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3강(창1:3-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8월 31일(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피조물인 사람들은 아무리 “빛이 있으라!”고 목이 터지라고 외쳐도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세상이(창1:2) 별안간 아름다운 빛으로 밝아지지가 아니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자 캄캄한 세상에 빛이 나타나고 갑자기 밝아졌습니다(창1:3).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창조의 권세가 있는 말씀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그 점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 말씀은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환상 가운데 현신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The Word of the Lord came to Abram in a vision: 창15:1).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그 하나님의 말씀의 정체에 대하여 정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1-4).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 말씀이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생자가 창조주의 신분을 내려놓고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을 하게 된다는 사실까지 사도 요한이 뒤이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요1:14-18). 사도 바울의 설명도 동일합니다(빌2:5-8).
창세기와 요한복음을 함께 묵상해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한 자가 말씀이신 독생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독생자가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다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창조가 눈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계21:1-2). 세상나라에서 구원을 받은 자가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새 세상 창조의 원리가 본문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태초에 창조의 소재가 되고 있는 땅의 입장에서 본문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를 하자 땅은 꼼짝없이 그 명령에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질서가 없으며 서로 만남이 없던 입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재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서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부딪히기를 시작합니다. 불꽃이 튀고 빛이 생성됩니다. 공허하던 텅 빈 공간이 갑자기 빛으로 환해집니다. 어둠이 밀려나고 있습니다(요1:5). 부딪히고 쪼개어지고 다시 부딪히는 역사가 반복됩니다. 일종의 입자들의 연쇄반응입니다. 오늘 날의 핵분열이나 핵융합도 기본원리는 그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겉으로 보면,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피조세계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너무나 정치(精緻)하고 과학적인 것입니다. 방대한 지식과 지혜가 수반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말씀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4a)
명령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실현시키는 하부조직의 작업은 복잡하며 어렵고도 힘이 듭니다. 예를 들면, 대통령의 명령은 간단합니다. 그렇지만 그 지시를 수행해야만 하는 정부부처는 매우 바쁘고 힘이 듭니다. 그와 같은 노작(勞作)을 거치는 작업임을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첫날의 창조작업이 마무리가 되자 매우 흡족해하시면서 창조의 역군들을 칭찬하시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4)입니다. 물론 창조의 결과물을 보시고 ‘좋다’(good!)고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 평가를 듣는 순간 하나님의 종들은 얼마나 기쁨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기쁨을 세례 요한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3:29). 피조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의 신부와 같습니다(사54:5, 62:5). 마찬가지로 교회와 성도는 그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와 같습니다(엡5:22-25, 계21:2, 9).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기쁨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신랑의 들러리가 모두 함께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빛을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어둠과 밤을 만들고 계시는가?(창1:4-5)
성경기록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세상을 사는 방법을 고쳐나가야 되는 자들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먼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그 다음에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서를 저술하여 성도들에게 전해주도록 섭리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빛의 창조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맞도록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가 수혜자인 피조물에게 불편하도록 역사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과 생물들의 생활리듬을 고려하여 빛이 비추는 시간대와 그 빛이 가려지는 시간대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빛이 직선으로 비추이는 시간대가 낮입니다. 야행성 동물이나 식물을 제외하고 모든 동식물들이 낮 동안에 활기차게 신진대사를 하고 활동을 합니다. 빛이 가려지는 밤 시간대에 휴면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생활의 리듬입니다. 피조물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그토록 빛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호를 내려놓고 그 빛의 비추임을 가려주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창조주이십니다. 마치 아기를 달게 잠재우기 위하여 사면을 고요하게 만드시고 숨소리조차 줄여주시는 부모님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낮과 밤의 구분’은 하나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창세기의 기록은 사람들을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기록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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