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손진길 소설)

선더말 아재39(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10. 16:49

선더말 아재39(작성자; 손진길)

 

1971년 봄에 선더말 아재 손수석의 차남인 손진길은 동숭동 서울대학교 문리대 운동장에서 거행하는 입학식에 참석한다. 그는 서울공대 앞에 있는 공릉동 하숙집을 아침 일찍 나와서 시내버스를 타고 종로로 들어온다. 종로에 내려서는 도보로 ‘이화예식장’을 지나 서울 문리대 정문까지 간다;

당시 동숭동에는 서울법대와 문리대가 있고 그 앞에 서울의대 캠퍼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좀 떨어져서 서울상대가 있다. 따라서 편리하게 ‘서울대학본부’가 문리대 구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정원에 ‘마로니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래서 그 나무가 마치 서울대학교의 상징처럼 불리고 있다.

그 문리대 운동장에서 그날 거행하는 입학식에 참석하는 서울대학교 신입생들은 전부 ‘서울대 교복’을 입고 있다. 특이하게도 교복 자켓에는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하게 쟈크가 디자인이 되어 있다. 그리고 자켓의 어깨아래 팔 부분에는 ‘국립 서울대학교’를 상징하는 ‘기억과 시옷과 디귿’이라는 철자를 위에서 아래로 합성한 마크가 새겨져 있다;

훗날 그 디자인이 관악산으로 이전하는 서울대학교의 교문의 모습으로 다음과 같이 채택이 되기도 한다;

신입생들은 교모인 베레모를 머리에 쓰고 있는데 그 전면에 학교마크를 붙이고 있다. 그리고 별도로 ‘서울대 뱃지’를 사용하는데 거기에는 서울대 마크 아래에 라틴어가 들어 있다;

그것을 읽어보면, ‘베리타스 룩스 메아’라고 적혀 있는데 그 뜻이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것이다. 서울대의 상아탑에서 신입생들은 4년 동안 ‘진리가 자신들의 인생의 빛’이 될 수 있도록 한번 추구해보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교복을 갖추어 입고서 그날 동숭동 입학식장에 참석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길을 걸으면서 손진길은 생각해본다; “지난 3년간 죽기 살기로 공부하여 서울대학생이 되었다. 그 보상이 이 복장이며 한번 뿐인 입학식이다...”. 그래서 그는 문리대 운동장에 집합하여 입학식 행사를 하는데 괜히 헛웃음이 나온다. 한마디로 자신이 보기에 그것이 허무하고 별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성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나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있는 지금이나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이러한 입학식에 참석하고 싶어서 지난 3년 동안 하루 4시간 남짓 밖에 자지 아니하면서 그토록 책 속에 파묻혀서 지냈던가? 옆에 서있는 서울대학교 신입생들을 보니 자신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손진길은 서울대학교라고 하면 그 위세가 대단하고 그 학생들은 특별한 것으로 지레 짐작을 했는데 막상 자신이 그 자리에 서 보니 실로 별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크게 실망한다. 그때부터 전혀 상상조차 해보지 아니한 정신적인 방황과 학업적인 위기가 그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날 선더말 아재는 경주에 살고 있는 일가 ‘손인갑’과 더불어 일부러 상경한다.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서울대학교 입학식이 어떤 것인지 한번 보고싶은 것이다. 장남이 4년전에 들어가고 싶어했지만 못 들어간 서울대학교이다. 이제는 차남이 그 대학교의 입학생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정상의 자리에 굳건하게 서있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입학식 자리이니 자신이 직접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둘째는, 그 이튿날 공교롭게도 정릉 골짜기에서 ‘전국 손씨 화수회’가 개최가 되기 때문이다. 차남 손진길의 입학식이 토요일이고 그 대규모 화수회 모임이 일요일이다;

그러므로 선더말 아재는 차남 손진길을 데리고 그 모임에 참석을 하고 싶은 것이다. 경주 문중의 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는 자신보다 몇 살이 많은 손인갑과 함께 상경을 한 이유가 그것이다.

선더말 아재는 이제부터 서울에서 살게 되는 차남 손진길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 옛날 일제시대에 손수석 자신은 15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고학을 하면서 야간직업학교를 다니고 수료를 한 다음에는 취직을 하여 일본 북해도에서 큰돈을 벌었다.

그가 젊은 시절 동경과 북해도에서 생활을 하였기에 일본 열도와 한반도 그리고 아시아를 보는 눈이 그때 열린 것만 같다. 당시의 일본제국이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산업선진국이다. 따라서 일본제국의 수도인 동경에서 생활을 해보아야 그 모든 아시아 지역의 형편에 대하여 넓은 지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서울로 진출한 차남 손진길이 젊은 시절의 선더말 아재처럼 더 넓은 세상을 보아야만 한다. 적어도 자신의 뿌리가 되고 있는 신라 손씨들이 한국 전역에 흩어져서 살고 있으며 그 수가 수십만명에 이르고 있다고 하는 사실부터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전체를 생각하면서 그 수도인 서울에서 자신의 앞날을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애비가 된 선더말 아재의 마음이다;

그래서 입학식 다음날 차남을 데리고 정릉으로 간다. 그 산자락에서 ‘손인갑’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 위로 한참을 올라간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미 산 아래의 주차장에서 30대에 가까운 버스가 즐비하게 서있는 것을 보고 또한 그 버스 앞에 써서 붙인 종이에서 여러 지방의 지명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정릉으로 올라가는 ‘안내판’도 보았다;

산 정상에서는 그 버스에서 내려 산등성이를 메우고 있는 엄청난 수의 인파를 본 것이다. 그들 모두가 신라 손씨들이다. 2천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신라 손씨들이 전국에 흩어져서 부락을 이루면서 살고 있다. 그들이 이번에 전국규모의 화수회를 개최하면서 그 대표자 천 명 정도가 일시에 서울의  정릉 골짜기에 모인 것이다.

영남에서는 먼저 신라 손씨의 본향인 경주와 월성에서 많은 일가들이 상경했다. 그리고 밀양과 포항에서도 많이 왔다. 호남에서는 전주와 구례 등지에서 대거 참석을 했다. 그리고 서울 경기 충청도에서도 문중의 대표자들이 골고루 참석했다. 그날 손진길은 경주와 월성 손씨에서 파생이 되어 나간 일가들이 그렇게 전국적으로 많이 흩어져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러한 사실을 똑똑하게 기억하라고 부친 선더말 아재가 자신을 그곳에 데리고 간 것으로 그는 깨달은 것이다. 그 뜻을 알 것만 같다. 직접 말씀은 아니하지만 이제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 진출했으니 앞으로는 경주와 월성 그리고 대구라고 하는 영남지역에 갇힌 사고에서 벗어나 전국을 보고서 크고도 넓은 생각을 하라는 것이다.

그 뜻을 차남 손진길이 고맙게 생각하면서 가슴에 새기고자 한다. 그리고 이제는 서울대학교 합격이라는 좁고도 한시적인 자신의 인생목표를 수정해야만 할 때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러한 생각이 드는데 문제는 현실에 쉽게 안주해버린 그의 마음이 따라주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서울공대를 졸업하면 좋은 직장을 선택할 수 있고 그후에는 쉽게 중상층으로 살 수가 있다고 하는 그러한 안이한 사고방식이 먼저 찾아오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진길이 공릉동에서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를 1년 동안 다니고 있는 동안에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별것이 아니라고 오만하게도 무시했던 서울대학교 신입생들로부터 받은 충격이다. 그들이 실제로는 별 것이 아닌 것이 아니라 진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거의가 학점을 땄는데 손진길은 1학년 1학기를 지내고 성적표를 받아보니 창피하게도 과락과목이 둘이나 있는 것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교무실에 알아보니, 여름방학에 실시가 되는 ‘섬머스쿨’에서 보충수업을 받고 과락인 2과목의 학점을 다시 따야만 한다는 설명이다. 친구들은 여름방학을 맞이했다고 모두들 좋아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손진길 혼자만 덩그러니 하숙집에 남게 된다. 보충수업에 드는 학비가 문제가 아니라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든다; “내가 무시한 그것이 이제는 내 발등을 찍고 있구나!...”;

어쩔 수가 없지 않는가? 이제는 서울대학교에 들어왔으니 자신은 인생의 목표를 모두 이루었다고 자만한 결과가 그러하니 말이다. 자승자박이다. 입학당시 그래도 시험성적이 좋다고 하여 ‘3분의1장학금’ 혜택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을 받지 못한 학생들을 무시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못해본 다방출입도 해보고 막걸리도 마셔보고 담배도 피워보고 당구장 출입도 하느라고 공부를 등한히 한 것이다. 그 결과 수치스럽게 2과목 낙제이다.

이제 손진길은 다시 그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섬머스쿨’에 참석하면서 시간만 나면 공대 호수가에 있는 벤치에 홀로 않아서 많은 생각을 한다;

한 일주일 여름 햇빛이 그대로 내리 쪼이는 그 벤치에 앉아서 그가 깨달은 것이 두가지이다; 하나는, 서울대학교 합격이 결코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더 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 어떻게 전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참으로 단견에 불과하다. 그렇게 사고를 한다면 그것은 우물안의 개구리와 같다. 나는 더 이상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또 하나는, 이왕 인생의 목표를 정립할 바에는 진실로 평생에 걸쳐서 추구해야만 하는 그러한 거창한 목표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오래 성찰을 한 다음에 손진길이 정립한 인생의 목표가 상당히 추상적이다; “나는 인생을 보는 눈과 세상을 보는 눈을 내 것으로 가질 것이다. 구체적으로,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모두 내 나름대로 정립할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남아 있는 3년반의 대학시절을 그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의 기초를 닦는데 사용할 것이다”.

그러한 길고도 긴 인생의 목표를 확립하고 났더니 ‘섬머스쿨’ 기간이 고맙게 느껴진다. 더 이상 나에게 ‘보충수업’은 없으며 ‘과락’은 없다. 내가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앞으로 다양한 과목을 공부하고 여러 모임에 참여하겠지만 전공학점에 있어서도 더 이상 실패는 없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는 그 여름을 혼자서 공릉동 하숙집과 교양과정부 건물을 오가면서 지내게 된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하숙집 친구들이 다시 상경한다. 당시 손진길은 고등학교 동기생인 ‘정인조’ 및 ‘이용희’와 그 하숙집에서 한방을 사용하고 있다. 8명의 하숙생 가운데 계성고등학교 출신이 3명이고 경남고에서 온 하숙생이 2명, 광주일고에서 온 하숙생이 2명, 그리고 기타가 1명이다. 그 가운데 부산에서 온 2명은 재수하여 서울공대에 들어온 친구들이다;

공교롭게도 그 중의 한 친구가 손진길과 같은 ‘원자력공학과’이다. 그 이름이 ‘박군철’이다. 그는 죽어도 ‘핵공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재수까지 하여 원자력공학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른다. 그 반면에 같은 과의 손진길은 학교에서 전공공부를 하기보다는 언제나 ‘서울공대 기독학생회관’에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느라고 바쁘다.

그러한 광경을 박군철이 하숙집 옆방에 살면서 기이한 듯이 바라본다. 반면에 손진길은 또 박군철을 신기하게 쳐다본다. ‘어떻게 물리학 책과 응용수학 책을 늘 옆구리에 끼고서 사는가? 그 과목들이 그렇게 재미가 있는가?’ 손진길이 볼 때에는 참으로 재미가 없는 과목들이다. 전공이라서 어쩔 수 없이 수업에 들어가고는 있지만 도통 흥미가 없다.

그래서 하루는 박군철에게 물어본다; “군철아, 너는 어째서 그렇게 물리학과 수학을 죽자사자 공부하고 있는 것이냐? 나는 별로 재미가 없는데… 지겹지도 않니?...”. 그러자 박군철의 대답이 걸작이다; “진길아. 나는 서울공대 원자력공학과에 들어오고 싶어서 재수까지 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하여 평생 원자력공학자로 살려고 한다. 당장은 입학성적이 나보다 좋은 손진길이 너를 내가 학과성적으로 이기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손진길이 피식 웃고 만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핵공학이 별로 재미가 없다. 물리도 수학도 그 개념이 분명하지가 않다. 공식을 가지고 대입을 하여 그냥 기계적으로 풀이하고 그것으로 모든 해답을 얻은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 모든 것이 허황한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 공식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공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대입만 하여 기계적인 답 만을 얻어내고 있으니 그것으로 학위를 받으면 무엇하나?...”.

그래서 그런지 손진길은 화학에는 잼병이다. 화학공식을 왜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있는지 전혀 수긍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책을 들여다 보아도 그 점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리고 수학도 마찬가지이다. 공리가 있고 공식이 먼저 있는데 그 깊은 이치를 밝혀주는 책이 없다. 그 설명을 듣지를 못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스스로 그 이치를 터득하려고 해보아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것이 안된다. 그러니 기계적인 계산자가 되지 아니하려고 스스로 마음먹고 있는 것이다.

한번은 손진길이 용기를 내어서 ‘응용수학’에 이어 그 다음학기에 ‘응용해석’을 가르치고 있는 ‘응용수학과’의 노교수에게 질문한다; “어째서 허수가 존재하며 그것을 감안하여 보정하는 수학의 계산방식이 그렇게 전개가 되고 있습니까? 저는 교수님께서 마치 아메바를 수술칼로 도려내 듯이 그렇게 그림을 그려가면서 허수를 끄집어 내는 계산법을 사용하는 것이 전혀 이해가 안됩니다. 그 이치를 좀 설명해주십시오”;

그 노교수의 대답이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허수를 배제하는 수학적인 계산방법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것처럼 계산을 하면 된다. 토를 달지 말고 그대로 따라서 하도록 해라. 그리하면 학점이 나간다”. 그 말을 듣자 손진길은 자신이 그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점은 따야 한다. 그것은 필수과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지로 공부하여 학점을 따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그 노교수가 상당히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계산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깊은 이치도 학생들에게 설명해주지 못하면서 선진국에서 그렇게 계산하고 있으니 그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손진길 자신이 생각할 때에는 그것은 수학이 아니다. 그렇게 기본설명도 못하면서 응용수학과 해석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수가 먼저 그 이론과 해석에 달통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수학자와 과학자를 키울 수가 있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러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교수를 손진길이 서울공대에서 발견하지를 못한다.

그 결과 그는 공대공부는 학점을 따는데 그치고 실제로는 다른 공부를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개론적인 과목부터 배우고자 한다. 그것이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법학 등의 과목이다. 다행스럽게도 서울대학교가 종합대학이기 때문에 교양과목의 비중이 상당하다. 그래서 손진길은 꼭 필요한 전공필수와 전공선택만  서울공대에서 공부하고 나머지 학점은 교양과목으로 돌려서 다양하게 이수하고자 한다. 그것이 그를 숨쉬게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손진길이 4년간  하숙생활을 하고 있는 공릉동의 위치가 다음과 같이 특이하다; 첫째로,  서울공대와 교양과정부가 자리를 잡고 있는 공릉동은 서울의 동북쪽에 있는 변방이며 그 진입도로가 하나뿐이다. 그래서 그곳으로 들어오는 시내버스가 언제나 만원이다. 오죽하면 ‘만원버스’라는 제목으로 글짓기를 다하고 있을까?;

둘째로, 많은 사람들이 공릉동의 외길을 통하여 상계동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상계동으로 이사를 많이들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나오는 이삿짐을 보기가 힘이 든다. 그만큼 상계와 중계 그리고 하계지역은 어렵게 살고 있는 서울시민들이 함께 모여서 살고 있는 지역인 것이다. 

셋째로, 서울 휘경동을 지나 ‘중량교’와 ‘한독약품’을 통과하면 중화동과 묵동이 차례로 나타난다. 묵동에서 그대로 직진하면 공릉동에 다다르게 된다. 반면에 묵동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태릉’이 나타나는데 그곳에 ‘서울여대’와 ‘육군사관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나중에는 ‘한국선수촌’과 ‘삼육대학’ 등이 태릉에 자리를 잡는다. 그곳 태릉과 서울공대가 있는 공릉동에는 ‘배 밭’이 유명하다;

넷째로, 서울공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 언덕에 공릉동 하숙집들이 즐비한 골목이 나타난다. 그 골목의 끝자락에 손진길이 하숙을 하고 있는 충청도집이 있다. 그 못 미처 같은 골목에 전라도집이 있다. 그러므로 경상도 출신인 손진길이 충청도 하숙집에서 1년간 충청도 음식을 맛보고 있다. 나중에는 그가 전라도집으로 옮겨서 3년간 하숙을 한다. 왜냐하면, 경상도 음식보다는 충청도 음식이 나은 것 같은데 그보다는 역시 전라도 음식이 더 맛이 좋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름대로의 식도락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