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15강(히3:15-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3. 10:54

히브리서 강해 제15(3:15-1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5 10()

 

출애굽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믿음에서 실족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거듭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3:15-19)

 

본문은 히브리서 제3장 제7-14절에서 이미 설명한 내용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어째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족한 이야기를 또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을 격노하게 만든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너무나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전멸시켜 버리시겠다고 언급하신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①하나는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출애굽의 신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벌인 사건입니다(32:1-10). ②또 하나는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정탐한 수령들의 보고를 듣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하여 하나님을 원망한 사건입니다(13:25-33, 14:1-5, 11-12). 위의 두 사건 발생 당시에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옮겨보면서 그 뜻을 풀이해보고자 합니다.

(2)  먼저 출애굽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 금 송아지 우상사건의 경우입니다;   

1)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32:8-10);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    첫째,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거나 그것을 여호와라고 불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32:8).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이며 진노를 사는 행위입니다(20:4-5, 7, 32:8-9).

3)    둘째, 어째서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면 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출애굽기 제19장과 제20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모두 여호와의 것이며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19:5). ,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종이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여쭈어 보고서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백성들의 편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십계명과 율법을 주고 계십니다(20:6)”. 그 계명의 뜻을 정면으로 어겨버렸으니 여호와의 진노로 전멸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32:10).

(3)  다음은 민수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 정탐꾼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14:11-12); 역시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내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십니다. 시공간에 갇혀 있는 피조세계를 초월하고 계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1:1-2, 4:24). 그러므로 설혹 피조물인 인간들이 먹고 마시며 사용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제공해 주셨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은 그렇게 고맙게 여기고 있지를 않습니다(14:11b).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자연의 혜택으로 당연히 자신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치부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2)    둘째,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존재인 여호와께 소망을 두고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수호신이나 우상을 두고서 그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라고 하겠습니다; ①첫째,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을 쉽게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앞에서 간구하면 즉각적으로 효험이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자신들의 요구를 금방 들어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②둘째, 눈에 보이는 존재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로비를 할 수가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감찰자이시므로 영 모시기에 불편한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만들고 그것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우상처럼 섬기고자 하는 행위가 만연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4)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그 뜻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론을 모세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①첫째,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20:6a).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②둘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20:6b).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말씀으로 함께하시는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자는 영생의 복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20:6c, 4:23-24).

(5)  어째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시편 제95편의 이야기를 본문에서 다시 다루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초대교회에서 성도들 사이에 그 문제가 다시금 대두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앞으로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계속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1)    일부 유대인 출신 성도들이 나사렛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선민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그들 유대인 사회에서 태어나시고 공생애를 살아가신 선지자이며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①첫째,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신 어린양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를 믿고서 회개를 하는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②둘째, 동시에 예수님은 유대인이며 선지자이십니다. 육신적으로는 할례를 받으시고 유대인 사회에서 율법생활을 하신 선지자라는 것입니다(2:21-24, 41-42, 2:13, 5:1, 7:10).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인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할례와 율법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흠이 없는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그와 같은 시각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는 출애굽 당시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한 불신앙의 모습을 보였는지를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기를 그만두고서 제멋대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고 그것이 출애굽의 구원자 여호와라고 섬기며 축제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란 광야에서는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서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서 절망을 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아니하고 보이는 우상과 군사력을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 그것이 불신앙의 근원이라는 설명입니다.

(6)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와 율법생활 등 보이는 그것으로 만민을 구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구태여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자신의 피와 살을 대속의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로 바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성도들이 구약적인 선민사상과 율법지상주의로 되돌아 가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성전과 율법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공동체가 그들에게 익숙하며 보다 구원을 얻기에 효과적인 것으로 여전히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에 그것들을 보태어 가시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세속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구약적인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세우신 새 언약이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8:7-13). ②둘째,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하늘의 보좌와 천국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우리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9:23-28, 10:15-18). 그것이 히브리서의 내용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3:15-16);

(1)  히브리서의 저자가 시편 제95편 제7-8절 말씀을 다시 인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95:7-8). 호렙 산이 있는 미디안 땅 르비딤 광야에서 발생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17:7). 그러므로 아직 출애굽기 제32장에 기록이 되고 있는 시내 산 아래에서 발생한 금송아지 우상사건의 이전입니다.

(2)  하지만 그 죄질은 비슷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3:15)라고 여호와께서 격노하신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시내 산 앞에서 발생한 금송아지 우상사건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격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시켜 버리겠다고 말씀하신 경우를 충분히 연상하게 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32:9-10).

(3)  므리바의 사건이 되었든지 금송아지 우상사건이 되었든지 간에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범죄한 흔적이 없습니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3:16)고 옥석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모든 사람들이 전부 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2)    그 대목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제3장과 제7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글이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성도들의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제멋대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고 바른 복음을 선포하여야 하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모세와 같은 영적인 지도자들이라고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하나님이 40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3:17);

(1)  히브리서의 저자는 또 하나의 뼈아픈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서 절망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13:32-14:4).

(2)  이스라엘 10지파의 수령인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서 본 것은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약육강식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 땅은 힘이 곧 정의이므로 힘이 약한 자는 거주하지를 못하고 그곳에 뼈를 묻게 됩니다(13:32). ②또 하나는 현재 거인 족인 아낙 자손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3:33). 그러므로 그들을 치고서 그 땅을 점령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보고입니다. 그들 거인과 비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메뚜기 떼와 같이 힘이 없고 숫자만 많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점령을 포기하고 애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중론입니다(14:3-4).

(3)  그 장면에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고 계실까요? 히브리서의 저자의 관심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40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3:17); 여호와께서는 귀를 기울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생각을 말하고 있는가를 듣고 계십니다. 그들은 절망에 빠져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거인족의 칼날에 자신들을 죽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냐?고 여호와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처자식이 그들에게 종으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은 광야에서 살다가 향년을 마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4:2). 그와 같은 적나라한 불신앙과 불평 그리고 원망의 현장을 내려다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조치하십니다; “그들 기성세대를 40년 동안에 광야에서 전멸시켜 버리고 어린 자녀와 후세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 땅을 얻게 되는 역사를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14:26-35).

셋째로,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3:18-19);

(1)  히브리서의 저자는 지금까지 시편 제95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주로 출애굽기에 기록이 된 금송아지 우상사건과 민수기에 기록이 된 정탐꾼 보고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대목에 들어서게 되면 내용상 다른 이야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관한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2)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다시 간추려서 신명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가 안식이라고 하는 용어를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얻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같이 너희의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쪽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아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3:20);

1)    광야생활 40년이 되는 해에 모세는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 강 동쪽의 땅을 점령합니다(2:14-3:10). 그리고 그 땅을 르우벤과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의 반쪽 지파에게 배분합니다(3:12-17). 이제 요단 강을 건너 서편으로 진격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여 기타의 지파에게 배분할 차례입니다. 그때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같이 너희의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3:20a)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그것은 광야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을 얻어서 정착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기타 신명기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도 대동소이합니다(12:9-10, 25:19). 그런데 문제는 모세가 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디에서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3)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의 땅은 어디일까요? 그는 어디에서 기업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신명기 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 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34:4-6). 모세의 마지막 깨달음은 이 세상에 있는 가나안 땅이 영원한 안식의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그곳을 정확하게 소망하고서 찾아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4)  그 질문에 대하여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고 있는 히브리서 제11장에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3-16).

결론적으로,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의 지적과 같이 다음과 같은 4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3:17-19);

(1)  첫째, 길이입니다. 믿음은 영생의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부터 구원을 예정하시고 또한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3:15, 21, 1:3-4, 3:14).

(2)  둘째, 넓이입니다.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고 이방인까지 포함하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모든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만민구원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3:1-6).

(3)  셋째, 깊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사망의 권세가 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2:14-15).

(4)  넷째, 높이입니다. 지상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성령님께서 내주 역사하시며 성도가 향년을 마치게 되면 천국에서 영생의 기업과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을 얻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2:10-12, 3:14, 18). 

  위와 같은 사실을 유념하시면서 본문의 내용을 다시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많은 깨달음의 기쁨과 실천의 능력을 그리스도와 성령님 안에서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