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손진길 소설)

선더말 아재38(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10. 16:34

선더말 아재38(작성자; 손진길)

 

1970년말에 고3졸업반인 선더말 아재의 차남 손진길의 계성고등학교 졸업성적이 나온다. 그가 3년간 끈질기게 공부에 정진한 결과 전체 5등이며 이과 3등의 좋은 석차를 얻는다. 그것을 보면서 손진길은 한편 기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과에서 고생한 생각이 든다.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올 때 ‘베스트 텐’ 가운데 8명이 이과로 오고 단 2명만이 문과를 선택했다. 그러나 도중에 이과에서 2명이 문과로 옮겨서 ‘베스트 텐’ 가운데 문과가 4명 이과가 6명이 된다. 문과과목의 성적이 월등하게 높은 손진길도 문과로 옮기는 것이 당연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그는 서울공대를 가야 좋은 직장에 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과로 가더라도 학자가 되거나 고시를 쳐서 고급공무원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기도 하는데 그러한 관계에 대하여 무식한 시골 출신 손진길이다. 그러므로 이과에 그냥 잔류하면서 참으로 잠을 크게 줄이고 죽도록 고생을 하여 그 졸업성적을 얻어낸 것이다. 그렇게 졸업성적에 집착을 한 이유는 전교 6명에게 주어진 ‘특대상’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에 매년 30명의 합격자를 내고 있는 대구의 사립 명문인 ‘계성고등학교’이다. 그 가운데 졸업성적우수자로 이과 3명과 문과 3명을 선발하여 별도로 ‘특대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그들에 한정하여 본인이 스스로 ‘서울대학교’ 지원학과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주기 위한 것이다. 그 이하의 성적이면 담임선생과 상의하여 합의한 학과에 지원을 해야만 한다.

이과의 특별반 담임인 ‘신석환’ 선생과 ‘서울대학교’ 지원학과를 결정할 때에 가장 먼저 전교 1등이며 이과 1등으로 졸업하는 ‘이근우’가 서울공대 ‘응용물리학과’를 선택한다. 그것을 보면서 신석환 선생이 은근히 기뻐한다. 그 학과가 서울공대에서 입학성적으로 보아 중간정도 되는 위치이므로 이근우의 합격은 ‘따놓은 당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로써 계성고등학교는 확실한 서울대 합격자 1명을 우선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전체 3등이며 이과 2등인 ‘이용희’가 서울공대 ‘화학공학과’를 지원한다. 당시 서울공대에서는 ‘전자공학과’와 ‘화학공학과’가 선두다툼을 하고 있다. 물론 이용희가 특대생이므로 스스로 그 학과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약간의 위험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합격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래서 담임선생이 그 학과의 이름을 원서에 기입한다.

이제는 이과 3등이며 전체 5등으로 졸업하게 되는 손진길의 순서이다. 그는 서울공대의 ‘원자력공학과’를 선택한다. 그 학과 역시 응용물리학과처럼 서울공대에서 중간정도의 위치이다. 그러므로 담임선생이 기뻐서 한마디를 한다; “손진길이는 99%의 합격율을 가지고 지원을 하고 있구나”;

그러한 담임선생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손진길이 그 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다.

손진길은 서울공대의 18개 학과 가운데 어느 학과를 선택할지 많이 고민했다. 자신은 수학과 물리 그리고 화학을 잘 못하니 사실은 공대를 가서는 안된다. 하지만 끝까지 이과 자연계 공부를 했으니 서울공대에 지원을 해야 한다. 그래서 18개 학과에 대하여 소개하는 글을 전부 읽어 보았다. 그 결과 자신의 마음에 드는 단 하나의 학과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것이 ‘원자력공학과’이다;

당시의 입시요강에 다음과 같이 그 학과의 소개가 되어 있다; “자신에게 이과 특수적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오면 좋다. 원자력공학과는 핵물리를 공학적으로 다루는 특수한 학과이기 때문이다”. 손진길은 자신이 이과 일반적성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공대에서도 소위 ‘날라리학과’로 불리고 있는 그러한 학과를 찾으려고 고심을 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특수적성을 가진 자칭 ‘천재성’이 있는 학생을 환영한다고 적혀 있으니 자신은 천재가 아니지만 특수적성은 있는 것 같으니 한번 응시를 해보고자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탁월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원자력공학과가 나름대로 상당히 추상적인 ‘양자역학’을 다루고 있으므로 손진길이 그런대로 적응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이 그렇지 ‘서울공대’에는 ‘날라리학과’가 없다. 그래서 손진길이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하고자 사실은 고생을 제법 한 것이다;

만약 숨이 막히는 응용수학이나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순수물리학만을 요구했다고 하면 그는 중도에 포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원자로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적인 ‘노수치 분석’이나 ‘연쇄반응의 통제방식’ 등을 주로 다루고 있으므로 그나마 개념파악을 나름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서울공대에 합격하고 나서도 전공분야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건축공학과에 가서 ‘건축법’과 ‘소묘’등의 과목을 수강하고 ‘교양과목’을 많이 듣는다. 그래서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개론을 두루 공부하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서울공대기독학생회’에 가입하여 그 회관에 설치가 되어 있는 ‘문학반’과 ‘사회문제연구반’에서 활동하기를 좋아한다.

1967년에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 구내에 교회를 세우고자 김덕영 권사님과 서울공대 기독학생회 임원들이 기도로 앞장을 섰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계 실업인 장로님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한국에서 1969년에 사관학교를 제외하고 국립대학에 최초로 교회 건물이 세워지게 된다.

그러한 공대교회와 회관에서 손진길이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당시의 지도목사가 미국선교사인 ‘데이비드 얼 로스’인데 한국이름이 ‘오대원’ 목사이다. 참고로 왼쪽 끝에 있는 ‘이완수’ 선배가 간직하고 있는 당시의 기공식 사진이 다음과 같다;

그렇게 자신이 공대생인지 아니면 문과생인지 정체성이 확실하지 아니한 손진길이 서울공대에서 4년간 공부를 하고 있는 1971년부터 1974년 사이에 한국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극심하다. 한편으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계속 실시가 되어 대단한 성과를 내고 있어 1970년대에는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온다고 정부가 선전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시대는 10년 후에 오게 되지만 그래도 해방 후 지구상에서 최빈국에 속하던 한국이 197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 중진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는 ‘고도성장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발독재’가 용인됨에 따라 개인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를 받고 민주주의의 근간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

왜냐하면, 1971년 10월에 위수령에 이어 계엄령이 선포가 되고 그 다음해 10월에는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방했는지 ‘유신의 시대’가 한국에서 나타나고 말기 때문이다. 1972년에는 소위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만다. 그 특징은 대통령을 장충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뽑는데 그러한 간선제 대통령의 권한이 실로 막강하다는 것이다;

유신헌법에 의거 대통령은 긴급조치명령으로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을 무시하고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보유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실제로 그 권한을 자주 행사하여 반대파를 억누르면서 유신정국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유신치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유일한 종신제 통치자이며 전근대적인 군왕인 셈이다. 그러한 모순된 시대를 대학시절에 맞이하여 선더말 아재의 차남인 손진길은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박정희 대통령을 인정하는 것은 딱 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박대통령이 한국 땅에서 다시는 보릿고개를 없도록 하겠다는 의지로 경제성장정책을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5.16군사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의 획득이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한국백성들을 먹고 살도록 해준다는 그 정신만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평생을 선더말 아재는 가난한 고향사람들과 일가들을 자립하게 하는데 기여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박정희 대통령의 그러한 점을 좋게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풍요의 시대의 문턱에 서있는 그의 차남 손진길은 그 생각이 다르다. 경제적 성공에 걸맞게 정치적 사회적인 발전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삼권분립이라고 하는 민주주의 원칙도 제대로 가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대학가에 불어 닥치고 있는 데모와 운동권의 움직임에 그가 무관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고뇌의 시간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주인공이 그의 부친인 선더말 아재이기 때문이다.

1971년 1월에 선더말 아재는 부부동반으로 대구에 간다. 차남 손진길이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하므로 그 졸업식에 참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날 장남 손진목이 동행한다. 그는 영남대학교 수학과에 다니고 있다. 방학 중이므로 부모와 함께 졸업식이 거행되는 강당에 들어선다.

그날 졸업생 가운데 30명의 우수상 후보자가 먼저 발표가 된다. 그 다음에 그 30명 가운데 특별히 6명이 ‘특대상’을 받는다. 그 가운데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차남 손진길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아들이 항상 ‘베스트 텐’ 안에 들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알지만 그 졸업성적이 전교 5등이라고 하니 그것이 대단한 것이다;

매년 특별반 출신 가운데 30명 정도가 재수생을 합하여 서울대학교에 합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차남 손진길이 넉넉하게 ‘서울공대’에 합격할 수가 있다. 재작년에 선더말 아재의 친구이며 처족인 고민달로부터 들은 말이 생각난다. 고민달은 자신의 장남이 재수를 하여 서울 농대에 합격하였다고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모른다. 부모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이제는 차남 손진길이 서울공대에 합격만 한다면 선더말 아재 손수석 자신도 경주에서 친구들에게 어깨를 좀 펴고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졸업식을 마치고 며칠 후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차남 손진길의 행보에 관심을 보인다. 그때 장남 손진목이 부친에게 말한다; “아버지, 제가 길이와 함께 서울에 가서 그가 입시를 잘 보도록 거들어 줄게요”.

선더말 아재가 가상하게 생각하여 허락한다. 그래서 손진목은 참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1971년 1월에 동생 손진길과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서 서울로 간다. 작년 7월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기에 고속버스가 운행이 되고 있다. 과거 열차로 10시간이나 걸린 거리가 이제는 고속버스로 4시간만에 주파하고 있다. 참으로 빠른 시대를 살고 있는 1970년대이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한국은 이제 ‘일일생활권’이라고 한다. 아침에 부산에서 잡힌 생선을 ‘아이스 통’에 담아서 서울로 운반하면 점심시간에 서울에서 그 생선 맛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부산사람은 그 생선을 서울에서 판돈으로 물건을 구입하여 당일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에 도착할 수가 있다. 그러니 서울과 부산이 ‘일일생활권’이 된 것이 맞다.

하지만 그러한 혜택을 아직 호남지방에서는 누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 ‘호남고속도로’를 건설하고자 한다. 만약 한국이 중국으로 상품을 수출하는 시대였다고 한다면 호남지방과 충청남도 지방이 먼저 개발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일본과 서양으로 상품을 수출하는 시대가 먼저 열렸기에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 앞선 것으로 보인다.

1971년 1월 19일이 서울공대에서 입학시험을 보는 날이다. 손진길은 하루 일찍 학교친구들과 함께 고속버스로 서울 동대문에 도착하여 그 다음에 시내버스를 타고서 공릉동에 들어온다. 물론 형인 손진목이 동행하고 있다. 공릉동에 도착하여 우선 ‘서울공대기독학생회’가 자리를 잡고 있는 ‘기독학생회관’에 들린다.

그 이유는 계성고등학교 2년 선배인 ‘김석준’이 서울공대 토목과를 다니고 있는데 그가 후배들이 서울공대 입시를 보는 것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배인 김석준은 당시 서울공대기독학생회 총무로 일하고 있다. 그는 겨울방학에도 서울에 머물면서 기독학생회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참고로, 사진의 오른쪽 끝이 김석준 선배로 보인다;

김석준은 대학 1년 선배이며 기독학생회 회장인 ‘금경연’과 함께 서울공대에 시험을 치기 위하여 상경한 10여명의 고교후배들을 공릉동 하숙집으로 인도한다. 충청도 사람이 하숙집 주인인데 식사를 잘 차려준다. 식사후에 모두들 기독학생회관으로 간다. 그곳에서 ‘오대원’ 선교사가 시험생들을 위하여 예배를 드려준다.

그 다음날부터 이틀동안 손진길은 친구들과 함께 서울공대 입학시험을 치룬다. 그리고 그 다음날 경주로 돌아온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며칠이 지나자 신문지상에 합격자 발표가 난다. 서울공대 원자력공학과에 무난하게 합격한다. 그 결과 선더말 아재의 차남인 손진길은 1971년 3월부터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그 캠퍼스 역시 공릉동에 있다.

그 전 곧 1971년 2월초에 선더말 아재의 차남이 서울공대에 합격하였다는 소문이 경주시내에 퍼지게 된다. 그러자 선더말 아재의 친구들과 회사간부들이 한턱을 내라고 야단이다. 기분이 좋아진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집안에 하루 잔치를 벌인다. 그도 그럴 것이 경주지역에서 1년에 1명 정도 서울대 합격자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해에는 2명이다. 또 한명은 서울 치대에 재수하여 들어간 ‘고현권’이다. 그는 제주 고씨이며 선더말 아재의 계중인 처족의 아들이다. 그러한 경사가 있는 해이므로 손수석은 잔치를 열어서 차남의 서울대 합격을 축하한 것이다. 그날 황오동 집에서 손진길은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느라고 바쁘다;

선더말 아재의 장남인 손진목과 차남인 손진길이 함께 자취방을 얻어 있던 그 계산동 집에서도 겹경사가 난다. 그 이유는 손진길 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 맞은편 방에 살고 있던 계성고등학교 출신 재수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 경북대학교에 그해 수석입학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주인 아주머니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집 터가 아주 좋은 모양이예요…”. 그렇게 즐거운 웃음이 있는 가운데 1971년 2월의 추위가 훈훈하게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