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10강(창2:4-2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0. 10. 15:53

창세기 강해 제10(2:4-2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96()

 

생기(生氣, 생명의 기운)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2:7)

 

사람은 코로 숨을 쉽니다. 숨은 기체의 흐름입니다. 그 기체는 피에 실려서 온몸을 돌고 있습니다. 그것을 세포가 받아 들여서 양분을 태움으로써 생체에너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육신적인 삶입니다. 그와 같은 신진대사의 활동은 모든 생물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특이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living soul)이 되니라”(2:7). 하나님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기에 사람이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환언하면,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영원한 생명도 창조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전도서의 표현과 선지자 에스겔의 표현이 이해가 됩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21),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37:10).

자연환경이 줄 수 없는 생명의 기운을 창조주가 사람의 코에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러자 육신의 활동이 아니라 새로운 활동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혼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갑자기 지,,(知情意, intelligence, emotion, free will)라는 세 가지 기능이 작동하게 됩니다; 첫째, 학습을 통하여 지식을 축적하기를 시작합니다. 냉철하게 정보를 판단하고 이성적으로 지식체계를 활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행동방향을 결정함으로써 본능적인 행동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두뇌활동이 왕성해진 결과입니다. 둘째, 감정을 마음 속 깊이 느낍니다. 그것을 절제하고 순화를 시킵니다. 예술행위가 가능해지며 때로는 상대방을 감동시키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은 감수성이 예민해진 결과입니다. 셋째, 이념과 사상이 형성됩니다. 간혹 이데올로기 때문에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본능적인 삶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보다 가치가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모든 혼적인 활동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인간에게 주입됨으로써 발생한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대언합니다. 뼈에 힘줄과 살이 생기고 가죽이 덮이며 몸을 형성합니다(37:7-8). 그 다음에 생기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자 곧 살아나서 극히 큰 하나님의 군대가 됩니다(37:9-10). 그것이 생기의 힘입니다. 그런데 원시적인 정령신앙에서는 그 생기가 자연에 공기로 또는 바람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들은 오늘 날에도 서로 만나게 되면 코를 마주 비비면서 키아 오라라고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생명의 기운이 상대방에게 들어가기를 바라고 함께 생명의 기운을 공유하면서 살자는 뜻입니다. 그 의식을 바라보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코를 마주 대시고서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시면서 키아 오라라고 외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상상을 하게 됩니다.

 

들에는 초목이, 밭에는 채소가, 그 경작의 의미(2:5-6, 15)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육지를 창조하시고 땅은 식물을 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붉은 땅이 갑자기 푸른 대지로 바뀌었습니다(1:12). 그렇지만 풀과 채소와 유실수가 서로 제멋대로 뒤엉켜있는 상태입니다. 누가 그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정돈을 할 수가 있을까요? 한 마디로, 경작인이 필요합니다. 경작인을 양성하자면 교육이 필요합니다. 지식도 필요하고 문명의 도구도 사용을 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그 교육의 장소가 에덴동산이고 교육을 받고 있는 자가 아담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세계 4대문명을 건설하게 해줄 물줄기가 흘러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연을 가꾸고 돌볼 수 있는 경작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2:5b). 들과 밭으로 구획정리를 하고 들에는 유실수와 풀이 자라도록 하고 밭에는 채소를 심고 가꾸며 잡초를 뽑아줄 수 있는 경작인이 필요하다는 표현입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2:5a),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2:6). 안개와 이슬만으로도 식물이 자라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성하게 자랄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적절한 시기에 비가 내려야만 합니다. 경작인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게 해주셨기에 에덴동산에서부터 강물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2:10).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마치 에덴동산처럼 만들어주겠다는 표현이 나중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11:14).

 

강의 발원지가 되고 있는 에덴동산의 위치와 4대강 유역문화의 특징(2:10-14)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중력의 법칙을 만드셨기 때문에 위치에너지가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게 됩니다(1:9).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위치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세계 4대강의 동시 발원지이면서 가장 높은 곳이 과연 어디일까요? 지금부터 그 위치를 찾아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쉽게 발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에덴동산의 유일한 출입구가 동문인데 그 길이 봉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회전하는 화염 칼을 배치하여 그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3:23-24).

고대의 4대 문명은 강의 하류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첫째, 비손 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둘러서 흐르고 있습니다. 홍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아라비아 서해안과 아프리카의 동해안으로 보입니다(2:11). 그 지역의 특징은 귀금속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금과 진주 그리고 호마노 등입니다. 둘째, 기혼 강은 이디오피아 내륙지방 구스에서부터 이집트로 흘러가는 나일 강으로 보입니다(2:13). 셋째와 넷째 강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수렴이 되고 있는 두 강입니다. 오늘 날의 명칭으로는 유프라테스와 티크리스입니다. 그 강의 이름을 모세는 유브라데와 힛데겔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앗수르 강 상류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를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2:14).

역사적으로, 고대 4대문명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기술은 이스라엘 중심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근동 지역의 강들만이 언급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금제의 두 나무를 동산의 중앙에 배치하고 있는 이유(2:9, 16-17)

 

정부종합청사 정문 앞에 태극기를 게양합니다. 누구나 한국사람이라면 국기에 경의를 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심이 되는 상징의 조작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청지기 경작인의 교육의 전당이 에덴동산입니다. 그 가장 중심에 두 그루의 유실수가 심겨져 있습니다(2: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의 나무입니다. 그 두 그루의 나무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둘째, 지혜로써 심판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그루의 나무를 쳐다보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시며 지혜를 가르쳐주시는 스승이시며 심판주라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계속적으로 새겨나가야만 합니다. 동시에 자신은 종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에덴동산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그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동산 가장 중앙에 가장 높은 위치에 그 두 그루의 나무를 심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서 직분을 맡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사무엘 선지자는 두 번이나 왕이 될 자에게 기름을 부은 자입니다. 첫 번째는 용력이 출중해 보이는 사울을 하나님의 명으로 선택을 했습니다(삼상10:21, 24). 사울 왕은 외적을 막아내는데 있어서 유용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인기를 얻게 되자 그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두 번째 왕을 선택할 때에는 용력 대신에 그 마음의 중심을 보고 있습니다(삼상16:7). 그 마음의 중심이 여기서는 에덴의 중앙입니다.

 

아담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있는 애완동물들(2:18-20)

 

동물들 가운데는 유독 사람을 주인으로 알고서 잘 따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축들은 사람과 같은 방에서 기거를 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따로 있습니다. 그렇지만 애완동물은 마치 동무처럼 방을 같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가까이에 있으면서 주인을 따르고 친구가 되기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어 줍니다(2:18-20). 그들 대부분은 성격이 온순합니다. 체온도 따뜻합니다. 마치 따뜻한 피가 통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하자가 있습니다. 사람과 같은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판단능력이 한참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동물과 함께 친구가 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지낼 수가 있다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무인 사람이 가까이에 없을 경우에는 애완동물이라도 키우면서 외로움을 달래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현상이 현대사회에서도 흔합니다.

동무는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지냅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만들어준 마치 장난감과 같은 애완동물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동무 삼아 지내고 있습니다(2:19-20). 한동안은 만족을 합니다. 그러나 장난감이 싫어지는 아이와 같이 그만 실증을 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완동물 다음에 하와를 창조하여 평생의 반려자로 삼게 합니다. 비로서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는 가정이 탄생을 하고 있습니다(2:21-25).

이상의 내용에 비추어보게 되면 두 가지의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 아담과 애완동물들은 서로가 이름을 부르면서 대화를 나눈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에덴동산에서는 서로가 말이 통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자 그 때부터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말이 소통이 되지 아니하게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더 좋은 예는 뱀과 하와가 대화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3:1-5). 둘째, 사람과 애완동물은 사귐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애완동물은 완전한 반려자가 아닙니다. 결코 사람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가 없듯이 그 차이는 엄연한 것입니다.

 

복합영농의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는 제2장 제20

 

하나님은 애완동물로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담이 그들을 동무로 여기고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이름이 그들 종족의 이름이 되었습니다(2:19). ‘라고 부르게 되면 의 종족이 되고, ‘고양이라고 부르면 훗날 고양이종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동물 이름 짓기 놀이는 애완동물의 정도에서 끝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에게 종족의 이름을 붙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2:20).

모든 동물에게 종족의 이름을 지어주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뜻은 많은 동물을 가축으로 삼아서 축산업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의 첫 번째 직업은 땅을 경작하는 농사꾼입니다(2:5, 15). 그런데 아담은 목축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합영농이 에덴동산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훗날 아담부부가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는 직업적으로 보자면, 세상에 나가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3:23). 그래서 그런지 그의 후손 가운데서 맏아들 카인은 농사꾼이고 둘째인 아벨은 양을 치는 목축업자가 되고 있습니다(4:2).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