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37(작성자; 손진길)
8. 번영의 1970년대에 발생하는 일들;
선더말 아재 손수석의 차남인 손진길이 1969년 여름방학 중에 잠시 경주 황오동 집에 들린다. 대구의 계성고등학교 특별반인 그가 벌써 2학년이다. 내년에 3학년이 되면 경주에 올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이므로 이번 여름방학 중에 한번 들린 것이다. 물론 6개월후 겨울방학이 되어도 그는 대구에서 계속 공부만 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지독하게 공부에만 매어 달리는 차남 손진길을 바라보고서 모친 고복수는 고개를 흔든다. 남편인 선더말 아재를 차남이 너무 닮아서 그 성격이 지독하니 그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와 달리 그녀는 장남 손진목이 마음에 든다. 장남은 성격이 느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남 손진목은 얼굴에 좋은 것과 싫은 것이 금방 표가 난다. 그러므로 모친인 고복수가 장남을 다루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반면에 차남 손진길은 모친의 손아귀에 잡히지가 않는다. 그러니 정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선더말 아재는 그 반대이다. 자신의 성격을 많이 닮아 끈기가 있는 차남 손진길을 마음에 들어 한다.
차남 손진길은 한번 쓰러지면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장남 손진목은 그러한 근성과 끈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표나게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차남 손진길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선더말 아재가 훗날 다른 사업에 손을 댄다면 그것을 차남에게 한번 맡겨보면 어떨까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더말 아재는 실제로 두 차례 차남 손진길의 의사를 다음과 같이 타진해본다; 첫째가 1972년의 일이다. 둘째가 1975년의 일이다. 먼저 1972년이면 그때 선더말 아재의 차남인 손진길이 서울공대 원자력과 2학년이다. 손진길은 서울 공릉동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다.
선더말 아재는 볼일이 있어 서울에 들릴 때마다 일부러 서울 변두리에 있는 차남의 하숙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아들의 하숙방에서 함께 잠을 자면서 깊은 생각을 해본다. 그 결과 서울의 미아리에 집을 한 채 사주려고 한다.
차남이 미아리 집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보고서 장차 그 주변에 부동산을 더 구입하여 관리를 맡겨볼 생각을 한다. 아무래도 지방 소도시인 경주지역에 투자를 하는 것보다는 인구가 크게 몰리고 있는 서울지역의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하루는 차남 손진길에게 물어본다; “길아, 내가 미아리에 들러서 66평 짜리 기와집을 한 채 보고 왔다. 상당히 단단하고 잘 지어진 집이다. 내가 그 집을 사줄 터이니 그 집에 살면서 서울공대에 다니면 좋지 않겠느냐?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고 한번에 공릉동으로 오는 버스노선도 있더라. 그러니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그 말을 듣자 마자 손진길이 단번에 대답한다; “아버지, 저는 학교 바로 앞에 있는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아요. 점심시간이 되면 금방 하숙집에 뛰어와서 따뜻한 식사를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친구들도 하숙집 주변에 많아요. 그러니 저 혼자 미아리에서 큰 집에 살면서 부동산이나 관리하고 학교에 버스 타고 다니기가 싫어요.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 대답을 들은 선더말 아재는 차남 손진길에게 부동산을 사서 관리하게 한다는 계획을 접고자 한다. 손진길은 그러한 생각이 없는 아이이다. 그렇게 부동산을 경영하면서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데 그 일을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그러한 발상을 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경주 황오동에 살고 있는 인척 ‘고병대’와 성건동에서 사법서사를 하고 있는 ‘김경암’의 사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병대의 장남이 경주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용감하게 서울법대 법학과에 지원했다. 두차례 낙방을 하지만 끝까지 공부하여 합격한다. 실로 경주에서는 큰 경사이다. 그래서 경주사람들이 고병대의 아들의 장래를 응원한다. 경주출신도 한번 판사가 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러한 경주사람의 여망을 안고서 그는 끈질기게 사법고시에 도전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30세 가까이 될 때까지 합격하지를 못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다. 당시에 매년 50명만 선발하고 있는 사법고시에 합격한다고 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남의 나이가 많아지자 부친인 고병대가 결단을 내린다. 그는 경주에 가장 큰 양조장의 주인이기도 하고 부동산이 많다. 그래서 아들에게 낙향하여 부친의 사업을 맡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경주 부잣집의 딸을 며느리로 들이고 사돈집의 재산도 머리가 좋은 서울법대 출신인 장남이 맡도록 조치한다. 역시 서울법대 출신은 다른 모양이다. 그는 사법계통에 동창이 많아서 그런지 부동산 관련하여 법적인 문제를 그렇게 잘 처리하면서 자기 집안과 처가의 재산을 늘려 나간다. 그것을 멀리서 선더말 아재가 지켜본 것이다.
그 다음에 선더말 아재는 자신의 부동산 서류를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는 김경암 사법서사의 경우를 본 것이다. 그 양반은 그 옛날 법원서기로 일한 때부터 돈을 많이 벌어서 경주에 부동산을 꽤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셋째딸과 막내 아들을 서울에 유학을 시키고 있다. 그 방법이 서울 미아리에 큰 기와집을 사서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게 한 것이다.
물론 그 집에는 처제와 동서의 가족이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서울 부동산에 투자를 미리 하고 있는 것을 선더말 아재가 듣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차제에 선더말 아재도 미아리에 집을 하나 사서 차남 손진길로 하여금 그곳에 살게 하고 차차 주변의 부동산에 투자를 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단칼에 차남 손진길이 싫다고 말하므로 아예 그 계획을 접고 만다. 부동산이란 믿을 만한 사람이 선의로 관리를 해주지 아니하면 이미 절반은 자기 재산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선더말 아재가 경험을 통하여 뼈저리게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1975년에는 선더말 아재의 차남이 서울공대 원자력과를 졸업하고 고리원자력 1호기를 건설하는 현장에 뛰어다니고 있을 때이다. 그때 선더말 아재는 차남이 그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아니하는 것을 눈치챈다. 왜냐하면, 차남 손진길이 주말마다 언제나 열차를 타고서 경주집에 들리기 때문이다.
당시에 선더말 아재는 경주 주변에 있는 도시들 곧 울산과 포항이 커지자 경주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내남면과 천북면의 땅값이 크게 오르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자신은 이미 경주수산회사와 냉동공장을 운영하여 큰 돈을 벌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발전지역에 투자하여 계속 부자가 되고 있다.
이제는 부동산에서 많은 돈을 벌었으므로 다른 투자처를 찾고 있다. 그때 경주에서 대구로 가는 길목인 건천에 건설하고자 하는 새마을 공장이 선더말 아재의 눈에 들어온다. 선더말 아재는 그곳에 편물공장을 하나 세우려고 구상을 하고 있다.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유가 두가지이다;
첫째, 대구에 살고 있는 먼 일가 동개와 그의 신랑이 일본의 기모노 옷감을 짜는 ‘편물공장’을 잘 경영하여 큰 이익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선더말 아재가 일본의 소식을 수시로 듣고 있기 때문이다. 동경의 안춘근 형과 오사카의 배인근 형에게 알아보니 그 일이 계속 재미를 볼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래서 선더말 아재는 차남 손진길의 의사를 타진해본다; “길아, 원자력 발전소 건설현장의 일이 별로 재미가 없으면 내가 건천에 편물공장을 하나 세워줄 터이니 그 공장을 관리하는 것이 어떠냐? 제대로 관리하고 운영만 하면 큰 수익을 얻을 수가 있다. 이렇게 건설현장에서 말단기사로 일하는 것보다는 편물공장을 직접 경영하는 것이 훨씬 장래가 나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이번에는 차남 손진길이 좀 생각을 한다. 그러더니 신중하게 답변한다; “아버지, 그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앞으로 저 혼자의 힘으로 자수성가를 할 거예요. 아버지의 재산이나 관리하면서 그렇게 제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아요. 아버지께서 혼자서 자수성가를 하셨으니 저도 그렇게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보람이 있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을 듣자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차남 손진길의 인생이 자신과는 다를 것이라고 판단한다. 자신은 한평생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고 나아가서 자신의 가문과 일가친척들을 돌보는 전통적인 가주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느라고 바쁘다. 그것이 조부인 서배 할배와 선친인 봉천 할배가 자신에게 물려준 유훈이며 가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경제개발계획 5개년 계획이 수차례 추진이 되어 오면서 이제는 다른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한국이 산업화가 되고 있으며 중화학 중공업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도 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달라지고 있다. 대학만 나오면 취업의 문이 열려 있다. 그러니 이제는 생존을 위하여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려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얼마나 자기실현을 하면서 어떻게 보람 있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젊은 사람들이 취업도 하고 장래일도 도모하고 있다. 그러한 1970년대는 번영의 시대가 맞다. 지난 1960년대에 실시가 된 두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결과 찾아온 전혀 다른 세상이다;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손진길이므로 그 생각이 기본적으로 부친 선더말 아재와는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1970년대가 시작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1969년의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때의 일이 1970년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1969년 여름에 짧은 기간 일본 오사카를 방문하고 선더말 아재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결과 황오동 집에는 흑백 텔레비전이 한대 생겼다. 경주에도 이제는 전파중개국이 생겨서 그런지 텔레비전을 볼 수가 있다. 그때 운이 좋게도 선더말 아재의 식구들이 미국의 인공위성이 달에 착륙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바야흐로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미국의 우주인 닐 암스트롱이 1969년 7월 20일 달 표면에 첫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착륙선의 곁에는 미국의 성조기가 나부낀다. 그 모습을 흑백텔레비전으로 보고서 모두를 환성을 지른다. 그것이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이룩한 위대한 쾌거이다;
잠시 고향집에 들린 손진길도 생생하게 자신의 눈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그후 반 백 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그 다음에 달에 착륙한 인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세월의 길이로 따지자면 벌써 많은 인류가 달에서 살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의문에 대하여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주는 과학자가 한사람도 없다. 그것이 너무나 기이한 현대의 불가사의이다.
1969년에는 서울과 부산 사이에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1967년경에 정부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여 서울과 부산을 하루 생활권으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반대여론이 대단하다. 세계은행이 평가하기로 한국의 실정에서 당장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예산의 20%가 넘는 거금을 들여서 건설을 하겠다고 하는가 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당시에 시대착오적인 극단적 주장이 하나 나타나기도 한다. 그 내용은 고속도로를 닦아 놓으면 외국의 군대가 쳐들어올 때 그 침략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적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지론이다.
그 논리는 조선시대 같으면 분명히 설득력이 있다. 그 옛날 16세기 말에 조선을 침입한 일본군이 도로가 형편없어서 북진을 하는데 애로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350년 이상이 지난 20세기 후반의 현대한국에서는 그 논리가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박정희 대통령은 서양에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경부고속도로를 닦고 육로로 빨리 물건을 수출항구인 부산으로 운반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일부 여당인사와 야당 그리고 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1968년 2월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기공식을 가진다. 그리고 1970년 7월 단 3년반만에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하고 개통식을 다음과 같이 가지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 동안에 여론에 호소하기 위하여 경부고속도로를 닦는 근로자를 위로하는 노래도 만들어 보급하고 ‘꽃피는 팔도강산’이라고 하는 재미있는 영화도 만들어 전국적으로 상영하고 있다. ‘김희갑’과 ‘황정순’이 계속하여 주연을 맡고 있는 그 영화가 재미가 있어서 그런지 크게 히트를 하고 있다;
동시에 시골에서는 ‘새마을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농촌에서도 술과 도박을 물리치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라는 새로운 구호와 마음가짐으로 부지런히 수공업으로 수출상품을 만들어 외국에 팔자고 하는 일종의 소득증대운동이다. 그에 따라 농가의 부업으로 ‘홀치기’가 성행한다;
그리고 시골여인들의 긴 머리카락을 끊어서 팔라고 수집상들이 농촌을 누빈다. 그들이 수집해온 ‘달비’가 가장 좋은 가발의 재료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해외에 수출하여 한국의 가발업체들이 큰 돈을 벌고 있다;
또한 농촌에서는 나무로 ‘젓가락’을 만들어 수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람쥐’를 잡아서 그것을 식재료로 하는 서양에 팔기도 한다. 그 즈음 월남전에 파병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정부가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계속 추진하고 동시에 한국군의 현대화가 빠른 속도로 진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68년 4월에는 포항 영일만에 최신식 제철공장을 세우기 위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포항종합제철회사’가 설립되고 박 대통령의 과거 비서였던 박태준이 그 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그 회사가 2년간 외자를 끌어들이고 일본의 기술지원을 확보하여 드디어 1970년 4월 1일에 박태준 사장이 박대통령과 관계장관을 모시고 현지에서 착공식을 가진다. 한국 최초의 대규모 제철제강공장이 그렇게 세워지게 되는데 당시의 착공식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이 다음과 같다;
착공식 이후 박태준 사장은 제철공장을 완공하기 위하여 박차를 가한다. 국가적인 국책사업이므로 정부도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 결과 1973년에 용광로의 불을 지피고 뜨거운 철강을 생산하게 된다. 참으로 빠른 시간 내에 그 큰 공장을 지은 것이다.
그렇게 ‘한강의 기적’이 계속되면서 1970년대에 한국이 크게 번영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이면에서는 ‘개발독재’가 용인되면서 민주주의와 기본적인 인권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된다. 그렇게 두 얼굴을 가진 시대가 번영하는 대한민국의 실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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