켜 주십니다(24:49, 14:16-17, 2:1-4, 32). 그때부터 성도들이 성령님과 함께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1:8). 그러한 날이 미래에 올 것이라고 영적으로 다윗 왕이 내다보고서 시편 제110편에서 예언의 글을 남긴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윗 왕이 예언한 그 새 언약의 시대 곧 복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가운데서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죽음을 당한 그 뼈아픈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잘못을 타산지석(他山之石, 남의 잘못을 자신의 교훈으로 삼아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삼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서의 저자가 오늘이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오늘 그의 글을 읽고 있는 성도들도 시편의 말씀과 그의 권면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성경의 말씀이란 성령님의 감동으로 저술이 되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읽는 자들에게 들려올 때에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창조주의 말씀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바로 잡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영적인 삶이 활발해집니다. 반대로 그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신의 고집대로 계속 살아가게 되면 영적으로 피폐해지고 맙니다. 그 결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확신과 평강이 사라집니다. 나아가서 천국에서의 영생의 안식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저자의 권면에 유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감으로써 이 땅에서도 그리고 천국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안식의 복을 누려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 복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