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40(작성자; 손진길)
한국의 1970년대는 60년대에 시작이 된 2차례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열매를 얻고 있다. 그것은 일본에서 1955년부터 시작이 된 ‘정부 주도형 고도경제성장정책’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제3공화국은 해외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하여 차관을 들여와서 대도시주변에 대규모 공단을 조성하는 한편 농촌의 유휴인력을 활용하여 1972년말부터는 시골에 가까운 소도시에도 ‘새마을공장’을 많이 지어 나간다;
그에 따라 농촌인력이 도시주변에 있는 공업단지에 취업하여 계속 빠져나간다. 이른바 ‘이촌향도’ 현상이 크게 발생하고 있다. 농촌의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를 하고 도시의 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것이다. 동시에 공단에 취업을 한 자녀들이 고향으로 송금을 해오자 ‘새마을운동’이 발생한다. 먼저 농촌의 가옥을 개수하고 마을도로를 정비한다.
그리고 농한기에 술과 도박을 즐기던 풍습을 폐습으로 규정하여 정리하기를 시작한다. 정부에서는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을 확산시켜 새마음으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구호를 내걸고 ‘홀치기’와 같은 농가부업을 크게 장려해 나간다.
그러한 변화에 따라 시골에서 올라와 도시의 부자집에서 부엌일을 맡아서 하던 처녀들이 공단의 근로자가 되거나 버스의 차장이 된다. 그들의 일손이 필요한 공장과 사업체가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더말 아재 손수석의 집에서 부엌일을 거들고 있던 분자도 1970년대가 되자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그녀 역시 공단에 취업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당시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에는 국제적으로 정부주도형 경제개발 장기계획을 강력하게 밀어 부친 국가들이 별로 없다. 그 반면에 서양에서는 경제적인 호경기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이 1955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계속이 되고 늦게 시작이 된 한국의 제3공화국의 경제성장정책도 대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동안에 2차례 ‘오일쇼크’가 있지만 그것조차 극복을 하고 있는 놀라운 시대이다. 따라서 1945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1968년에 세계 제2의 국민소득(GNP)를 달성한 일본의 경제를 ‘동양의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동시에 1950년대말까지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한국을 단 2차례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단숨에 중진국으로 만든 한국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한 기적이 발생하는 와중에 경주에서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구식으로 운영이 되고 있던 기존의 ‘생선도가’를 ‘도매시장법’에 따른 현대적인 ‘경주수산도매시장’으로 발전시킨다. 동시에 수산물 경매장 옆에 대규모의 ‘제빙냉동공장’을 완공하여 안정적인 ‘수산시장주식회사’를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든다.
자신이 가진 재산의 거의 절반을 투자하여 그러한 사업체를 만들자 좋은 수익을 얻게 된다. 그 이유는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소득이 높아진 경주와 월성지역의 주민들이 생선을 많이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70년대가 시작되자 선더말 아재는 그가 얻은 잉여자본을 가지고 새로운 투자처를 찾고 있다.
때마침 1972년말 무렵에 선더말 아재의 회사로 젊은 김사장과 배사장이 차례로 찾아온다. 김사장은 경주시내의 변방에 큰 ‘통조림공장’을 건설하여 양송이 통조림을 제조하여 외국으로 수출하고자 계획하고 있다. 김사장보다 더 젊은 배사장은 안강에 살고 있는데 그는 가업으로 물려받은 철공소를 기반으로 하여 아예 ‘철물판매업’에 뛰어들고자 계획하고 있다.
선더말 아재가 그들이 가지고 온 ‘사업계획서’를 상세하게 검토하기 시작한다. 과연 현실적인 타당성이 있는 사업계획인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새마을공장의 일환으로 김사장이 ‘양송이 가공공장’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원료인 양송이의 구입과 통조림을 팔 수 있는 해외의 판로가 관건이다. 그런데 때마침 새마을운동과 농촌소득증대사업에 따라 양송이 재배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동시에 캐나다에서 한국의 질이 좋은 양송이 통조림을 구입하고자 상담이 들어오고 있다. 그러므로 그 사업에 투자를 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선더말 아재가 필요한 자금을 김사장에게 빌려준다. 그 결과 양송이를 가공하여 통조림으로 수출하는 그 사업체가 잘 굴러간다;
그런데 나중에 문제에 봉착한다. 그 이유는 김사장이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다. 계속 수출이 독점적으로 잘되는 줄 알고서 도중에 공장을 크게 확장한 것이다. 그것이 패착이다. 선진국은 국제적으로 생산단가가 더 낮은 나라의 제품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한국이 아니라 필리핀을 위시한 동남아국가에서 버섯을 가공하여 선진국에 수출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캐나다가 수입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화가 발생할 것임을 사전에 선더말 아재가 김사장에게 충고했지만 그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선더말 아재는 기왕에 투자한 자금을 김사장에게서 회수를 하느라고 좀 골치가 아프다. 반면에 안강의 젊은 배사장은 그러한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그는 꼭 필요한 돈만 선더말 아재에게서 빌려 간다. 그리고 그가 철물을 파는 곳은 안강과 그 주변의 농촌지역이다. 그 수요를 보아가면서 적절하게 공장에서의 생산량을 조절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진작에 선더말 아재의 돈을 모두 갚게 된다. 그는 참으로 현명한 젊은 사장이다.
한편 선더말 아재의 차남인 손진길은 1971년 가을에 서울공대 기독학생회관에서 바쁘다. 그곳에 ‘서울대 교양과정부 기독학생회’가 함께 들어 있다. 봄에 ‘교양과정부 기독학생회’ 조직을 만들 때에 국문학과에 들어온 ‘박인국’이 스스로 회장으로 일해보겠다고 자청을 했다. 그 용기가 가상하여 그를 회장으로 뽑았더니 일을 열심히 한다.
손진길은 고교 동창이며 하숙방을 같이 쓰고 있는 ‘정인조’와 함께 ‘교양과정부 기독학생회’ 일에 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 회관에 기존 ‘공대기독학생회’가 함께 있으므로 그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특히 고교 2년 선배인 ‘김석준’이1971년 전반기에 공대기독학생회의 회장이 되어 있다. 그는 경북 의성 출신인데 공대 토목과 3학년이다.
‘김석준’은 교내의 ‘공대학생회’ 일에도 부회장으로 관여를 하고 있다. 그만큼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기독학생회장으로 일하는 동안에 연구반을 여러 개 만든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것이 ‘사회문제연구반’이다.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서 노동현장의 문제가 대표적인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는 실태조사를 위하여 방학 중에 산업현장에 들어가보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러한 취지를 실천한 연구반원이 있다. 그 가운데 손진길의 공대 한 학년 선배인 ‘김수운’이 있고 또 공대의 같은 학년이며 부산출신인 ‘최준영’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방학이 끝나자 그 연구반의 주도세력이 된다.
반면에 손진길은 여름방학 때에 ‘섬머스쿨’에서 학점을 따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손진길은 가을학기가 되자 그들이 발표하는 현장사정을 듣는 데에 그치고 만다. 그 대신에 손진길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연구회는 ‘문학연구반’이다. 그 연구반의 회장이 공대 한해 선배인 ‘김규환’이다;
그는 아예 작더라도 ‘문예지’를 하나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작문들을 하여 실제로 ‘문예지’를 만든다. 손진길은 회장인 ‘김규환’과 함께 문학작품을 쓰고 그것을 끌판에 긁어서 ‘문예지’로 제작하느라고 바쁘다. 그리고 공대교회의 주일예배를 준비하는 데에도 참여한다. 그가 맡은 일은 주보를 철필과 끌판 그리고 등사기를 이용하여 발행하는 것이다;
당시 ‘오대원’ 선교사가 매주일 설교를 하는데 그의 설교가 참으로 이성적이다. 그 설교가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적인 공대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러다가 그는 한국에 선교사로 온지 10년이 되었다고 하면서 1971년 가을에 1년간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들어간다. 그의 고향이 본래 ‘노스 캐롤라이나’ 주이니까 그곳으로 간 것으로 짐작을 하고 있다.
오대원 선교사는 그가 떠나기 1년 전에 벌써 감리교 젊은 목사인 ‘김원호 목사’를 영입했다. 그리고 1년간 김원호 목사에게 전적으로 지도목사 일을 맡도록 조치했다. 그러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 김덕영 권사의 양아들인 ‘휘경교회’의 ‘김화용’ 장로 부부이다. 김목사는 학생들보다는 연상이지만 그렇게 많은 나이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호흡이 잘 맞는다;
다음해 1972년 가을에 한국에 되돌아온 오대원 선교사 부부는 설교와 사역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그들 부부는 미국에서 배워왔다고 하는 ‘성령운동’을 갑자기 시작한 것이다. 지리적으로 ‘서울공대교회’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덕영하우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곳에 ‘오대원’ 선교사 가족이 살고 있다.
그 집은 공대교회보다 몇 년 먼저 세워진 건물이다. 이북에서 서울에 온 ‘김덕영 권사님’은 한국전쟁이 끝나자 휘경동에서 ‘독립문표 메리야스’ 공장을 창업했다. 여자로서 기독실업인이 된 김덕영 권사는 평생의 사업이 교회를 많이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사업으로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의 구내에 교회를 하나 세우고자 한다.
그녀의 기도의 응답으로 기적적으로 ‘서울공대교회’가 세워지는데 그 일을 위하여 김덕영 권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독립문표 메리야스의 지분을 모두 처분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공릉동에 자신이 살집을 하나 짓고 계속 모금하여 공대교회를 세운 것이다. 참고로, 김덕영 권사님의 일대기를 적은 작은 자서전의 이름이 다음과 같은 ‘한 알의 겨자씨’이다;
1971년에 손진길이 공대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을 때에는 벌써 김덕영 권사님은 소천하신 다음이다. 따라서 일명 ‘글로바 하우스’라고 불리기도 하는 ‘덕영하우스’에는 오대원 선교사 가족이 살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얼 로스’ 선교사 곧 ‘오대원’ 목사가 미국에서 돌아와 1972년 가을에 ‘덕영하우스’에서 ‘성령운동’을 시작했지만 그 모임에 참석한 ‘공대기독학생회’ 간부들의 반응이 별로이다. 그들은 보수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런데 오대원 선교사가 하고자 하는 운동은 초이성적이고 매우 진취적인 예배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손을 들고서 찬양하며 소리를 내어 통성으로 기도하고 미국의 복음송을 번역하여 찬송가 대신에 부르는 것 등이다. 그것은 매우 생소한 것이며 엄숙한 한국의 전통적인 예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모두들 시큰둥한 반응을 2달간 보이자 그것에 화가 났는지 오대원 선교사 부부가 ‘공대기독학생회 지도목사’ 자리를 내어 놓고 그만 ‘연희동 외국인학교 사택’으로 이사하고 만다;
처음부터 오대원 선교사의 ‘덕영하우스 찬양모임’에 참석했던 손진길은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생소하고 이질적인 성령운동은 한국에서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이사를 가시지만 오대원 선교사 부부의 시도는 참으로 성공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그러나 이번에는 손진길의 생각이 틀렸다. 한 두 달쯤 지났을 때에 연희동 모임에 참여하고 돌아온 친구가 하는 말이 너무나 상상밖이다.
그 모임에 참석하고자 하는 인근의 대학생들로 그 성령운동모임 곧 ‘화요 기도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진짜인가? 손진길이 의아하여 직접 현장을 방문해본다. 정말이다. 연희동 일대의 남녀 대학생들의 정서와 오대원 선교사의 성령운동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서울공대에서는 실패한 그것이 그곳에서는 대성공이다;
그래서 손진길도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오대원 선교사 부부가 개최하는 ‘화요 기도회’에 참석한다. 그때 그 모임에서 열심을 보인 인물들이 손진길과 같은 학년인 서울사대 학생이며 동시에 ‘서울대 총 기독학생회’의 회장을 지낸 ‘김남수’이다. 그는 나중에 총신대학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된다.
그리고 외국어대학교 출신이면서 그 모임에서 살다시피한 ‘임종표’가 있다. 그는 광나루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그 모임에 참석한 외대 후배 여학생 ‘홍화옥’과 1977년 12월에 결혼한 후 부부가 함께 아프리카의 케냐 선교사로 떠난다. 또한 1972년에 서울대 종교학과에 입학한 부산 출신 ‘이승태’가 그 모임에 꾸준히 참석한다. 목사가 된 그는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목회활동을 열심히 하게 된다.
오대원 선교사는 그 ‘화요모임’의 대학생들을 이끌고 강원도에 있는 ‘대천덕’ 성공회 신부의 ‘예수원’에서 수련회를 하고 돌아온다. 그 다음에 오대원 목사는 성령충만한 젊은이들과 함께 서울시내에 나가서 찬양을 하며 길거리 전도를 한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예수전도단’이 탄생한다;
1972년 늦가을에 ‘세계청년선교단’(유스 위드 어 미션)인 ‘YWAM’이 한국에 상륙한다. 그들은 한국에 그들의 지부를 만들려고 하다가 그 대신에 오대원 선교사가 인도하는 ‘예수전도단’을 자신들의 지부로 인정한다. 그에 따라 오대원 선교사는 하와이에 본부를 둔 ‘와이웸’의 중요인사가 된다. 참고로 그는 먼 훗날 2007년에 서울대학 관악캠퍼스에 초청이 되어 회개운동을 인도하는데 그때의 포스타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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