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44(작성자; 손진길)
1974년에 선더말 아재 손수석의 4남인 ‘손진웅’은 경주 문화중학교 2학년이고 5남인 막내 ‘손진희’는 경주 황남국민학교 5학년이다. 손진웅도 공부를 꽤 잘하지만 막내인 손진희는 학교성적이 대단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한번도 전교 1등의 성적을 놓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선더말 아재가 아들 5명을 슬하에 두고 있지만 그 정도로 대단한 학업성적을 보이고 있는 아들은 막내가 처음이다. 그래서 큰 기대를 가져본다. 서울공대에 다니고 있는 차남 손진길은 대기만성형이다. 처음 국민학교에 입학하였을 때에는 ‘수’가 하나 밖에 없었다. 당시에 그는 물론 2달남짓 학교에 나가지를 못했다.
왼쪽 다리의 뼈가 금이 가서 기부스를 하고서 줄곧 집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2학년 성적이 반에서 10등 안에 들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4학년이 되자 그때부터 반에서 1등을 하고 그 성적을 졸업할 때까지 유지를 한 선더말 아재의 차남 손진길이다.
그에 비하여 막내인 손진희는 다르다. 국민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처음부터 그 성적이 전교1등이다. 그래서 1974년에 학교에서 가지고 온 지능검사의 결과를 선더말 아재가 보니 무려 ‘IQ 156’의 수치이다. 그것은 한 학교에 한사람 있을까 말까 하는 소위 ‘천재’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선더말 아재는 은연중에 막내아들인 손진희에게 큰 기대를 걸어본다. 자신을 닮아서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 자신의 가문과 지역사회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훌륭한 업적을 쌓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자신이 알기로는 한국사람은 그 지능이 대단히 높다. 이웃 일본민족보다 앞서고 있으며 동양에서 제일가는 우수한 민족이다;
그러므로 조선사람들은 그러한 천재성을 가지는 후진들을 잘 돌보고 키워내면 엄청 발전할 수가 있다. 영재들이 잘 자라고 자신들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주어야 한다. 그리하면 그들이 자라나서 동족들에게 그 보답을 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지 못하고 잘난 인물을 마냥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면 그때에는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모두가 서로를 원망하면서 지리멸렬하여 결국에는 자신들보다 못한 이웃민족에게 종살이를 하기 십상인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아본 선더말 아재는 그 점을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조선이 일본에게 병합이 되었지만 자신들이 잘못하여 나라가 망했다고 가슴을 치면서 통회하는 지도자들이 별로 없었다. 조선의 지도자와 많은 귀족들이 참으로 안이하게도 그동안 중원의 제국을 섬겼으니 이제는 그보다 더 선진화되고 국력이 강한 일본제국을 대신 섬기면 된다고 하는 ‘사대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그러한 사고방식을 무척 싫어한다. 사람이 한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손으로 벌어먹고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자수성가가 수가보다는 훨씬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신 일제가 조선사람들을 가장 많이 착취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이를 악물고 스스로 일어섰기에 그러한 의식이 강하다.
그러므로 선더말 아재는 자신의 자녀들이 그러한 입지전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게다가 그 지능지수가 높다면 자신의 자수성가에 그치지 아니하고 전체 가문과 사회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재물이 사용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한 선더말 아재의 뜻을 과연 그의 아들들이 계승하여 줄 것인가?
혹시 당대에 알아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손수석은 그러한 본을 보여주는 인생을 스스로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자주, 자립, 자강’이라고 하는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자신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일가들이 그리고 고향사람들이 그러한 가치를 실천하면서 살아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형제와 친척들 그리고 인척들의 자립을 도우면서 나아가 지역사회의 발전에 협조를 아끼지 아니하고 있는 이유이다.
한편, 1974년 봄이 되자 서울에 살고 있는 선더말 아재의 차남 손진길은 서울공대 졸업반이다. 그는 이제 조용하게 대학 마지막 학년을 지내고자 한다. 따라서 그동안 서울공대 교회와 회관에서 후배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배를 드리던 일상에 변화를 모색한다. 그는 묵동에 있는 ‘묵동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동시에 중고등학생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반사의 역할을 맡고 있다;
손진길은 이제 서서히 서울공대를 떠나서 사회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시기에 그곳에서 3사람을 만나게 된다. 당시 묵동제일교회의 담임인 최 목사님, 중고등부의 부장을 맡고 있는 원시환 장로님, 그리고 같은 반사로서 수고하고 있는 현 선생님이다. 그 3분은 모두 손진길보다 한참 연배가 높다.
최 목사님은 이북에서 월남하여 서울에서 오래 목회자 생활을 하신 분이다. 1974년 가을에 미국의 한인교회에서 목사로 초빙하자 전가족이 도미를 한다. 그리고 원시환 장로는 안경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의 친형이 육사교회를 오래 섬긴 ‘원익환’ 원로장로이다. 여자 집사인 현선생은 서울 농대에서 ‘현사시나무’ 종자를 개발하여 유명한 현교수의 여동생이며 동시에 손진길의 서울공대기독학생회 2년 후배인 ‘현요한’의 고모이다;
손진길이 그들의 이름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첫째, 월남하여 한국에서 살고 있던 이북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갔는데 그 가운데 특히 이북 출신 목회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미교포 중에 고향이 이북인 분들의 수가 많으며 특히 한인교회에서의 비중이 그러하다. 그들은 한반도가 통일이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것도 미국의 힘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둘째, 원익환 장로님은 육군사관학교의 교수로 계시면서 사관생도들을 육사교회에서 오래 지도하신 분이다. 그는 같은 태릉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서울여대의 ‘고황경’ 학장, 그리고 이웃 공릉동에 있는 서울공대 기독학생회의 지도목사인 ‘오대원’ 선교사와 뜻을 같이하여 ‘나먼저 모임’을 만들었다. 3개 대학 기독학생회의 임원들의 모임인 ‘나먼저’에 손진길이 오래 참석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원익환 장로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셋째, 손진길은 서울농대의 학생이 아니므로 현교수님을 뵌 적이 없다. 하지만 서울공대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현교수님의 아들인 ‘현요한’을 잘 알고 있다. 손진길이 서울공대 3학년으로서 기독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던 1973년 봄에 ‘현요한’과 ‘윤완철’ 등 충현교회 출신들이 서울공대 1학년으로서 교양과정부 기독학생회에 들어와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현요한’이 공대 2학년이 된1974년 봄에 갑자기 손진길에게 상담을 요청한다. 그는 공대공부보다는 광나루에 있는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다. 손진길은 고교동창인 ‘김명용’의 생각이 나서 그에게 조언을 한다; “요한아, 내 친구는 일부러 서울대 영문학과에 진학하여 영어를 공부한 다음에 신학대학원으로 가고자 했다. 너도 공대공부를 마친 다음에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하면 좋지 않겠니?”.
그러나 현요한의 생각은 다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자면 공대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루 빨리 신학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봐요. 소명이 있을 때에 바로 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렇게 서울공대 공부를 접고 광나루 신학대학으로 곧바로 떠나가는 현요한이다. 그의 고모가 1974년 손진길이 주일학교 반사로 일하고 있는 ‘묵동제일교회’에서 역시 중고등학생들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974년 늦은 봄에 휘경교회의 권사님을 통하여 손진길에게 연락이 온다. 그 내용이 중학생에게 혹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줄 수가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과외선생을 원하면 서울대본부에 있는 ‘직업보도실’에 연락하면 된다. 그런데 그러한 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손진길에게 바로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그 학생의 부모님이 권사님과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선더말 아재의 차남인 손진길은 그것이 공대기독학생회 일에서 손을 떼는 방법이 되겠다고 생각하여 과외에 응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시작이 된 휘경동에서의 과외이다. 그런데 그 집에서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부유한 집이라서 그런지 하루에 3시간 동안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당시에 서울공대생들이 하루에 1시간 반 정도 학생을 가르치면 2만원에서 3만원 정도를 수고비로 받고 있다. 하숙비가 1만원 정도이던 시절이므로 그 정도의 보수는 아껴 쓰면 학비까지 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부족하면 입주과외를 하면 된다. 그런데 손진길의 경우에는 그 과외시간이 2배나 된다. 그래서 그 보수도 2배이다. 매달 5만원씩 받고 있다;
그러한 처지인데 고향에 아무 말을 안했더니 부친인 선더말 아재가 매달 5만원씩 송금을 해온다. 3만원만 보내어 주어도 충분한데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보내오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손진길이 이제는 과외를 하고 있으니 돈을 보내지 아니하셔도 된다고 부친에게 말씀을 드린다. 하지만 그와 상관이 없이 선더말 아재가 계속 차남에게 그만한 돈을 보내고 있다.
그런 이유로 졸업반인 손진길에게 여분의 돈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하숙을 같이하고 있는 친구들이 돈을 빌려 달라고 한다. 말로는 하숙비가 부족해서 그렇다고는 하는데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다. 사정이 딱하게 보여서 한두 달 빌려 주었더니 그 돈을 제때에 갚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친한 사이에 딱 부러지게 되돌려 달라고 말할 수도 없다. 결국 돈 문제가 인간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손진길이 결단을 내린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어 친구도 잃고 돈도 잃을 바에는 차라리 사업을 하시는 부친에게 그 돈을 드리자. 내가 과외로 번 돈도 함께 드리자. 지금까지 키워주고 공부를 시켜준 것만 하더라도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손진길은 하숙비를 내고 용돈을 아껴 쓰면서 남는 돈을 전부 부친인 선더말 아재에게 다시 송금하고 만다. 사업을 하다가 보면 돈이 많이 필요하실 것이니 자신이 과외를 하여 번 돈까지 전부 그냥 사용하시라고 말하면서 한꺼번에 보낸 것이다;
그렇게 자기 수중에 남는 돈이 없으니 친구들과의 인간관계에도 신경이 적게 쓰이고 홀가분해서 좋다.
1974년 8월 중순에 서울 여의도에서 기독교계의 큰 행사가 열린다. 그 이름이 ‘Explo 74’이다. 그 뜻은 올해 1974년에 성령의 폭발적인 능력이 한국에서 발생하도록 100만명의 성도들이 여의도에 집합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통성으로 부르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한국에 ‘성령의 계절’이 오도록 하자는 ‘성령운동’의 절정이다;
며칠간 계속이 되는 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손진길이 신청을 했더니 합숙을 하는 장소가 ‘노량진국민학교’이다. 그곳에서 매일 여의도 다리를 건너서 행사장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다;
마침 여의도 근처에 있는 학교들이 여름방학 중이므로 교실을 전부 빌려주고 있다. 그것도 지방에서 온 성도들부터 수용을 하고 있다. 그래서 손진길이 시간을 내어 경주에서 온 성도들을 위하여 배정이 된 학교를 방문해본다.
그 학교에 ‘경주중앙교회’ 팀이 여장을 풀고 있다. 1960년대에 손진길이 경주문화중학교에 다닐 때에 그 교회에 출석을 한 적이 있기에 반갑게 찾아 들어갔더니 마침 여동생 ‘손정애’가 경주여고 학생으로서 그곳에 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그렇게 뜻하지 아니하게 오누이가 서울 여의도 근방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틀 후인 1974년 8월 15일에 큰 사건이 서울에서 발생한다. 여의도에 모여서 기독교 100만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그 시간에 서울의 중심지 남산의 ‘국립극장’에서 대통령 부인이 암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낭독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권총을 발사한다.
괴한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고서 경호원들이 자신들의 몸으로 대통령을 보호한다. 그 순간 탄환이 날아가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맞히고 만 것이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응사를 했는데 어이 없게도 괴한인 문세광을 맞히지 못하고 시민이 희생이 되고 만다. 그 문세광은 일본 교포로서 친북단체의 구성원이라고 한다.
그것으로 남북관계가 급랭하게 된다. 그리고 부인을 잃은 박정희 대통령은 그때부터 술을 벗하며 산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계속 추진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고는 있지만 경제발전의 측면을 제외하고서 보면 별로 치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군부의 반란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 따라서 ‘보안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있으며 자신을 경호하는 ‘경호실장’의 권한이 자꾸만 커지고 있다.
박대통령과 경호실장인 ‘차지철’은 군부내에 자신들의 사조직을 만들고 있다. 정식으로 4년 정규과정을 이수한 육사 11기를 격려하면서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선발하여 돈을 주면서 후배들과 함께 ‘하나회’라고 하는 사조직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그 모임에 들어야 11기 이하 육사의 기수들이 빨리 출세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원방법이 굉장히 은밀하다. 따라서 정보력이 대단한 미국에서도 사전에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Explo 74’는 1년전에 서울 여의도에서 개최가 된 ‘빌리 그래함’의 선교대회를 계승하고자 한 것이다. 참고로 1973년에 여의도에서 개최가 된 그 선교대회의 모습이 다음과 같다;
백만명에 가까운 성도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대성회를 개최하니 온국민의 회개운동이 뜨겁고 성령의 역사가 크게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그러한 대성회를 선호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회개와 하나님의 역사를 갈구한 성경상의 ‘미스바 대성회’를 본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세력을 과시하는 것이 때로는 부작용을 낳는다. 질이 아니라 양을 중시한다는 ‘성장제일주의’의 사고방식에 깊이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보면 성경의 기록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양적인 측면이 탁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질적으로 인간의 경지를 초월하고 있는 영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창조주의 진리체계라고 인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양적인 과시의 시대에서 한단계 더 발전하여야 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전세계적으로 ‘창조성’이 강조가 되고 있으며 그 창조의 힘이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것의 창조’가 세상을 움직이는 ‘키워드’가 되고 있다.
1970년대 중반을 살면서 선더말 아재의 차남인 손진길이 벌써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가 될지는 지금 아무도 모르고 있다. 하기야 그 자신도 모르고 있는 것이 자신의 인생이다. 그것은 누구나 살아보아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일이다. 사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며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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