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20강(히4:14-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5. 14:04

히브리서 강해 제20(4:14-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5 15()

 

날카로운 수술용 칼과 같고 만능 투시경과 같은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여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성도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4:14-16)

 

히브리서에서 익명의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주요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위한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직분은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이 땅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준 사실과 직결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역할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 바로 앞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과 상충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두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피조물을 예리하게 해부하는 양면의 수술용 칼과 같고 사람의 모든 생각과 숨은 의도를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는 투시경과 같다고 이미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사실이 숨길 수가 없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처리가 어떻게 될까요? 준엄한 심판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그 심판과 판결에 있어서 상당한 정상참작이 있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육신을 입고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신 독특한 체험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3 6개월간 공생애를 지내시면서 복음사역을 하십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제자들과 백성들이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인정하시고 그 딱한 처지를 동정하십니다(26:41). 그 결과 골고다 언덕에서도 자신을 희롱하고 있는 백성들과 군인들을 부디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23:34).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심으로써 그때부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서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죄 사함과 칭의 그리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렇게 스스로 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 되시고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신 말씀이 이 세상에 인자로 오셔서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심으로써 인생의 고달픔과 육신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인자로 체험하신 그것이 진실로 사람들의 형편을 살피고 그들의 진심에 비추어서 정상참작을 해줄 수 있는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공생애 기간 중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5:25-27).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계기가 마련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인자의 체험을 가지시고 그것에 비추어서 정상참작을 해주시는 대제사장 예수님이 계시니 그것이 큰 복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사실을 지적하면서 본문에서 성도들에게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그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4:14-1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4:14);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4:14a); 큰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의미가 세가지입니다;

1)    첫째, 선민 유대인들의 속죄만을 위하여 대속죄일에 간구하는 대제사장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민과 이방인 모두의 속죄를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줄 수 있는 유일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따라서 큰 대제사장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2)    둘째, 역사적으로 대제사장으로서 스스로 부활 승천하여 천국에 들어가신 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시고 부활 승천하여 천국에서 여전히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십니다. 천국의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지상의 대제사장과는 달리 큰 대제사장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이지만 그 본래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에 불과한 대제사장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시고 있기에 그 이름을 높여서 큰 대제사장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4:14b);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1:29).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에서 자신의 육신을 제물로 삼아서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십니다. 그 사실을 굳게 믿고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통회하고 회개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고 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에서 지금도 우리들을 위한 큰 대제사장으로서 일하시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완벽한 구원의 장치를 깨닫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굳건히 서야하며 믿음이 흔들리는 자들은 이제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4:14b).

둘째로,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육신을 입으신 채 복음사역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이유가 두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사람들이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원으로 나아가기가 얼마나 힘드는 것인지를 직접 체험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4:15a).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복음사역을 하시면서 그들이 연약한 육신과 그 죄성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기가 힘이 드는 것인지를 직접 똑똑하게 보십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과정에서도 그들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하여 잠에 떨어져 있습니다(26:40-41). 그 광경을 보시고 이제 모든 일이 끝났으니 편히 자라고 하십니다(26:45). 그 정도로 사람들의 육신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 처지를 동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4:15a).

(2)  둘째, 그 연약한 육신을 가지시고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인생의 모범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b).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하여 두가지 일을 선행하십니다; ①먼저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십니다(3:13-17). ②그 다음에는 40일 금식을 하시고서 광야에서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받으십니다(4:1-11). 본문의 이 대목은 마귀에게서 받으신 3가지 시험과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시험을 이기시므로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그 시험의 내용 및 예수님의 답변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으로 굶주린 육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드시라고 합니다(4:3). 그것이 현실적으로 당면문제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한시적으로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인생문제를 해결하는데 우선적으로 사용이 되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는데 궁극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6:15, 51).

2)    둘째, 마귀가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4:6). 그 아래에는 수많은 선민 유대인들이 올려다 보고 있습니다. 무사히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착지를 하게 되면 모든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사역이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종처럼 부려서 그렇게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종처럼 부려서 그 능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소원성취를 하는 것이 바로 우상문화의 본질인 것입니다(32:8).

3)    셋째, 마귀가 세상의 천하 권세를 장악하고 있다고 예수님에게 말합니다(4:6). 그러므로 이제 마귀 자신에게 한번 경배를 하면 그 권세를 줄 수가 있다고 합니다(4:7). 그리하면 천하 권세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열국과 만민을 복종하게 하여 쉽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제안을 거절하십니다. 경배는 다만 아버지 하나님께만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4:8).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은 마귀와의 타협이 아니라 마귀의 세력을 멸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2:14-15). 더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권세를 마귀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1:12, 2:6, 28:18, 17:2). 그 뻔한 거짓말을 가지고 마귀는 세상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골짜기로 자꾸만 유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셋째로,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4:16a); 이 세상을 구원하는 대제사장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육신으로 태어나셔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의 연약한 육신과 죄된 삶을 동일하게 느끼시고 불쌍하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직접 자신의 육신으로 베풀고자 하십니다. 그 방법이 자신의 피와 살을 속죄의 제물로 대속의 십자가에서 바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스스로 자신을 희생제물로 삼아 대제사장으로서 속죄의 제사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의 극치입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바라보고서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하는 자들은 누구나 대제사장을 통하여 선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고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2)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b);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의 은혜를 입어서 성도들은 의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맡기신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성도의 삶입니다(28:18-20).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특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면 복음사역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으며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4:11-14, 16:23-24, 4:16b). 그것은 한 마디로, 성령님을 모시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남은 인생을 동행하고 있으므로 이미 천국에서나 맛볼 수 있는 영생의 기쁨을 은밀하게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놀라운 성도의 기쁨과 구원 그리고 영생의 확신과 안식의 복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4-39).

사도 바울의 고백과 선언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것이 바로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로마서와 익명의 저자의 히브리서를 비교하면서 말씀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더 큰 말씀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말씀의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