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12강(창3:1-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9월 8일(주일새벽)
뱀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탄의 특징(창3:1-5)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동물들이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동무처럼 사이 좋게 지내고 있습니다(창2:18-20). 훗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의 나라’에서도 동일한 모습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사11:5-6), “내 거룩한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9).
아담부부와 동무가 되고 있는 동물들 가운데 뱀이 있습니다. 사탄은 뱀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과 이간을 시키려고 획책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뱀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보입니다; 첫째, 뱀은 성품이 간교하기 때문입니다(창3:1). 그것은 사탄의 성품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강자에 대해서는 간사합니다. 비위를 잘 맞춥니다. 그렇지만 속마음은 교활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거꾸러뜨리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그 점을 이사야 선지자가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사14:12-20). 둘째, 뱀이 아담부부와 친하기 때문입니다. 동무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틈을 노리기에 적합합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그리스도 예수의 발꿈치를 물기 위하여 사탄은 스승의 신임이 두터운 가룟 유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창3:15, 요13:18, 27). 오늘 날도 사탄은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가장 당사자와 가까운 사이에 있는 자를 이용하는 책략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뱀의 말 가운데 사탄의 특징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뱀은 아담부부 앞에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의도와 말씀에 대하여 가장 정통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인간이 따먹게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얻게 될 것이기에 그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선악과를 금단의 열매로 분류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창3:4-5). 그러므로 그 열매를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말은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창3:22a). 그러나 그 열매를 따먹는 사람은 반드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생명나무의 과일을 동시에 따먹는 것입니다(창3:22b). 그렇게 되면 아담부부와 그 자손들은 죄 가운데 영생을 누리게 되는 저주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절대로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고 있습니다(창3:24).
훗날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게 된 인간을 회개시켜서 의인으로 만든 다음에 구원하고자 하십니다(마4:17, 요3:14-17). 그 때에는 천국으로 인도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고 영생을 누리도록 만들어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계21:27-22:5). 그 내용이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뱀을 통하여 아담부부에게 결코 죽지 않게 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렇게 진리와 비진리를 적절하게 혼합을 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을 하면서 사람들의 욕심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술책을 구사하는 자들이 예나 지금이나 사탄의 화신들입니다. 거짓선지자들과 적그리스도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는 뱀의 질문의 의미와 노림수(창3:3-6)
에덴동산에는 적어도 수천 그루의 유실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동산의 중앙에 오직 두 그루의 나무의 열매만이 금단의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탄이 아담부부의 동무인 뱀을 통하여 참으로 교묘하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느냐?”(창3:1)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면,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질문입니다. 평소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아담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그 일을 잘 알고 있는 뱀이 전혀 모르는 것처럼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침을 떼고서 하고 있는 그 질문 속에 일종의 저의가 담겨 있습니다. 그 저의는 두 가지 생각을 아담부부에게 주입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 뱀의 질문에 답을 하다가 보면 동산의 유실수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다시 구분이 됩니다. 먹을 수 있는 것보다는 먹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관심이 다시 촉발됩니다. 그것이 이슈화된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이슈로서 끄집어내고자 하는 사탄의 획책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둘째, 사람이란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먹지 말라고 금지한 것에 대하여 미련이 크며 억울해하는 심성의 소유자인데 사탄은 교묘하게도 그 심리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아담부부에게 수백 가지 종류의 유실수를 먹도록 허용했을지라도 단 2종류의 유실수를 못 먹는 것으로 규정을 했기 때문에 그들 부부는 마치 모든 유실수를 못 먹게 한 것과 같은 억울한 심정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처사가 원망스러워집니다. 은근히 반감이 생깁니다. 먹을 수 있는 명분이나 방법이 있다면 한번 맛을 보고 싶어집니다. 그와 같은 아담부부의 심리를 사탄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가장 효율적으로 악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무서운 사탄의 책략입니다.
아담부부는 왜 진리와 비진리를 교묘하게 구사하는 사탄의 전략에 말려들고 있는가?
사탄의 말에 인간의 욕심이 충동을 받고 있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한다고 사탄이 뱀을 통하여 거짓정보를 흘리고 있습니다(창3:4). 오히려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구별하고 지혜를 얻어서 재판관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창3:5).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관이 될 수가 있다고 하니 피조물의 입장에서 그보다 더 큰 행운이 없을 것입니다. 피조물을 창조주의 위치로 끌어올려줄 것인가? 그와 같은 엄청난 효능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금단의 열매로 분류를 하신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번 격발된 의심과 욕심은 이제 듣고 싶은 말만을 듣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것으로 낙착이 되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장로 야고보가 그 정답을 너무나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람을 낳느니라”(약1:14-15).
사탄의 화신인 뱀의 말을 따른 결과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무엇인가?(창3:7)
뱀의 말을 듣고 욕심에 이끌리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는 갑자기 자신들의 몸이 벗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창3:7a). 그래서 본능적으로 무화과 나무의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가리고 있습니다(창3:7b).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고 묘사가 되고 있는데 갑자기 수치를 느끼고 치부를 가리기에 급급합니다. 그와 같은 현상이 가장 먼저 발생하고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지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창조력을 가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둘째, 세상적인 사람의 지혜입니다. 그 차이는 창조주의 지혜와 피조물의 지혜라는 엄청난 차이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생명을 돌보고 살리며 영적인 안목을 가지게 해줍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사람의 지혜는 자기중심적이며 육신적인 안목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욕적인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갑자기 자신의 아내이지만 그 육신에서 정욕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당황하여 급히 무화과 나무의 잎으로 가리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 안에서 아담과 하와는 가정을 이룬 최초의 인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아버지이시며 중매쟁이였습니다. 창조주와 함께 살고 있었기에 생명의 영적인 기운을 항상 받고서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은연중에 아담부부의 안목이 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벌거벗었으나 세상적인 정욕으로 바라보지 아니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욕심과 정욕이 발동하는 육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영이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것, 곧 죄인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홍수심판 직전의 인류의 모습이 그 점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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