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제19강(히4:12-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년 5월 14일(주일)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안식과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에 대하여(히4:12-13);
히브리서의 저자는 ‘저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아니하여야 하겠는데(히4:11) 그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히4:12-13). 그 방법은 일종의 처방과 같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 마치 수술용 칼이나 단층촬영기와 같아서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일일이 해부하고 사람의 내심과 그 품은 뜻까지 촬영하여 창조주께 판단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히4:12).
(2) 둘째, 만물과 만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에 피조물의 상태를 그렇게 시공간을 초월하여 정확하게 투시하시고 진단하시며 그 적절한 처방을 인생 가운데 그리고 역사 가운데 마련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성도들이 깨달아야만 한다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히4:13).
(3) 참고로, 본문(히4:12-13)의 바로 앞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히4:11)고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저 안식’은 아직 얻지를 못하고 있는 ‘피안의 안식’을 말하고 있으며,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이란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4)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지혜롭게도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실패를 타산지석(他山之石, 남의 잘못을 보고서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것)으로 삼아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알고 부디 여호와 앞에서 겸손하고도 정직하게 믿음생활을 잘 하자고 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11:12);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히11:12a);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과 같이 단지 창조주 여호와의 뜻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편견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히11:12a)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설명을 해봅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두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영향력입니다. ②또 하나는 살아 있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2)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과 관련하여 비근한 예로서 사람의 말의 경우를 들어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일종의 소리로서 공기를 진동시키고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고 그냥 사라져버린다고 하면 그것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관의 말이라고 한다면 부하들의 생각과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것은 부하들을 움직이는 살아 있는 지휘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천사들이나 천하만물과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제1장에서 ‘로고스 기독론’(Logos Christology)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시는 창조주의 한 위격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도 요한의 견해의 원형을 창세기 제15장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the word of the Lord came unto Abram in a vision, KJV)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4)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활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주의 한 위격이므로 피조물에 대하여 살아 있는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증거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만물을 지으신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그 능력이 피조물인 사람에게 있어서는 영과 혼과 몸까지 쪼개는 수술용 ‘메스’(mes, a surgeon’s knife)와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영적인 눈’(the spiritual eye)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히브리서 저자의 설명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2)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히11:12b);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수술용 칼인 ‘메스’와 같다는 표현입니다. 그것도 한 면만 날카로운 것이 아닙니다. 마치 로마병정의 검과 같아서 좌우에 모두 칼날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전쟁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가장 인명(人命, 사람의 목숨 또는 목숨을 가진 인간)을 많이 살상한 무기가 로마의 검이라고 합니다. 투박하고 짧은 그 로마의 검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될 수가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양쪽에 날이 서있는 검이기 때문에 그 살상력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하더라도 피조물인 인간은 치명적인 순간 앞에 노출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11:12c);
1)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예리하게 피조물인 사람들의 영과 혼과 몸을 쪼개고 분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할 때의 순서와는 정반대입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각 부문을 조립을 했을 것입니다(요1:3). 그러나 이제는 이미 완성이 되어 있는 사람의 경우이므로 그 반대로 다시 분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립을 하신 독생자께서 분해를 못하실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2)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사람을 영과 혼과 몸으로 보통 구분을 하는데 그 몸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는 ‘관절과 골수’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의 몸은 뼈와 살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살로 채워져 있는 부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단지 뼈의 구성요소인 ‘관절과 골수’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와 유사한 경우가 창세기 제2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창2:21).
3) 풀이를 해보자면, 하나님께서는 뼈만 있으면 살은 얼마든지 채울 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흙으로 만든 것이기에 쉽게 채우거나 뺄 수가 있는 것입니다(창2:7). 일종의 몸체 불리기나 다이어트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타고난 뼈대만은 쉽게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선지서 에스겔 제37장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37:5-6).
(4)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11:12d);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수술용 칼이나 단층촬영기 정도의 도구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 자체가 창조주의 한 위격이시므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적인 판단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생각과 그 숨은 뜻을 모두 통찰하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앞에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고 정직하게 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11:13); 히브리서 저자의 삼위일체 이론이 빛을 발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미 앞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독생자에 대해서는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는 성령님과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알기 쉽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히11:13a); 여기서는 ‘피조물’을 ‘지으신 것’이라고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에 불과하기에 창조주 앞에 서게 되면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 이유는 마치 사람들이 기계를 조립하고 분해를 마음대로 하는 것과 같이 창조주께서는 피조물을 쉽게 분해하고 조립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가 다음 대목에서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고 있는 창조주는 성령 하나님이시라고 하겠습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축복의 기도인 ‘축도’(祝禱, benediction)를 하고 있습니다(고후13:13).
(2)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11:13b); 히브리서 저자의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독생자를 그리스도로 보내시고 그 다음에는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로 보내어 주십니다(요3:16-17, 14:16-17). 그 결과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나라가 건설이 됩니다. 그것을 세상의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 드리게 됩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15:24). 그것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결산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초대교회에서 가장 먼저 체계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사도가 바울입니다(롬8:1-4, 엡3:14-19, 4:6, 고후13:13).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 점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는 또 다른 사도 바울일까요? 아니면 단지 사도 바울과 많은 이야기 및 경험을 나누고 있는 인물일까요? 확정할 수 있는 기타의 자료가 없어서 여전히 히브리서의 저자는 익명입니다.
참고로, 사도 요한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저술은 주후 90년대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주후 60년대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히브리서보다는 훨씬 늦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가 사도 요한의 저작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 말씀의 위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과 혼과 몸을 쪼개며 그 생각과 내심을 모두 감찰하고 계시는 그 능력 앞에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믿음생활을 잘 하여 참된 안식을 얻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창조주의 능력을 가지신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 삶의 결산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사실도 부디 잊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성도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손과 발의 움직임 하나까지)을 전부 감찰하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직시하고서 믿음생활에 신실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험하면서 그 은혜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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