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82(작성자; 손진길)
부산에서 대구로 가는 열차는 경주를 거쳐서 올라간다. 그러므로 5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이다. 서배 할배 손상훈 부부와 선비 김춘엽 부부 그리고 장인식 교장 부부와 안성기 교장 부부 등 8명이 같은 열차로 대구로 가고 있다. 그렇게 열차여행을 하고 있는 때가 1921년 4월 하순이다.
봄의 향기를 느끼게 되는 좋은 계절이다. 차창문을 조금 열어 두자 봄바람이 시원하게 밀려 들어오고 있다. 기차 내에서는 젊은 역무원이 간식거리를 팔고 있다. 삶은 달걀과 구운 오징어가 배고픔을 달래어 준다. 서로들 그것을 사서 먹으면서 이야기를 한다. 대구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먼저 안성기 교장이 말문을 연다; “저는 1894년에 경주에서 출발하여 충청도와 전라도를 돌아다녀 보았는데 그때에는 기차가 없어서 도보로 다니느라고 정말 고생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차로 가고 있으니 격세지감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서 일동이 고개를 끄떡인다. 안교장이 당시에 동학농민전쟁의 결과가 궁금하여 현지를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안성기 교장이 말을 잇는다; “그런데 대구를 방문한다고 하니 저는 마음이 설렙니다. 그 이유는 경주와 달리 대구는 뜨내기들이 정을 붙이고 능히 살 수가 있는 그런 고장이기 때문이지요…”. 좌중의 인사들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 모습을 보고서 안교장이 설명을 한다; “경주는 신라 6촌의 후손들이 토박이로 많이 살고 있어서 그런지 외지인들이 쉽게 동화되어 살기가 힘이 듭니다. 그와 달리 대구는 외지인들이 많이 몰려 들어서 살아가고 있는 도시이지요. 그래서 영천출신인 고경 오씨, 구미출신인 인동 장씨. 멀리 영주출신인 순흥 안씨들까지 대구에 몰려와서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자 안교장의 부인인 이다연이 한마디를 보탠다; “저는 일본사람들도 대구에 많이 살고 있다고 부산에서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이채령이 안성기 교장에게 질문을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구에 정착을 하고 있는 이유가 단지 토착세력이 별로 없고 텃세가 심하지 않다는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이지요?’.
안교장이 친절하게 대답을 한다; “제가 알기로는 대구가 지니고 있는 세가지 정도의 지리적인 장점 때문이지요. 첫째, 일찍이 ‘달구벌’로 불린 대구는 그 이름 자체가 넓은 들판을 가진 구릉지 곧 높은 지대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서라벌과 비교하여 그렇다는 것이지요. 경주는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유역이 넓지 못하고 또 장마가 지면 물난리가 자주 납니다. 그 들판이 낮기 때문이지요. 그와 달리 대구는 물에 잠기지가 않습니다. 대구 역시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지만 그 들판의 위치가 높기 때문지요. 그리고 그 들판 자체도 서라벌보다 더 넓습니다”;
장시 숨을 돌린 다음에 안교장이 이어서 설명한다; ”둘째, 대구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낙동강이 그 서편에 흐르고 있고 금호강이 그 북편에 흐르고 있어 수로를 타고 많은 물동량을 내륙의 곳곳으로 운송할 수가 있지요. 셋째, 옛날부터 한양에서 부산으로 빨리 갈때에는 반드시 대구를 거쳐서 갑니다. 대구가 육로를 통하여 남으로는 부산을, 북으로는 한양을 갈 수 있는 거점도시이지요. 그러므로 대구가 도로망으로 보자면 영남지방의 관문인 셈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장교장의 부인인 최순옥이 질문을 한다; “그렇게 장점이 많다면 어째서 통일신라가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왕도 서라벌을 버리고 과감하게 삼국을 통치하기에 훨씬 좋은 달구벌로 천도하지 아니한 것인지요? 혹시 알고 계신가요?”. 안교장이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한 질문이 나올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교장의 설명이 다음과 같이 명쾌하다; “한마디로, 경주에 살고 있는 신라의 왕족들과 귀족들의 반대가 엄청났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전부 서라벌에 있기 때문에 달구벌로 천도를 하게 되면 자신들의 기득권과 세력의 기반이 송두리째 사라질 위험이 있으므로 결사 반대를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신문왕 곧 태종 무열왕의 손자인 그가 대구로 천도를 계획하다가 취소하고 말지요…”.
일동이 모두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인식 교장이 말을 한다; “이곳 대구에는 뜨내기들이 많기 때문에 일본식 여관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료깡’이라고 불리고 있는 여관이 조선에도 있지요. 그래서 저희들도 대구역에 도착을 하게 되면 중앙통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서 ‘한성여관’이라고 하는 곳에 여장을 풀 생각입니다. 미리 그 근처에 살고 있는 저희 인동 장씨 친척을 통하여 예약을 해 두었습니다”;
그러자 무엇이 우스운지 김춘엽의 부인인 이가연이 깔깔 웃으면서 말한다; “대구에 여관이 있는데 그 이름이 ‘한성여관’이라고 하니까 좀 우습군요. 조선의 왕도인 ‘한양’을 중국사람들이 ‘한성’으로 부르다가 이제는 일본사람들이 ‘경성’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여전히 여관이름은 ‘한성여관’이라고 짓고 있네요. 옛날 ‘한성’에 살던 조선사람들은 전부 와서 머물라고 하는 의미인가 봅니다…”.
이채령이 맞장구를 친다; “내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그러면 오늘은 우리가 한성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지요. 뭐가 어렵겠습니까? 우리 모두 한성부에서 왔다고 말합시다. 호호호…”.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한양의 이름도 그냥 두지 아니하고 청국과 일제가 정치적인 이유로 바꾸고 있다. 더구나 이제는 장사꾼이 여관의 상호로 사용을 하고 있는 그러한 세상인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대구역에 도착을 한다. 역사를 빠져나오니 인력거들이 많이 광장에 모여 있다. 장인식 교장이 호기스럽게 인력거 4대를 한꺼번에 부른다. 부부당 1대씩이다. 짐을 싣고 사람이 타자 금방 출발을 한다. 장교장이 진작에 중앙통에 있는 ‘한성여관’으로 가자고 말했기에 빠른 속도로 질주를 한다.
4개의 방을 배정하여 그날은 일찍 저녁식사를 하고 쉬도록 한다. 여관에서 제공하는 식사가 꽤 괜찮다. 식사를 마치고 서배 할배의 방에 모두 모여서 담화를 즐기고 있다. 그때 서배 할배 손상훈이 친구 김춘엽에게 묻는다; “춘엽이 자네 딸 김영란이 예전에 대구로 출가를 하지 않았는가? 이번 기회에 한번 찾아보아야 하지 않나?”.
그 말을 듣자 김춘엽이 말한다; “몇 해 전에 사위가 상주로 발령이 나서 이사를 가고 말았다네. 농업기술자가 되다 보니까 그렇게 시골로 발령이 난 것이지. 그곳이 살기가 좋아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너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여관 바깥에서 누가 지나가면서 소리를 지른다; “망개 떡이나 찹쌀떡이요. 망개 떡 사려…”. 처음에는 작은 소리이더니 점점 그 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때 안성기 교장이 주섬주섬 주머니의 지갑을 확인하더니 골목길과 통하는 벽 쪽으로 가서 창문을 열고 소리를 친다; “망개 떡 하나에 얼마요?”. 어깨에 장대를 매고 그 양쪽에 떡판을 달고 있는 청년이 골목으로 나 있는 창문 아래에 선다. 대구 중앙통에서 가까운 여관이므로 그 골목에 여관주인이 가로등을 몇개 설치한 모양이다. 따라서 그 청년의 얼굴이 환하게 보인다. 안교장은 망개 떡 4개와 찹쌀떡 4개를 사서 한 가정에 1조씩 분배한다.
객지의 여관에서 자정이 가까워오는데 야식으로 찹쌀떡과 망개 떡을 먹으니 그것이 별미이다. 같은 찹쌀로 만든 것인데 망개 잎에 싸가지고 쪄서 그런지 그 쫄깃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일본제국이 한편으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식량과 자원을 수탈하고 일본의 상품을 비싸게 팔기에 여념이 없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식의 여관과 간식거리도 널리 유행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여관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대구역사에서 남북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중앙통과 그 동쪽의 골목길을 여기 저기 다녀본다. 대구시내의 중심지가 경주 읍내보다는 훨씬 크고 부산의 시가지보다는 좀 작은 것으로 보인다;
그날 점심은 ‘동성정’의 골목으로 들어가서 대구가 자랑하고 있는 ‘소고기국밥’을 맛보았다;
쇠고기와 도가니를 오래 삶아서 고추가루와 파를 많이 썰어 넣은 그 국밥 맛이 상당히 좋다. 그래서 그런지 훗날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그 ‘동성정’이 ‘동성로’가 되고 ‘소고기국밥’이 좀더 고급스러운 ‘따로 국밥’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통하여 피난민들에게 그 독특한 맛이 인기가 있어서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다음날은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달성공원에 들른다. 그 지역의 토박이는 ‘달성 서씨’이며 본래 그곳에 그들의 세거부락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조선시대에 영남지역을 다스리는 ‘대구감영’이 그곳에 있어서 더 유명하다. 특히 대구감영의 관찰사가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내려다보기 위하여 건축했다는 높은 누각 ‘관풍루’’가 그곳에 있다;
그 주변에는 일본제국이 그들의 국화인 ‘사쿠라’를 많이 심어 놓고 있다. 그들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자신들의 사쿠라 꽃으로 뒤덮기를 원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의 산들이다. 일본사람들이 산의 나무를 마구잡이로 벌채를 하고 말았기에 홍수가 나면 산사태가 빈번하다;
따라서 임시처방으로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빨리 붙들고 있으라고 찔레나무를 산에 많이 심고 특히 아카시아 나무를 그러한 목적으로 마구 심고 있다. 그 일을 하고 있는 일선관청이 소위 ‘사방관리소’이다.
결국 일제에 의하여 조선사람만 수탈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들이 모두 벌거숭이가 되고 있다. 이제는 가시나무가 산을 찌르고 있으니 그 가시에 찔린 산의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조선 천지에 울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한 무자비한 일제가 그 옛날 영남지역을 다스리던 유서 깊은 대구감영의 터전에도 자신들의 벚꽃으로 회칠을 하고 만다. 그렇게 만개하고 있는 사쿠라를 바라보면, 일본제국은 조선을 제2의 일본으로 영원히 지배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착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천황의 상징인 사쿠라 곧 벚꽃의 숨길 수 없는 특징이 화려하게 한꺼번에 빨리 피고 곧 안개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자 일동은 대구를 빨리 떠나 경성으로 가서 조선의 앞날을 한번 짐작해보고 싶다.
따라서 이튿날 그들 8사람은 짐을 챙겨서 대구역으로 이동을 한다. 그날 오후에 경성으로 가는 열차에 짐을 싣고 대구를 떠나게 된다. 과연 조선의 중심인 경성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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