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5강(창1:9-1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9월 2일(월)
‘중력(重力)의 법칙’(the law of gravitation)을 만드신 하나님(창1:9-10)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튼이 소위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불리고 있는 ‘중력의 법칙’(the law of gravitation)을 발표한 것이 1687년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3,000년 전에 모세는 중력의 법칙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창세기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9).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는 천상의 물과 땅을 뒤덮고 있는 천하의 물이 궁창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둘째 날까지 창조된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팽창을 막고 있는 천상의 물에 대해서는 중력의 법칙을 적용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다만, 천하의 물은 땅 중심으로 모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표면을 덮고 있던 물이 땅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물이 줄어들자 땅이 드디어 그 모습을 수면 위에 드러내고 있습니다(창1:9). 뭍이 드러나자 그것을 하나님은 ‘땅’이라 부르시고, 땅과 땅 사이에 고여 있는 물을 ‘바다’라고 부르시고 있습니다(창1:10a). 지구만 보더라도 오대양(五大洋,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극해, 북극해)과 육대주(六大洲,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가 어울려져서 조화로운 풍경을 연출하게 됩니다. 물만 가득 차있는 공간을 보다가 그 가운데 섬이 두둥실 떠 있는 광경을 보게 되니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요1:10b)는 평가가 다시 나타납니다.
식물(植物)의 창조, 생명을 키워낼 수 있도록 황폐한 땅을 풍요롭게(Greenland) 만드시는 하나님(창1:11-12)
하나님은 아름다운 풍경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요1:16). 생명을 살리고 돌보기 위하여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육지를 창조하신 그 날에 당일 모습을 드러낸 황폐한 땅을 녹색의 땅, 풍요의 땅으로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창1:11). 한 마디로, 각종각색의 식물을 생산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땅은 식물을 생산하고 장차 그것을 먹이로 하는 동물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풍요로운 땅의 모습을 대하게 되는 하나님의 마음은 기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자평(自評, 스스로 평가)을 하고 있습니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1:13).
풀과 채소와 과일나무를 땅이 생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실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채소와 과일나무에 대해서는 그 디자인을 다양하게 했습니다.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도록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창2:9).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풀에 대해서는 디자인이 적습니다. 풀은 짐승과 새들에게 먹거리로 주기 위한 것입니다(창1:30). 그러나 채소와 과일은 사람들에게 주기 위한 것입니다(창1:29). 본능적인 생존만을 추구하고 있는 동물들의 경우와, 생존을 넘어서서 생활의 진, 선, 미까지 추구하고 있는 사람과의 차이가 그 먹는 식물의 다양성에서부터 차이가 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림을 그려보더라도 다채로운 채소가 밭에서 자라고 유실수가 각양각색의 과일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풍경이 보기에 좋습니다. 그 사이에 푸른 풀이 초원을 형성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이미 한 폭의 좋은 그림입니다. 풍경화에서는 구태여 풀의 종류까지 상세하게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식물도감을 보게 되면 풀의 종류가 상세하게 분류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종류가 채소나 과일의 종류에 비해서는 그렇게 다양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1:13)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낮 동안에 일을 하고 밤에는 잠을 잡니다. 그러므로 하루 가운데 중요한 시간대는 활동을 할 수 있는 낮 시간입니다. 비록 시간적으로는 자정을 지나서부터 하루가 시작이 되는 것으로 카운팅을 하고 있지만 밤중은 자는 시간으로 그냥 여기고 맙니다. 그렇지만 히브리 인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루의 시작은 해가 지고 나서 저녁이 되고 나면 그 때부터 카운팅이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해가 떠오르고 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게 되면 하루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그와 같은 하루의 시간 가운데 두 시점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저녁시간입니다. 둘째, 아침시간입니다. 그 점을 영어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엿볼 수 있습니다;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the third day”(Genesis1:13, NIV). 일터에서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저녁식사를 가족과 함께 즐깁니다. 하루 낮 시간 동안에 발생했던 일들에 관하여 여러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나서 개선점을 발견합니다. 그 결과 다음 날이면 시행착오를 줄이고 더 나은 인생을 살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저녁시간 식탁자리에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사람들이 도란도란 하루의 일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면 놀라운 일이 발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드릴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의 다음 날 인생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깊은 밤에 성도는 단잠을 자게 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안식(安息, rest, Sabbath)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뜹니다. 놀라운 기적의 현장과 마주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의 능력을 믿고서 성도가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역사를 하시도록 맡겨드렸기 때문에 밤새 그 일을 완성하신 것입니다(요19:30, 눅23:46). 그래서 그 다음 날 아침은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날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저녁시간과 새로운 역사의 현장을 잠 깨어서 보게 되는 아침시간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러한 관념을 담고 있는 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1:13).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지를 못하고 자신이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하겠다고 날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안식의 이치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불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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