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97강(창50:17b-2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5월 17일(토)
이복 형들을 불쌍히 여기는 요셉(창50:17b-19)
이복 형들은 감히 동생인 요셉 앞에 나서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엄청난 죄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편으로 요셉에게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하여 부디 자신들을 용서해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창50:16-17). 하나님의 지혜를 지니고 있는 요셉은 형들이 사람을 시켜서 그에게 전달하고 있는 말 가운데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진실인지를 꿰뚫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의 진실과 거짓을 구태여 따지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그와 같은 거짓 유언을 전달하면서 그나마 요셉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아서 애굽 땅에서 쫓겨나지를 아니하고 살아남고자 하는 그들의 처지가 한없이 불쌍할 뿐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용서 이전에 요셉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불쌍하게 생각을 하고서 죄를 용서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긍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용어입니다(출33:19).
형들이 인편으로 전달하고 있는 말을 듣고서 요셉은 한없이 불쌍한 죄인들의 모습, 그 적나라한 초라함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39년 전에 공모하여 자신을 해치려고 하다가 그나마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린 그들이 이제서야 알고 보니 별 볼일 없는 초라한 인생들에 불과합니다. 그 모습들이 불쌍하고 그리고 자신이 지나온 세월이 억울하여 요셉은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창50:17). 그와 같은 요셉의 눈물은 훗날 예수님의 눈물과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죽음에 마냥 슬퍼만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부활의 주인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은 창조주의 능력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를 살리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이며 그 예수님이 지금 자신들 앞에 서 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도 전혀 믿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한갓 능력이 많은 선지자나 용한 의원 정도로 치부를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모습이 하도 한심하여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무덤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엄중하게 명령을 하십니다. 그 결과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살아서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요11:32-35, 42-44).
요셉이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형들은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센 땅에서부터 수도인 테베로 친히 찾아와서 석고대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창50:18). 자신들의 죄가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복 형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하여 앞으로는 요셉의 종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말입니다(출22:3). 그 참상을 보고서 마침내 요셉이 입을 떼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50:19). 죄악을 범하는 자는 인간이지만 그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요셉이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심판주가 되십니다. 사람은 모두가 정죄하고 함부로 심판을 할 수 있는 전능자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줄 수 있는 능력도 아예 없는 자들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러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면서 살 길을 열어주다(창50:20-21)
자신의 인생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비로서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그 점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50:20-21).
첫째로, 사람들은 서로 해칠 수 있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생명들을 구원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서로 해치려는 자들을 어떻게 생명을 구원하는 자들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지극히 어려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섭리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복 형들이 요셉의 목숨을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그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러자 애굽에서 요셉이 조상의 하나님께 매어 달리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요셉을 돌보시고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마침내 13년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때부터 요셉은7년 흉년 가운데 백성들의 목숨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둘째로, 악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선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창50:20). 사람은 악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선을 행하고 있습니다(막3:4).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자 합니다. 반면에 사탄에게 사로잡혀있는 악인은 반드시 사람의 생명을 해치려고 합니다. 지금 형들의 호소를 듣고 있는 요셉은 흉년으로부터 백성들의 목숨을 구해내고 있는 선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39년 전의 형들의 죄악을 들추어내어 구태여 심판을 하려고 생각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창50:19).
셋째로, 하나님은 악한 자의 계교를 역이용하시는 지혜자이십니다. 악한 꾀를 뒤집어서 선한 역사를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요셉의 일생 가운데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그가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창39:1). 그리고 의금부 옥사에 들어가서 보디발의 천거로 바로의 측근들의 옥바라지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창40:4). 마침내 술 맡은 관원장의 천거로 바로의 꿈을 해석해주고 좋은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창41:9, 41). 그 결과 7년 흉년으로부터 백성들의 목숨을 구해내고 아울러 아버지와 형제들의 가족들의 목숨도 구원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창41:54-57, 47:12)”.
결론적으로, 그 모든 시나리오가 하나님의 선하신 작품입니다(창50:20). 그 작품의 주인공으로 한 평생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무런 조건도 달지를 아니합니다. 무조건적으로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자손까지 돌보겠다고 강력하게 확인을 해주고 있습니다(창50:21).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의 위대한 모습을 눈으로 선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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