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7강(창1:20-2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9월 3일(화)
동물에 대한 창조와 인간에 대한 창조의 차이점(창1:20-26)
하나님께서는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동물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동물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주요한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동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그저 디자인을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를 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창1:26). 그래서 그런지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유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형상을 물려받고 있으므로 한 마디로, ‘영적인 어르신’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겉으로 보면, 동물과 인간은 똑 같은 ‘육신’(肉身, 육으로 만들어진 몸)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양이 다릅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디자인이 되어 있어야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순절 날 하나님의 영이 강림을 하여 약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재하고 있습니다(행2:1-4). 그 때부터 보혜사 성령님은 평생 동안 성도를 떠나지 아니하고 내주하여 진리의 영으로서 역사하십니다(요14:16-17). 그렇지만 동물들은 영을 오래 내주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잠시 사탄의 화신으로 나타나거나 귀신의 숙주가 될 수는 있지만 곧 분리가 됩니다(창3:1, 막5:13).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이 이 세상에 현신을 하신다고 하면, 그 모습은 영락없이 사람의 모양일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고 있다고 모세가 기록하고 있습니다(창18:1).
그런데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육체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게 되자 생령(living soul)이 탄생하고 있습니다(창2:7). 혼(魂, soul)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영적으로 육체인 사람에게 임하자 발생한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평생 사용하고 나면 훗날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회수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지혜의 대왕인 솔로몬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18-21).
둘째로, 동물들의 디자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사이에 오랜 토론과정을 통하여 합의를 도출하여 동물들을 창조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창1:20-25). 그렇지만 인간의 창조 때에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모두 반영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니고 있는 독생자와 성령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합의를 도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만은 적어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특이하게 합의과정을 통하여 걸작을 만드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식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창조를 끝으로 하여 더 이상의 창조를 하지 아니하고 일곱째 날은 온전히 하나님이 자식과 같은 사람과 안식하는 일정으로 잡고 있습니다(창2:2). 여기서의 안식의 의미는 사람을 가족으로 여기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경영의 방법을 전수한다는 뜻입니다(창2:3). 한 마디로, 청지기의 교육을 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냥 먹고 쉰다는 개념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창2:15-17).
동물의 창조의 시작과 끝(창1:20-25, 2:19-20)
흔히 동물의 종류를 알기 쉽게 육, 해, 공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땅의 것, 바다의 것, 그리고 하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창조가 된 동물은 해군입니다. 하나님이 바다의 물고기를 먼저 창조하고 그 다음 같은 다섯째 날에 하늘을 나는 새를 창조하고 있습니다(창1:20). 해군과 공군 모두 종류대로 다양하게 디자인하고 있습니다(창1:21a). 물 위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다양한 동물들을 바라보고 하늘을 힘차게 날고 있는 여러 새 종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1b)는 평가가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번성의 복을 마음껏 주시고 있습니다(창1:22). 다만, 여기서 하늘을 나는 새들에 대해서는 땅에서 번성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날개를 가진 새라고 하더라도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는 터전은 여전히 하늘이 아니고 땅 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모세의 표현은 세밀한 것입니다.
마지막 날 여섯째 날에 드디어 육군의 창조에 나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24). 하나님이 땅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땅이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육신의 소재인 흙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은 동물들의 모집단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각 종류별로 디자인을 다양하게 했습니다. 땅에 기는 것, 달리는 것, 그리고 사람의 주위를 맴도는 것 등 모양이 다르고 습성이 다른 것들이 지상을 채우고 있으니 창조주의 마음이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시 생명체를 사랑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죽어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십니다(막12:27). 그러한 표현이 역시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5).
하나님은 육군에 해당하는 땅 위의 동물들을 창조하시고서는 번성의 축복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같은 날 그 뒤를 이어서 바로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바라보게 되면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상투적인 번성의 축복만이 아니라 특별하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창1:27-28). 사람이 하늘을 날고 물 위를 걸어 다닐 수는 없겠지만 땅 위를 걷고 달릴 수는 있습니다. 육군은 가장 사람 가까이에서 살고 있으며 사람들의 정복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숫자는 인류의 번성의 정도에 따라서 조절이 되는 종속변수입니다. 그 결과 육군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번성의 복을 주지 아니하고 그 지배자인 사람들이 알아서 하도록 위임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섯째 날에 창조된 육군과 인류 가운데 하나님 앞에 의미를 가지는 동물들과 인생들이 창세기 제2장 에덴동산에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창조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과 어떤 동물들이 에덴동산으로 옮겨져서 살게 되는 것일까요? 그들은 왜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일곱째 날 이른 바 ‘안식’의 의미와 깊숙하게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창2:2). 하나님은 안식을 취하시면서 그 날 자체를 복되고 거룩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창2:3). 그 하나님의 안식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함께 지내시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창2:7-8, 19).
수 많은 인류를 이미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창1:26-28). 그러나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데리고 와서 함께 안식을 누릴만한 존재는 쉽게 발견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의 뜻을 받들어서 땅을 경작하고 동물들을 사랑으로 관리하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에 복을 나누어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인생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있는 자 ‘아담’을 특별히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온 것으로 보입니다(창2:7-8). 아담만이 하나님의 영이 살아서 숨쉬고 있는 ‘living soul’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아담과 더불어 친구가 되어 함께 살면서 평화를 누릴만한 가축의 종류가 에덴동산으로 들어오게 됩니다(창2:18-20). 그들이 이른 바 ‘애완동물’(pet)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펫’만으로서는 만족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이름을 서로 부르며 친하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그들 애완동물들에게는 역시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필적할 수 있는 신앙인 여자 ‘하와’를 만들어서 아담에게 데리고 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중매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창2:21-25).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최초의 가정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들은 평생 동안 서로를 아끼면서 일부일처제를 유지합니다.
에덴동산 바깥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2-6). 힘과 권력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취하는 무서운 세상입니다. 힘이 없는 자는 결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사회입니다. 힘이 있는 용사들만이 군림을 하는 ‘약육강식’의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고 짐승의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모세의 오경에도 그 이름을 기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짐승처럼 왔다가 짐승처럼 살고 가는 자는 하나님 앞에 그 이름이 없으며 생명책에도 그 이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모조리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담의 이름이 나타나는 BC 4,114년 이전의 인류문화에 대해서는 일부 두개골과 뼈가 발굴이 되고는 있으나 그들의 문화의 흔적은 신기하게도 완전히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의문에 대해서는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 가늠해볼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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