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43(작성자; 손진길)
1972년 가을에 선더말 아재는 일본에 살고 있는 의리로 맺은 두 분의 형님 곧 배인근과 안춘근에게 한국을 한번 방문하시라고 초청을 한다. 여름부터 자신이 경주에 여관과 요정을 운영하고 있으니 잘 모시겠다고 말씀을 드린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에 올 시간이 없다고 똑같이 대답을 하고 있다.
안춘근은 동경과 오사카에 대규모 냉동냉장공장을 가지고 있기에 양쪽을 오가느라고 바쁠 것이다. 배인근은 오사카에 큰 쇼핑센터를 경영하고 있으므로 역시 그 일이 바쁠 것이다.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사업가인 두사람이 바쁜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잠시 한국을 다녀갈 시간은 있을 터인데 그것이 어렵다고 하니 어쩐 일일까?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자신이 일본에 있을 때에 두 형님에게 신세를 진 것이 많기에 이번 기회에 한번 갚아보려고 했더니 그것이 뜻대로 되지를 않는다. 한국에 안 오겠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1972년이 아쉽게 지나가고 1973년 봄이 되자 느닷없이 동경에 살고 있는 안춘근에게서 선더말 아재 손수석에게 전화가 온다; “수석아, 너는 오사카에 살고 있는 배인근 형이 금년에 조선나이로 고희인 것을 알고 있느냐? 그래서 그런지 나보고 너를 데리고 오사카 자신의 집을 한번 방문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수석이 너는 언제 오사카에 도착할 수가 있는지 내게 먼저 연락을 다오. 나도 그 시간에 맞추어 배인근 형님의 집을 방문하고자 한다. 우리가 형님의 고희연에 참석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 말을 듣자 선더말 아재는 불현듯 어째서 배인근 형이 한국을 방문하지 아니하고 미적거렸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가족이 모두 살고 있는 일본에서 고희연을 지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방문을 하지 아니하고 의동생인 손수석과 동경의 안춘근을 오사카 자기 집으로 부르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빨리 오사카로 가서 배인근 형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손수석이 안춘근에게 즉시 답을 한다; “춘근이 형, 제가 마침 여권이 살아있으니 정확히 일주일 후에 오사카에 있는 배인근 형님의 집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그때 그 집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안춘근이 쾌히 말한다; “좋아. 그럼 그날 배인근 형님의 저택에서 모두들 반갑게 만나도록 하자꾸나”.
두 사람이 오사카에 살고 있는 배인근의 저택에 들렀을 때에는 5일 전에 벌써 고희연을 치르고 난 후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안춘근과 손수석이 볼멘소리로 배인근에게 말한다; “형님, 무지하게 섭섭합니다. 저희들은 동생도 아니고 가족이 아닙니까? 어째서 형님은 혈육들만 불러서 고희연을 치르시고 저희들에게는 칠순음식 남은 것만 먹으라고 하시는 겁니까? 섭섭합니다, 섭섭해요…”.
그 말을 듣자 배인근 부부가 ‘하하, 호호’라고 웃는다. 그리고 배인근이 두 사람에게 말한다; “여보게 아우들, 나는 가장 좋은 것을 자네 두사람을 위하여 남겨 놓았네. 다 함께 교토와 나라시에 가서 료깡에서 각각 일박을 하고 오려고 벌써 티켓을 끊어 놓고 자네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 우리들의 회포는 그곳 료깡에 가서 실컷 풀도록 하지…”.
그 말을 들은 안춘근이 엄지손가락을 위로 쳐들고 말한다; “역시 배인근 형님이 저희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얼른 교토로 가시지요. 그곳에서는 제가 한턱 크게 내겠습니다”. 사진은 교토에 있는 금각사의 모습이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말한다; “그러면 저는 나라시에 가서 한턱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나이로 고희가 되신 큰 형님께서 어디가 좋으신지 말씀만 하십시오. 이제 50을 갓 넘긴 소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사진은 나라시에 있는 불상의 모습이다;
그래서 의리로 뭉친 3형제가 오사카를 떠나 교토와 나라시에서 각각 일박을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돌이켜보면, 1937년말에 부산에서 3사람이 만나 일본으로 함께 건너와서 의형제의 의리를 맺은 지가 벌써 36년이나 된다. 참으로 긴 세월이다. 그동안 서로 의리를 지키고 살았으니 고대 중국의 유비 3형제가 부럽지가 않다. 그래서 그런지 만으로 69세인 배인근이 여행을 하는 동안 참으로 즐거워한다.
교토의 료깡에서 3사람이 맥주를 나누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눈다. 문득 선더말 아재가 어째서 작년 가을에 한국을 한번 방문하시라고 초청을 했는데 시간을 내지 아니하셨는지 그 이유를 물어본다. 그랬더니 안춘근이 대답한다;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수석이 자네가 오사카에 오면 내가 형님을 모시고 한번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네. 자네는 우리 두사람의 생각을 들어보겠나?...”.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갑자기 긴장한다. 웃음기를 빼고서 안춘근 형이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생각을 하면서 귀를 기울인다. 그러자 안춘근이 서두를 꺼낸다; “수석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하여 계속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실은 부모님이 모두 조선인이시다. 그러니 우리들의 피는 조선인의 것이야…”;
손수석이 익히 아는 사실이라 고개를 끄떡이자 안춘근이 이어서 말한다; “우리 두 사람은 한국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런데 한국정부가 한일간에 국교를 수립하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좀 이상해진 것만 같다. 돈을 벌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고 있고 한국백성들은 잘 살게만 해준다고 하면 무조건 표를 찍어주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걱정이다”.
그 말을 듣자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다. 그래서 진중하게 물어본다; “형님, 혹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생파티’ 때문에 그러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극소수가 그러한 것이지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는 경주에 건전한 여관과 요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을 아니하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배인근이 말한다; “수석이 자네는 박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느냐?”. 선더말 아재가 솔직하게 대답한다; “나이는 저보다 6살이 많고 고향이 경북 선산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사범학교를 나와서 소학교 선생을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제2사관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5.16쿠테타’를 하였는데 혁명이념을 실천한다고 지금은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는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한국에서 보릿고개를 없앤 지도자이지요. 저는 그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배인근이 한마디를 한다; “수석이, 자네는 배고픈 일가와 고향사람들을 잘 살게 만들고자 평생을 바치고 있으니 박대통령과 같은 사람을 아주 좋게 생각할 것이야. 그러나 나나 춘근이 동생의 생각은 조금 달라. 나보다는 춘근이 동생이 더 잘 알고 있으니 한번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좋겠네…”.
공이 자기에게 넘어오자 안춘근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아주 조리가 있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가지 점만 내가 간추려서 말하지. 첫째로, 그는 품행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야. 시골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나이가 든 여학생을 건드렸어. 이미 고향에는 조강지처가 있는데 그런 일을 벌인거야. 그래서 일본당국에서는 그를 처벌하려다가 그 두뇌가 아까워서 한번의 기회를 주었다고 해. 그것이 일본이 만든 만주국으로 가서 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대일본제국의 소위로 거듭나는 것이었어…”;
안춘근은 선더말 아재가 경청을 하는 것을 보고서 이어서 설명한다; “둘째로, 그는 모든 문제를 법이 아니라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서슴지 아니하지”;
“그런 성격이므로 그는 쿠데타를 한번이 아니고 두번이나 일으킨 거야. 처음은 1961년의 ’5.16쿠데타’이고 그 다음은 최근의 ‘유신 쿠데타’이지. 그는 헌법을 무시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의 문을 닫게 하고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을 제정하는 헌법개정을 추진한 인물이야”;
“그 결과 박정희는 체육관에서 단일 입후보하여 만장일치로 무조건 당선이 되는 그러한 간선제 대통령이 된 거야. 이제는 중공의 마오쩌둥처럼 무조건 인민의 박수갈채를 받는 그러한 ‘종신제 총통’이 된 거지. 그러니 그가 집권하는 이상 한국에서는 민주주의가 사라진 거야”;
선더말 아재가 그냥 듣고 있는 것을 보고서 안춘근이 마지막 설명을 한다; “셋째로, 그는 국민들에게 청렴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지만 속으로는 그와 정반대이지.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엄청난 ‘정치자금’을 필요로 하고 있어. 그래서 한일국교의 정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일본의 검은 돈을 받아 여당인 ‘민주공화당’에 준거야”;
“그 다음에는 경제건설의 과정에 있어서도 계속 ‘정치자금’을 뜯고 있어. 그 점을 일본의 기업가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지. 그래서 한국에 투자를 하거나 물건을 팔자면 무조건 ‘정치자금’을 주어야 하는데 그 액수가 무려 전체 투자금이나 매출의 5% 나 된다고들 말하고 있어…”;
“사업가는 절대로 손해보는 장사를 안하지. 그러니 그 부담이 더 커져서 전부 한국국민들에게 전가가 되고 있어. 예를 들면, 1970년에 시작한 ‘서울지하철’ 건설에 있어서도 그러하지. 일본제품인 전동차를 사가면서 그 가격을 일본 시장가의 두배로 책정하고 있어. 그러니 그 부담이 전부 서울시민들에게 돌아가는 셈이지…”.
선더말 아재가 그러한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완벽하게 이해를 하기에는 그의 지식에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한마디 질문을 한다; “그렇다면, 박대통령이 죽기 살기로 경제발전과 강성한 한국의 건설에 매진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손수석은 ‘그러한 공로가 크게 있지 않느냐?’는 의미에서 묻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하여 배인근과 안춘근이 모두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배인근이 나선다.
그가 조리 있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춘근이 동생이 한가지 빠뜨린 항목이 있네. 그것은 박대통령이 굉장히 머리가 좋고 또한 승부근성이 강한 사람이야. 그는 한국의 야당이나 다른 대통령 후보 정도를 자신의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가 상대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일본의 명치유신의 원로와 군국시대의 지도자들이지…”.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의아하여 귀를 쫑긋한다. 그것을 보고서 배인근이 말한다; “쉽게 설명을 하지. 일본의 명치유신이 1868년이야. 1930년대가 되면 ‘대동아공영권’ 이야기가 나오고 실제로 1940년대초에는 그러한 영토확장이 이루어지지. 그런데 일본에서 70년이 걸린 그 업적을 박 대통령은 당대에 자신이 모두 완성하려고 하는 영웅심리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보면 되네. 마치 독일의 히틀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이번에는 안춘근이 옆에서 거든다; “내가 조금 첨언을 하자면, 첫째, 박 대통령은 먼저 경제건설을 하여 북한에게 뒤진 한국의 경제를 그 이상으로 끄집어올리고자 한 거야. 그래서 1972년인 작년에 북한을 넘어서게 되자 비로서 남북간 대화의 물꼬를 트고 있어. 둘째, 경제적 성과를 방위산업의 발전에 집중하여 강력한 한국군대를 만들고자 하네. 그것으로 장차 남북한통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
여기까지는 선더말 아재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안춘근의 주장이 그 다음에 나타나고 있다; “셋째, 박 대통령의 꿈은 한반도의 통일정도가 아니라고 보네. 그는 일본제국의 군부가 아시아를 지배하는 시대를 경험한 사람이야. 그러므로 미국의 개입만 막을 수 있다고 하면 한민족은 영토를 확장하여 해외에 진출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앞으로 그는 그러한 수순을 밟을 것으로 우리는 조심스럽게 관측하고 있다네…”.
그것은 아마도 박 대통령이 미국의 핵우산을 벗어나기 위하여 핵무기를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전혀 뜻밖의 주장이다. 선더말 아재는 일본사람들이 자신들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경험 그리고 군국주의의 역사에 비추어 한국의 유신정권의 미래를 점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토를 달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그것은 상당한 비약이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자 한다.
그러한 첫날밤의 토론이 있은 다음에는 언제 그러한 진지한 담론이 있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아니할 정도로 좋은 시간을 보낸다. 의리로 맺어진 3형제가 나라시에도 들리고 좋은 음식도 먹으러 다닌다. 그 다음에 오사카로 돌아와서 마지막 밤을 함께 지낸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 젊은 시절에 만나서 참으로 한세상 서로 도우며 정답게 살아왔다.
그래서 배인근과 안춘근은 한국으로 떠나는 페리호를 타기 위하여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선더말 아재 손수석을 배웅하기 위하여 오사카 역까지 나온다. 헤어지기 전에 손수석이 말한다; “두분 형님들,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참으로 두분 형님 덕분에 저는 오랜 일본생활에서도 지치지 아니하고 보람이 컸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두 분이 함께 경주에도 들리십시오”;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집에 돌아오니 집사람 고복수와 장남 손진목이 자신을 반긴다. 장남은 지난 2월달에 영남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다. 그래서 손수석이 자신과 친한 문화중학교의 최영래 교장에게 언뜻 그 학교에 수학선생 자리가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마침 한자리가 비어 있다고 하여 이력서를 낸 결과 손진목이 그 학교에 수학선생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손진목이 학교에서는 수학을 잘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선더말 아재가 한시름을 덜고 있다. 안방 마님인 고복수는 장남 손진목이 경주 집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니 그것이 참으로 즐거운 모양이다. 그리고 손진목은 대구에 며칠 다녀오더니 ‘영남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부친의 사업체를 맡아서 장차 경영을 해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1973년 겨울이 되자 12월달에 경주경찰서 정보계장이 손수석을 찾아온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선더말 아재가 그 후배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가 참으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배님, 둘째 자제분의 이름이 손진길이 맞지요?...”. 손수석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정보계장의 입을 쳐다본다.
그는 머리를 긁으면서 조용히 말한다; “선배님, 사실은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저희 경찰서 정보계로 공문을 한 장 보내어 왔습니다. 그 내용인즉, 서울공대에 다니는 손진길 학생이 며칠전에 서울 수송동에 있는 ‘일본대사관’을 습격한 서울대 기독학생 12명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사건이 해외에 알려지자 일본대사가 전원석방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국제사회에 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피한 것이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선더말 아재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제서야 정보계장이 말한다; “서울대학생들이 그 시위를 통하여 지적한 것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매춘관광 결사반대’입니다. 또 하나는, 서울지하철을 건설하면서 정부여당이 ‘정치자금’을 막대하게 조성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 두가지 이슈가 해외에 대서특필이 되는 것을 일본측에서 피한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정부도 조용히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되었지 무슨 일이 더 남아 있느냐?’고 생각을 하는지 선더말 아재가 후배의 얼굴을 다시 쳐다본다. 그러자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은 ‘유신정국’입니다. 박대통령과 정부가 하는 일에 대들게 되면 여러가지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아드님이 앞으로 공무원이 된다거나 고시를 보아 출세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겠지요… ”.
선더말 아재가 충분히 알아 들었다. 자신도 그 점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개를 크게 끄떡이면서 동의를 하자 후배인 정보계장이 기분 좋게 말한다; “선배님, 그 점 미리 아시고 아드님에게 앞으로는 그저 조용히 지내면서 평범하게 회사원이 되든지 사업을 하든지 그렇게 지내라고 말해주세요. 아무래도 선배님께서 미리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제가 일부러 찾아온 것입니다”.
듣고 보니 고마운 후배이다. 그래서 손수석이 말한다; “정말 고맙습니다. 옛정을 잊지 아니하고 이렇게 저를 일부러 찾아와서 귀띔을 해주시니 제가 그렇게 알고 조치를 하겠습니다. 앞으로 정보계에 폐를 끼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번 제가 자리를 마련할 것이니 부하직원들과 함께 회식이나 하도록 하십시다. 고맙습니다”.
그후 선더말 아재는 차남 손진길에게 그 건에 대하여 한번도 물어보지를 않는다. 그만큼 차남의 판단을 믿고 있다. 부친이 경주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므로 부친에게 불이익이 있을까 싶어서 그동안 행동을 조심한 것으로 선더말 아재가 벌써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칼과 같은 그 아들의 성격을 감안할 때 한번은 터질 것으로 짐작했는데 이것이 그것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몸이 크게 상하지 아니하고 종로경찰서에서 그 다음날 바로 석방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라고 선더말 아재가 생각한다. 그러나 당사자인 손진길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그 일에 개입하면서 그해 겨울을 감방에서 지낼 각오를 벌써 했다. 그래서 문리대 쪽에서 공대 기독학생회장을 지낸 자신에게 연락이 왔을 때에 적극적으로 호응을 한 것이다.
그 일을 주동한 사람 2사람이 서울대 총 기독학생회 한해 선배들이다. 모두들 후배들에게 임원자리를 내어놓고 졸업반이 되어 있는데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이 서울지하철을 건설하면서 박정권이 건설업체는 물론이고 일본의 차량회사에서도 정치자금을 뜯고 있는 것이다. 그 규모가 생각보다 너무 크다. 그렇게 일본의 업체와 짜고서 자국민들을 속이고 정치자금을 천문학적으로 조성하고 있으니 그것을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건만 내걸고서 데모를 하게 되면 억울하게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옥살이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일본의 지성인들의 양심에 호소하고자 ‘매춘관광 결사반대’ 건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문리대의 주동자인 물리학과의 ‘임지순’이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선언문 작성은 철학과의 ‘박재순’이 맡았다.
그 정도 준비를 하고서 기독학생회 후배들에게 직접 뛰도록 맡기려고 했더니 사람이 없다. 이제는 대부분이 옥고를 치렀기에 몸조심을 하고 있다. 그래서 직접 총대를 메기로 하면서 공대기독학생회 전임 회장인 ‘손진길’에게 인력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손진길은 기독학생회 동기들에게 의사를 타진한다. 다행히 절친인 ‘이근우’가 행동을 같이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절친인 ‘정인조’는 마음으로는 하고 싶지만 ‘ROTC’ 훈련을 받고 있는 처지라 곤란하다고 양해를 구한다. 그 사정이 하도 딱하여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그는 그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그래서 ‘일본대사관’을 급습하는 그 현장 가까이 골목까지 따라 나와서 망을 보아 주었다. 고마운 친구이다.
총 12명의 결사대가 ‘일본대사관’ 정문을 젖히고 본관으로 돌격했다. 수위와 직원들이 막았으나 그들이 중과부적이다. 그래서 무사히 본관에 들어가서 플랜카드를 펼치고 선언문을 내외신 기자들에게 한꺼번에 뿌렸다. 기자들의 취재가 어느 정도 끝날 때가 되어서야 인근 ‘종로경찰서’의 병력이 도착했다.
이른바 ‘닭장차’에 실려가면서 서로들 내년에 다시 보자고 말한다. 한 두 달 감옥에 갇혀 있을 것으로 짐작한 것이다;
그런데 구치소에서 하루만에 조사를 급히 끝내고 석방을 한다. 도대체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이유를 그때에는 12명 모두가 몰랐다.
그러나 한달이 지나지 아니하여 서울을 방문한 일본의 교계인물이 발설을 했다: “한국의 지성인을 키우고 있는 제일가는 서울대학교의 학생들이 일본대사관을 습격하여 ‘매춘관광 결사반대’ 플랜카드를 편 것을 보고서 일본의 지성인들이 크게 각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이 기독학생회 전임 간부들이라고 일본신문에 톱으로 보도가 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일본의 교계지도자들이 급히 회동을 가지고 수상에게 건의를 했습니다”.
그 일본인의 설명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빨리 서울대학생들을 석방시키도록 한국정부에 요구하고 일본정부는 이 문제를 더 키우지 말라고 저희들이 권고한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대학생들에게 미안하고 저희들이 낯을 들 수가 없습니다”.
‘일본인 가운데에도 그러한 도덕적인 교계의 인사들이 있었던가?’ 그 신문의 보도를 보면서 손진길은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라는 책의 제목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그렇게 1973년이 지나가고 그 이듬해가 되자 손진길이 졸업반이 된다. 그는 석방이 되는 날 공대에서 찾아온 학생주임의 이야기에 벌써 동의를 했다.
학생주임은 공릉동에서 종로까지 와서 ‘손진길’과 ‘이근우’의 신병을 정식으로 인계 받았다. 그리고 경찰서 근처로 가서 ‘설렁탕’을 사준다. 그 자리에서 간곡하게 말한다; “이제 4학년이 되어 한해동안 조용하게 지내면 졸업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것이다”.
그 말이 그냥 엄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렇게 확실하게 조치를 하겠다고 하는 각서를 내가 쓰고서 두사람을 꺼내 온 것이야. 부디 명심하고 한해동안 근신을 해주게나. 내가 그렇게 부탁을 하고 싶어. 왜냐하면, 나도 다시는 종로경찰서에 오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야…”. 그래서 손진길은 절친 ‘이근우’와 함께 앞으로 1년간 조용히 지내자고 합의를 한다. 그렇게 조용히 지내고 있는 해가 바로 1974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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