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96강(창50:15-17a)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5월 17일(토)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이 끝나자 이복 형들은 요셉을 두려워하기를 시작하다;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창50:15-16a).
마치 핵우산처럼 자신들의 든든한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 있었던 아버지 야곱이 147세에 별세를 하고 이제 그 장례식마저 끝났습니다(창50:15a). 그러고 나자 한 지붕 네 가족인 야곱의 집에서 이복 형들 열 명이 모두 애굽 제국의 총리인 요셉이 혹시 자신들에게 복수를 하지 아니할까 두려워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창50:15b-17a). 사실 그럴 만도 합니다. 그들이 그 옛날 요셉에게 행한 일은 용서받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39년 전에 가나안 땅에서 시기와 질투 때문에 철딱서니가 없는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창37:20). 유다의 만류로 겨우 살려서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짐승에게 물려서 죽은 것처럼 꾸며서 아버지 야곱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 이스라엘이 후계자로 여기고 있었던 요셉이 없는 가나안 땅에서 그들은 아버지 이스라엘의 드넓은 목초지(가나안 남부 헤브론에서 중부 도단까지는 무려 115km에 달하는 거리임, 창37:14, 17, 48:22)를 분할하여 모두 족장의 권위를 누리고 잘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동생 한 사람을 희생시키고 그 범죄를 스스로 정당화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요11:50). 만약에 가나안 땅에 흉년이 계속 찾아오지를 아니했더라면 그들이 결코 애굽에 와서 요셉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창42:5-7)”.
첫째로, 한 사람을 죽이고 한 족속이 모두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관념은 무죄한 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사탄의 생각이며 악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은 죄가 없는 메시아를 처형해달라고 로마의 총독에게 넘겼으니 그 죄가 더 크다고 할 것입니다(요11:50-53, 19:11-12)”.
둘째로, 모세는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창50:15)라는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미워하는 감정이 먼저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상대방에게 범죄를 하고 악행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그 일을 행한 사람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원한을 갚는 복수가 이루어지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 속에서 미움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미워하는 그 마음이 제거되고 사라질 수만 있다면 원한과 복수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도가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메시아가 무엇을 행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게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마5:43-45).
셋째로, 열명의 이복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사라지자 이제는 동생인 요셉 앞에 제대로 나서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자신들의 말을 조심스럽게 요셉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창50:16a). 옛 말에 이르기를, “맞은 자는 발을 뻗고 자지만 때린 자는 발을 뻗고 자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러합니다. 비록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뇌리에는 그 옛날 무죄한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가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린 그 악행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 가지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죄의 성격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당사자 앞에서 용서를 받지 못하는 한 죽음에까지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평생 동안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8:2)”. 그래서 요셉의 이복 형들처럼 범죄한 자의 행동은 비겁하며 계속 당사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의 신세가 참으로 측은하고 처량해 보입니다.
그들이 마련한 자구책(창50:16-17)
죄를 범한 자가 살아남기 위하여 어떠한 묘수를 동원하고 있을까요? 거짓말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거짓 증거를 동원하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복 형들은 도저히 거짓 명분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가 없습니다; “115km나 되는 먼 거리를 아버지 이스라엘의 전령으로 그들을 찾아온 동생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서 죽이려고 했습니다(창37:17-20). 그것이 양심에 찔려서 평생 동안 보지 아니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먼 나라에 노예로 팔아버린 것입니다(창47:28). 그리고 짐승에게 찢겨서 죽은 것으로 거짓보고를 했습니다. 어떠한 명분으로 그와 같은 참혹한 일을 변명하고 정당화할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형들은 차선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이 죽기 전에 자신들에게 또 하나의 유언을 남겼다고 조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창50:16b).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창50:17a).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현명한 애굽의 총리인 요셉에게 과연 통할 수 있을지 그 효과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이왕 거짓증거를 제시하는 김에 한 가지 확실한 보증자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라는 대목입니다. 이복 형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느끼게 되자 그 때가서야 조상의 하나님을 찾고 또한 창조주의 종들이므로 부디 해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말은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첫째, 이국 땅 애굽에서 요셉은 오로지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서 삶을 이어온 사람입니다(창39:1-3, 40:8, 41:25). 조상들의 하나님에게 형통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 점을 요셉이 이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둘째, 요셉은 형제들이 모두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며 창조주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자식의 생명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듯이 창조주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서 창조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창1:26-27, 44:30-34). 그래서 모든 백성들의 목숨을 연이은 흉년으로부터 구해내고자 노력을 한 사람입니다(창41:56-57, 45:7, 50:20).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형들이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창50:17)라고 사람을 보내어서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간교하게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없이 불쌍한 처지에 내몰려 있는 요셉의 형들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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