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41(작성자; 손진길)
선더말 아재의 차남인 손진길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교양과정부에서 공부하고 있는 1971년에는 학원가에서 학생시위가 그리 많이 발생하고 있지 아니하다. 그 이유는 1960년대 중반에 발생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둘러싼 학생들의 강력한 반대와 같은 그러한 굵직한 이슈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껏해야 ‘학생 교련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를 하고 있는 정도이다;
되짚어보면, 1968년에 무장공비들이 서울의 중심부까지 산을 타고서 침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그때부터 예비군을 만들고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받도록 조치한다. 1971년이 되도록 학원가에서는 그것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71년 4월 하순에 치루어진 제7대 대통령선거의 결과가 심상치 아니하다. 두 후보 곧 박정희와 김대중의 표 차이가 95만표도 되지 않는다;
그 선거에서 이기기 위하여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사용한 정치자금이 엄청나다고들 말하고 있다. ‘여당 프리미엄’을 보통 100만표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이 된 것이 아니라 진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시선이 크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추세라고 한다면, 박정희 대통령이 4년후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게 된다. 19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2차례나 강력하게 추진하여 백성들에게 보릿고개가 없는 새로운 풍요의 세상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니 박정희 대통령과 여당측 인사들은 일종의 정치적인 배신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가 1971년 10월에 느닷없는 ‘위수령’으로 나타난다. 1950년 한국전쟁 몇달 전에 만들어진 ‘위수령 제도’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하여 두번째로 사용이 된 것이다;
1965년에 한일수교를 반대하는 야당과 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하여 한번 사용을 하고 1971년에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과 대학생들에게 정부여당의 힘을 보여주기 위하여 취한 대담한 행동으로 보인다.
선더말 아재의 차남인 손진길은 대학 1학년 2학기 수업 중에 그러한 ‘위수령’이라고 하는 사태를 만나자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해 여름에 ‘섬머스쿨’을 다니면서 보충수업을 통하여 학점을 다시 따고자 고생을 했기에 이번 가을학기에는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신경을 쓰고 있는데 난데 없이 박정희 대통령이 ‘위수령’이라고 하는 긴급명령을 내리고 대학의 수업을 중지시킨 것이다.
‘그러면 2학기 수업과 성적은 어떻게 되는가? 시험을 치르지 못하게 되면 전교생이 1년간 그대로 유급이 되고 마는 것인가? 다시 내년에 ‘섬머스쿨’에 다녀야만 하는가?’. 손진길은 그러한 걱정을 하면서 ‘서울공대교회’와 회관에 매일같이 나가고 있다. 그곳에 가야 그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아는 선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참으로 희한한 해결책을 학교당국이 내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란다. 시험 대신에 레포트를 내라고 하는 것이다. 레포트를 교수들이 채점하여 학점을 학생들에게 준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험보다는 훨씬 쉬운 방법이다. 그래서 손진길은 열심히 레포트를 작성하여 일찍 학과사무실에 제출한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는가?’ 마치 겨울방학이 일찍 찾아온 것과 같다. 그 당시 학생들이 서울공대 구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공대교회와 회관에 자주 출입하고 있는 것이 군인들의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다. 위수령이 발동이 되자 군인들이 군용트럭으로 교문을 막고 거총을 한 채 위압적인 시선으로 시민들과 대학생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대교회에서는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두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권한다. 손진길도 하숙집에서 짐을 싸서 경주 고향집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고향에서도 자신이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짐을 꾸려서 대구로 간다. 그 당시 대구 대명동에 부친인 선더말 아재가 큰 집을 한 채 사서 장남인 손진목에게 관리를 시키고 있다.
그 집에는 별도의 2층 건물이 하나 있다. 영남대학교 수학과 3학년인 손진목은 학교공부보다 사업에 신경을 더 쓰고 있다. 그의 자그마한 사업체가 그 건물 2층에 있다. 그것이 그 동네 꼬마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만화방’이다. 그 대명동 집의 위치가 대구 ‘남도국민학교’ 골목이다. 그러므로 벌이가 되는 셈이다. 손진목은 그 돈벌이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지난 1971년 1월에 동생인 손진길이 대학입시를 치기 위하여 상경할 때에 형인 손진목도 동행했다. 그리고 손진길이 시험을 치루고 있는 이틀동안 응원을 했다. 그렇게 관심을 보이던 손진목이 이제는 다른 사람처럼 완전히 달라져 있다. 동생이 찾아왔는데도 별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 대신에 만화방을 운영하면서 돈벌이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손진길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그는 총명하게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형 손진목이 자신이 4년전에 도전했다가 떨어진 서울대학교에 동생이 진학하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그것은 일종의 ‘대리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동생이 서울대학생이 되고 그 입학식을 보겠다고 부친이 상경을 하고 나니 손진목은 자신이 처한 처지가 한심하게 보인다. ‘그래도 명색이 장남인 나는 무엇인가?’. 모친 고복수는 입만 떨어지면 남편인 선더말 아재가 없는 자리에서 장남 손진목에게 말한다; “부친이 집을 비우게 되면 장남인 진목이 네가 이집에서는 가장이다. 그러니 언제나 우월한 입장에서 동생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자신의 장남의 권위를 되찾자면 어찌해야 하는가?’ 손진목의 결론은 하나인 것이다; “동생 위에 나를 군림하게 하자면 돈이 필요하다. 공부로써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돈이라도 벌어서, 아니면 아버지의 돈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라도, 나는 이집에서 가장의 권위를 가질 것이다. 동생들은 영원히 맏이인 나에게 복종을 해야만 한다”.
그러한 삐뚤어진 의식이 그의 얼굴에서 표가 나고 있다. 손진길은 형인 손진목이 그러한 잘못된 생각에 젖어서 이제는 동생인 자신을 꺼려하고 있는 그 태도를 눈 여겨 보고 있다. 그 와중에 그 대명동 집에는 이제 국민학교 5학년에 불과한 선더말 아재의 4남 손진웅이 대구로 전학을 와서 ‘남도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다;
손진웅은 어릴 때부터 인정이 많고 형제 의리가 좋은 동생이다. 그런데 1년동안 대구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큰형 손진목과 함께 생활을 해보니 형의 태도가 영 이상한 것이다. 자신을 무시하면서 자신위에서 마치 부친처럼 군림을 하려고 하는 큰형 손진목이다. 그는 마치 독재자와 같다.
그래서 그런지 손진웅은 둘째 형인 손진길이 대구 대명동 집에 오자 그를 따라다닌다. 둘째형은 전혀 다른 타입이라서 그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기본적으로 동생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주고 어려운 점을 보살펴주려고 하는 마음자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손진웅은 용돈을 털어서 맛있는 것을 사서 자꾸만 둘째형에게 권한다. 그러면서 때로는 큰형의 횡포에 대하여 억울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손진길의 마음이 아프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는가?“. 그래서 방학이 끝나고 상경하기 전에 고향을 방문하여 부친 선더말 아재에게 한마디 의견을 제시한다; “아버지, 웅이가 어린 나이에 그곳 타향에서 학교 다니기가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선더말 아재가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조용히 4남인 손진웅을 다시 ‘경주 황남국민학교’로 전학을 시킨다. 그 결과 다음해에 손진웅은 소위 ‘뺑뺑이’를 돌린 결과 ‘경주 문화중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것이다;
손진웅은 작은 형 손진길이 눈물로 다닌 그 학교에서 공부하고 기독교인이 된다.
1971년 겨울방학을 대구에서 지내게 된 손진길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모교인 ‘계성고등학교’를 방문한다. 다른 친구들은 여름방학기간 중에 진작 모교를 방문했지만 손진길은 6개월이나 늦다. 그 이유는 물론 그가 혼자서 여름방학 때 서울대 교양과정부의 ‘섬머스쿨’을 다녔기 때문이다.
본관으로 올라가는 ‘50계단’이 여전하다. 그 계단을 올라서 교무실을 찾아간다. 1학년 때의 담임인 황재호 선생, 2학년 때의 담임인 김종성 선생, 3학년 때의 담임인 신석환 선생 등의 모습이 교무실에서 보이지가 않는다. 모두들 방학 중이라 학교에 나오지 아니한 모양이다. 그 대신에 3학년 때 화학을 담당하던 선생님이 손진길을 반갑게 맞이한다.
손진길도 자신을 알고 있는 은사이기에 정중하게 인사한다. 그때 화학선생님이 손진길에게 묻는다; “자네는 서울공대가 방학이라서 대구에 왔구만. 그러면 시간이 있겠네. 어떻게 내가 소개하는 학생에게 두 달간 한번 과외를 해볼 생각이 있는가?”. 의외의 물음이라서 손진길이 약간 머뭇거리면서 대답한다; “선생님, 제가 영어와 수학정도라면 고등학생을 가르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선생님이 더 잘 하시잖아요?...”.
그 말을 듣자 그 화학선생님이 웃으면서 말씀한다; “허허, 나야 과외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학부형들이 많아서 걱정이지. 그들의 부탁을 모두 들어줄 수가 없는 형편이야. 그런데 그 학생의 부친의 간절한 요청을 내가 시간이 겹쳐서 도저히 들어주지 못하고 있네. 그래서 내가 미안해하고 있는데 마침 자네가 온 거야. 그러니 나를 대신해서 그 학생의 과외를 해주면 좋겠네. 그리고 보수는 내게 주겠다고 한 그 액수를 자네에게 주도록 내가 말해 놓겠네…”.
손진길이 그러한 설명을 듣자 순순히 답변한다; “네, 선생님, 그러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화학선생이 만족해 하면서 곧바로 전화를 건다. 그 다음에 손진길에게 말한다; “시내 동성로에 있는 다실로 11시까지 나가면 되네. 자네가 입고 온 그 서울대 교복을 그 학생의 부친이 보고서 과외선생인 줄 알게야. 그 다실의 지도는 내가 상세하게 그려주겠네”.
마치 스파이가 접선을 하는 것 같지만 그날 그렇게 하여 손진길은 한 고등학생의 부친을 만나게 된다. 그 부친은 대구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집에 따라가서 보니까 삼덕동에 있는 그 집이 상당한 부자이다. 손진길은 까까머리의 학생에게 그날부터 수학과 영어 2과목을 2달간 가르친다.
그 학생은 생각이 깊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서 잠시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면 언제나 자신은 ‘철학과’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속이 깊은 학생이기에 손진길이 성심성의껏 2달간 영어와 수학을 가르친다. 자세하게 설명을 하면서 가르치니 꽤 잘 이해를 한다. 손진길은 학생을 잘 가르치는 자신의 능력을 보고서 스스로 놀란다; “내가 이렇게 학생을 잘 가르치는 재주가 있구나!...”.
그럴 것이다. 기본적으로 손진길은 학문의 이치를 뿌리까지 파헤쳐서 깨닫기를 좋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속이 시원하게 나름대로 이해가 될 때에 비로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체계화를 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한 손진길이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 학생도 크게 만족을 하는 것이다.
그 학생의 모친이 가끔 손수 간식을 가지고 공부하는 방에 들어온다. 그러면서 아들이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아들이 기분이 좋게 고개를 끄떡이는 모습을 보고서 그렇게 좋아한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인 모양이다. 그리고 한달이 지나자 두툼한 돈봉투를 손진길에게 준다. 집에 와서 그 액수를 살펴보니 상당히 많은 돈이다. 당시 하숙비가 1만원이 채 안되는데 그보다 몇 곱절의 금액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달간 과외를 하고 마지막 날이 되자 그 학생의 부친이 아들과 손진길을 데리고 동성로의 식당으로 간다. 그런데 그 식당의 요리가 특이하다. 끓는 물에 마치 ‘샤브샤브’ 처럼 고기를 잠시 담근 다음에 소스에 찍어서 먹는데 그 고기 맛이 독특하다.
의아해하는 손진길을 보고서 그 부친이 자랑스럽게 말한다; “과외선생이 그동안 수고하였기에 내가 인상에 남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서 이 식당으로 왔어요. 최근에 대구에 들어온 ‘징기스칸’ 요리입니다. 양고기 말린 것을 끓는 물에 적셔서 먹는 것이지요”;
역시 그 학생의 부친은 유능한 사업가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가 대접한 음식의 이름을 손진길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그러하다. 그렇게 평생 자신을 기억하도록 대접을 한다면 그의 사업은 크게 애로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1970년대 후반에 대구에서도 아파트를 짓는 지방건설회사가 몇 개 등장한다. 아마 그 가운데 하나의 건설회사가 그 사람의 것일 것이다.
대구에서 2달간 과외를 끝낸 손진길이 고향 경주에 가서 부모님을 뵌 다음에 상경을 하고자 한다. 이제는 서울공대 2학년이 되어 등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구를 떠나기 전에 동생 손진웅을 본다. 어린 나이에 안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심 생각을 한다; “큰 형 보다는 아버지 슬하에 있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인데…”.
‘어떻게 하면 형 손진목의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릴 수가 있을까? 동생에 대한 애정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 나름대로 고심을 하던 손진길이 자신이 번 돈에서 일부를 빼어 그대로 형에게 준다;
그 돈을 받자 손진목의 인상이 갑자기 활짝 펴진다. 그는 너무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조금이라도 동생 손진길에게 잘해주고자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손진길의 마음이 씁쓸하다. 그래서 며칠 후 상경을 하면서도 고속버스 안에서 그 모습을 다시 회상한다. 그러면서 조용히 중얼거린다; “형은 돈보다 형제가 더 좋은 것을 잊어버리고 있구나. 돈으로 물건은 살 수가 있지만 형제는 살 수가 없는데 그것을 모르다니 딱한 사람이 되었구나. 자신이 조금만 손해를 보면 동생들이 그를 형으로 잘 대접해줄 것인데…”.
그날 오후 3시경에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손진길은 큰 가방을 끌고서 그 인근에 있는 다방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한시간 정도 자리에 앉아 깊은 생각을 한다; “이제 다시 서울에 왔으니 한학기를 지내야만 한다. 아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이 서울의 하늘 아래에서 나는 홀로 공부하고 앞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적막강산에 홀로 서있는 손진길이다. 그렇지만 오래 다방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다. 다시 일어나서 공릉동 하숙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하숙집 친구라도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또 한 학기를 보내고자 한다. 공릉동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여전히 붐빈다. 그렇지만 그는 악착같이 그 큰 가방을 가지고 그 버스를 탄다. 그렇게 1972년 봄학기가 시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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