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16강(3:18-2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9월 11일(수)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8)
하나님과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함께 거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우선 외적인 모습이 비슷합니다. 나아가서 내적인 성품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한 것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창1:26). 그런데 선과 악을 판정하는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아무리 옆에서 지켜보아도 아담과 하와는 도저히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지혜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해놓은 만물을 그 분의 뜻에 따라 관리를 하는 그 정도의 지혜와 능력을 부여 받은 하인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욕심이 많은 하와는 그 점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사탄이 그 사실을 간파하고서 하와의 동무인 뱀을 통하여 충동을 한 것입니다. 하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남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결혼생활을 영위하면서 보니까 그저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남편도 출세를 시키고 자신도 하나님처럼 만물 위에 군림을 할 수가 있을까요? 하와는 마치 그 옛날 사탄처럼 창조의 질서를 어기고 자신이 감히 창조주가 되고자 패역(悖逆, 패륜과 반역)을 시도한 것입니다(사14:13-15). 친정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을 배신합니다(창2:22). 그리고 창조주에게 반역을 도모합니다(창3:5-6). 그 패역한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금단의 방법으로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도 하나님처럼 만들고자 선악과를 먹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잘못이며 원죄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생각을 해보자면, 그 동안 하와의 마음 속에서만 꿈틀거리고 있던 욕망이 뱀의 설명을 듣자 깨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죄라면 하와는 억울합니다. 그와 같은 원초적인 욕망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하와 자신의 속마음 속에 내장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구를 실현하고자 행동에 나섰다고 하여 천하의 죄인으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생기를 영원히 거두어 가버리시는 죽음의 처벌을 하시니 미칠 지경입니다(창3:19).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참으로 착한 것 같습니다. 그 가혹한 처벌에 대하여 토를 달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들을 낳게 되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어떻게 상황의 전개가 그렇게 발전할 수가 있을까요? 도대체 그 두 사람은 패역사건을 통하여 어떠한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구분이 확실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생명력을 생기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사람은 반드시 죽고야 마는 존재입니다(창2:7). 자신이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 그 ‘에노스’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에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게 됩니다(창4:26a).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영생의 구원을 달라고 간구하게 됩니다(창4:26b).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야 아담과 하와가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의 존재의 한계를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깨달음을 아들 셋(Seth)에게 전수합니다. 셋은 그의 아들 ‘에노스’에게 그렇게 신앙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담부부는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에덴동산 안에서 하나님의 두터운 보호 가운데 있을 때에는 마치 철부지 요셉과 같았습니다(창37:2-11). 그러나 동산 바깥으로 쫓겨나서 애굽과 같은 인간세상에 나갔을 때에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창39:1-2).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훨씬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어 달렸습니다. 살려달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동행과 형통의 복을 달라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역사건의 결과 자신들이 가는 곳마다 한평생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라는 척박한 환경입니다. 결코 우호적이지 아니한 땅과 인간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를 모릅니다. 오늘 날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지구온난화와 이상기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은 평생 땀 흘려 일하면서 계속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도 하나님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할 따름입니다; “다시는 패역할 마음을 먹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부디 에덴동산에서 다시 살 수 있도록 구원해주십시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함께 못박히게 되는 죄인의 심정 그대로입니다(눅23:42-43).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실락원(失樂園, lost paradise)에서 살게 된 이후부터 아담부부와 그들의 후손인 인류의 소원은 낙원의 회복 그것밖에 없습니다.
모든 산 자의 어머니 하와와 열국의 어머니 사라(창3:20, 17:15-16)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 처벌을 하십니다; 첫째, 비우호적인 환경에서 고생스럽게 한 평생을 살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창3:19). 둘째, 아내는 고통 가운데 자녀를 낳고 남편에게 바친다는 것입니다(창3:16). 그래서 아내를 돌아보는 아담의 마음은 참담합니다. 그녀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 먹은 관계로 자신도 공동정범(共同正犯, 똑 같은 범죄의 주범들)으로 처벌이 되고 있습니다. 그때 왜 그 열매를 받아 먹었던가? 두 가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금단의 열매를 아내 혼자만 먹고서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 싶었습니다. 그녀가 없이는 자신의 인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창1:27, 2:21). 둘째, 자신이 비록 하나님의 종이지만 가정에서는 우두머리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선악과를 따먹고서 하나님처럼 심판주가 되어버린다고 한다면 꼼짝없이 자신이 그녀의 하인이 될 판입니다. 그것은 아니 될 노릇입니다. 그래서 서슴지 아니하고 아내가 주는 선악과를 단숨에 먹어 치워버렸습니다. 어찌 되었던지 간에 이제는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다시 주워서 담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아내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고생을 하여 자식을 낳고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으로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을 위로해줄 수가 있을까요? 영생에 대한 소망밖에는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름을 하나 지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에덴동산에서 수 많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결코 한번도 사용하지 아니하고 소중하게 간직해둔 이름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창2:20). 그 이름 ‘하와’를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 뜻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창3:20). 비록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지는 못하게 되었지마는 그래도 하와가 그렇게 고생하여 낳게 되는 후손들을 통하여 후세에 영원히 그들에게 기억이 되고 살아남게 되기를 희구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영생을 희구하는 아담의 마음이 아내의 이름 가운데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게 되는 아브람 부부에게 하나님이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뜻은 ‘열국의 아버지’입니다(창17:5). 다음으로 사래를 ‘사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열국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창17:16). 사라가 많은 나라와 백성들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와’의 뜻과 흡사하지만 두 가지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하와’는 영생을 희구하는 뜻이 강하지만 ‘사라’는 자손번성의 뜻이 더 강합니다. 한 마디로, ‘하와’는 내세적이지만 ‘사라’는 현세적인 셈입니다. 둘째, ‘사라’라는 이름은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결코 후세적이거나 내세적인 희망사항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라’의 후손의 나라는 지도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하고 1,900년 가까운 공백을 딛고서 20세기 중엽에 다시 가나안 땅에서 부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으로만 가능한 현대사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붙여준 이름자의 무서움을 새삼 느끼게 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하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 구원과 영생을 호소하고 있는데(창3:20) 그 소원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들어주고 계실까요? 그들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으로 은연중에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창3:21). 인간의 원죄를 가리어주고 다시 영생의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역사가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그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역할을 수행하는 분이 바로 ‘여자의 후손’일 것입니다(창3:15). 그렇다면 아담은 하와의 후손이 먼 훗날 그들을 구원해줄 것이기에 그 뜻을 미리 담아서 아내의 이름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작명(作名, 이름을 짓는 것)의 대가(大家, 으뜸이 되는 전문가)가 아담인 셈입니다. 참고로, 그 내용을 말하고 있는 히브리서의 언급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가죽 옷과 생명나무의 길(창3:21-24)
인간의 치부는 무화과나무의 잎으로는 가려지지가 않습니다(창3:7). 사람의 눈은 가릴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힌 것으로 보입니다(창3:21). 어린 양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고 그 치부를 가릴 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아무 양의 가죽으로 가리더라도 그와 같은 효능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아니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소위 ‘무지개 언약’을 선언하십니다(창9:8-17). 그 내용은 비가 무지하게 땅으로 쏟아질 것 같으면 구름 속에 자동적으로 무지개가 떠오르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무지개가 일종의 안전변(a safety valve)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아름다운 무지개가 하나님에게 언약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9:11),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9:14-15).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무지개를 보시고 자신의 분노를 제어하시는 것입니다.
똑 같은 방법이 출애굽기에 나타납니다. 유월절 밤에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장자를 죽이십니다(출11:5-6, 12:29). 그렇지만 어린 양의 피가 그 집 문인방과 좌우설주에 발라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그 문을 가려주십니다(출12:13, 23). 죽음의 천사가 그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 집의 장자들은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영적으로 성도에게 임하여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죄를 묻지 아니하고 죽음의 심판을 가려주십니다(요5:29, 6:53-57). 그 점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그와 같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여기서의 ‘가죽 옷’이라고 하겠습니다(창3:21).
하나님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마저 따먹고서 죄 가운데 영생하게 되는 비극을 지극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 그래서 두 가지 예방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첫째,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내보냅니다(창3:23). 동산의 바깥에 나가서 땅에 식물을 경작하면서 먹고 살도록 조치를 하고 있습니다. 둘째,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아담과 하와를 막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에덴동산에는 출입문이 동쪽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성막이나 예루살렘성전과 동일합니다(출38:13-16, 겔43:1-2, 47:1). 그 출입문으로 접근하는 길을 아예 차단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접근하는 경우에도 멀리 쫓아내고 맙니다.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허용하시기 전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 길이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다음과 같이 뚫리게 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3-1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안내하는 그 천국에 드디어 그 옛날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다음과 같이 열린 것입니다;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결국, 창세기의 기록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으로 연결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강해 제18강(창4:3-10)(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0.14 |
---|---|
창세기 강해 제17강(창4:1-2)(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0.13 |
창세기 강해 제15강(창3:12-17)(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0.13 |
창세기 강해 제14강(창3:9-11)(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0.13 |
창세기 강해 제13강(창3:8)(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