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18강(창4:3-1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9월 13일(금)
제사를 드리는 마음의 자세는 어떠하여야 하는가?(창4:3-6)
아담부부가 에덴동산 바깥에서 얻은 두 아들의 이름이 카인과 아벨입니다(창4:1-2). 그들은 세월이 지난 후에 장성하게 되자 자신들의 직업을 가지게 됩니다(창4:2-3). 카인은 농사꾼이 되고 아벨은 목축을 하게 됩니다(창4:2). 각각 소득을 얻게 되자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게 됩니다. 그들이 제물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8)는 깨달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 깨달음은 그들의 어머니인 하와의 신앙고백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4:1). 아담부부의 하나님 신앙이 자식들에게 대물림이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과 실천은 훗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를 했을 때에 다시 나타납니다. 그 족보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대제사장 살렘 왕 멜기세덱이 등장하여 그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아브라함에게 깨닫게 해줍니다(히7:1-4).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리고 있습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20). 그러므로 제물을 드리는 마음가짐은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전리품도 얻게 해주셨기에 모두를 드릴 수는 없고 십분의 일이나마 드린다고 하는 겸손함입니다.
과연 그 마음 속 겸손함과 깨달음이 제대로 대물림이 되고 있을까요? 그러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모세가 적고 있습니다; “자신의 제물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주시면 별문제가 없지만 그러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그 속마음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카인이 하나님의 처사가 못마땅하여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고 있습니다”(창4:4-5). 그것은 자신이 준 제물을 왜 감히 감지덕지하며 받지 않느냐는 항의의 뜻입니다. 불만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습니다. ‘감히 내가 준 선물을 퇴짜를 놓다니, 괘씸하기가 그지없다’는 사고방식이 카인의 속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인 자신과 동격으로 보거나 아니면 아래로 깔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교만입니다. 그리고 패역함입니다. 하와의 죄성이 그대로 카인에게 유전이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더 큰 죄악이 발생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엄중하게 경고하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창4:6).
카인의 잘못은 어떠한 죄악으로 치닫고 있는가?(창4:5-10)
첫째로, 카인의 잘못의 시작은 이미 살펴본 그대로 유전적인 교만함입니다. 그런데 그 교만함이 윗대보다 더한 것입니다. 어머니 하와의 경우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낸 세월이 오랩니다. 그래서 아담부부와 하나님 사이는 무척 친합니다. 너무 친하다가 보니까 그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금단의 열매를 하나 따먹어도 너그럽게 양해를 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인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겨난 후에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밀함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우신 심판주이며 동시에 창조주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카인의 경우에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교만함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라고 속이는 마음, 그것이 교만의 본질이며 사탄이 주고 있는 마음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위신을 여지없이 깎아 내리고 자신을 창조주의 위치에 세우고자 하는 반역의 마음가짐입니다. 그 점을 아시고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사탄이 인간에게 교만한 마음을 주고 죄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서슴지 아니하고 죄악을 범하게 됩니다(약1:14). 그리하면 죄의 결과로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약1:15). 한 마디로 정리를 하자면, 죄와 사망은 사탄의 권세입니다(롬8:2). 사탄이 죄를 가지고 카인을 죽음으로 지배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서 하나님이 카인에게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사탄에게 자신의 마음을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만을 욕심으로 그리고 반역의 죄악으로 키워나가고자 하는 사탄의 흉계를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그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카인이 완전범죄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아우 아벨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다고 하면서 넓은 들판으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곳에서 기습적으로 동생을 단단한 농기구로 쳐죽입니다(창4:8). 시신을 흔적도 없이 땅 속에 파묻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시침을 떼고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완전범죄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아벨과 카인의 주위를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카인은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그가 모르고 있습니다(요4:24, 히11:1). 근본적으로, 몸은 시공간에 갇혀 있지만 영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갇혀있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의식을 못해서 그렇지 영은 모든 시공간에 동시에 항상 존재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깨달음 그대로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6). 그 사실을 모르고서 아벨의 소재를 물으시는 하나님에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뻔뻔하게 거짓보고를 하고 있는 카인의 모습이 보기에 심히 딱하다고 하겠습니다(창4:9).
셋째로, 하나님의 물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살해당한 현장에서 흘린 아벨의 피가 살아서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창4:10). 더구나 그 무죄한 자의 피를 받아 마시게 된 땅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창4:11). 그것은 받아 마셔서는 아니 되는 피입니다. 무죄한 자의 억울한 피를 마시게 되면 땅은 황폐화됩니다. 나아가서 그 피의 양이 많아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저주하시고 심판을 행하십니다(창6:11-13, 15:16, 왕하21:11-13). 그래서 땅이 카인의 살인행위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인이 생각하고 있는 그와 같은 완전범죄는 하나님 앞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은 24시간 피조세계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카인의 모든 행적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더구나 그 마음 속까지 통찰하고 계십니다(히4:11-13). 그런데 왜 카인의 범죄에 대하여 미리 예방조치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왜 억울하게 아벨이 희생되는 현장을 지켜보고만 계셨던 것일까요? 미리 카인에게 경고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조치로 보입니다. 별로 실효성도 없으며 강제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카인이 자신의 마음 속 욕심과 죄의 소원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생을 살해하는 최초의 사람이 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그 모든 사실은 한 가지의 결론으로 치닫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선의 형상이 악의 욕심을 이길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생명을 죽이는 역사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를 회수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선과 악 가운데 어느 것이든지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고귀한 자유의지를 인정해줌으로써 사람이 짐승과 다르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부인하거나 하나님께 반납하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영원히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가치의 소멸입니다. 그리고 죽음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완전한 사망입니다”.
'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강해 제20강(창4:16-24)(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0.14 |
---|---|
창세기 강해 제19강(창4:11-15)(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0.14 |
창세기 강해 제17강(창4:1-2)(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0.13 |
창세기 강해 제16강(3:18-24)(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0.13 |
창세기 강해 제15강(창3:12-17)(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