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13강(창3: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9월 9일(월)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창3:8a)
에덴동산에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아담부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차를 하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창3:8a)라고 표현이 되어 있기에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좋은 비단결 같은 바람이 불고 있으니까 바람도 쏘일 겸 하나님께서 나들이에 나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조금 깊이 생각을 해보면, 다른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차를 하실 때에 바람이 동행을 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왕상19:11),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그러므로 에덴동산에 갑자기 바람이 분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차를 하신다는 신호입니다. 아담부부가 얼른 그 사실을 알아채고 있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8b)
그래서 아담부부는 얼른 나무 사이에 숨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재미있게 숨바꼭질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족처럼 여기고 있는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고 있는 장면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모습입니다.
죄란 것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 것만 같은 자 앞에서는 되도록 그 눈을 피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이 되는 상대방 앞에서는 시침을 딱 떼고서 한 없이 뻔뻔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에 너무 익숙해지는 경우에는 그만 후안무치(厚顔無恥, 얼굴피부가 두꺼워지고 수치를 모르게 되는 것)가 되고 맙니다. 누구 앞에서나 뻔뻔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까지 무시합니다. 그리고 잘못 만든 책임을 오히려 묻고자 합니다. 그토록 기가 막히는 일이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극단적인 죄인들의 마지막 항변에도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창조주의 책임을 다 지시고자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대속의 사건의 의미입니다; “창조주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파송을 하고 있습니다(요1:1-4, 14). 비천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게 합니다. 인간 사이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성장을 하면서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체험합니다(히4:15). 그리고 창조주를 원망하는 죄인들의 소리를 모두 듣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의 처지에 대하여 눈물을 흘립니다(요11:35).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스승을 배신하는 베드로의 모습까지 긍휼의 눈으로 쳐다보십니다(눅22:61). 그 결과 그들의 모든 죄를 청산하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고 맙니다(눅23:42-43). 창조주가 사람을 잘못 만든 책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지신 것입니다(빌2:5-8)”. 그러므로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창조주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킬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이제부터는 사람들이 변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자살을 시도하더라도 자신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를 깨워서 심판의 자리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요5:29).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더 이상 창조주의 책임을 운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가 이 세상에 온 이후에 발생하게 되는 가장 큰 변화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주님이 오신 이전, 곧 ‘주전’(主前, Before Christ)과 그 이후인 ‘주후’(主後, After Christ)로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시대는 인간에게 모든 책임이 넘어온 시대가 되었으므로 그 때부터 종말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단 한번이라도 듣게 되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도 종말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법은 개인에게 도달된 시점부터 발효가 되고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변명도 윤회의 법칙도 통하지가 아니합니다. 자신이 복음을 들은 그 인생이 마지막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바람이 불 때에 더 이상 비겁하게 나무 뒤로 숨지를 말고 똑바로 걸어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최우선으로 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주님의 의견을 말씀 가운데서 먼저 찾아보고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주인의 뜻대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하는 각오를 밝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결심대로 실천을 할 때에 다시 하나님의 생기를 영원히 공급받을 수 있는 구원과 영생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창2:7, 신30:19-20, 요20:22, 행2:1-4, 계22:1-5). 그와 같은 구원과 영생의 길을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을 모두 구원하시고 싶어서 친절에 친절을 더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창50:20, 요1:14-18). 그 애타는 마음에 이제는 각자가 적극적으로 반응을 해야만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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