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81(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6. 10:38

서배 할배81(작성자; 손진길)

 

1919년 6월달 경주 성동 김춘엽 선비의 사랑방모임에 참석을 한 장인식 교장과 안성기 교장은 헤어질 때에 자신들의 부산 주소를 서배 할배 손상훈과 김춘엽에게 준다. 그리고 내년은 서배 할배와 김춘엽 두사람이 고희가 되는 해이니 반드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한번 놀러 오라고 초청을 한다.

그렇게 두 선비는 장교장과 안교장의 초청을 받았지만 그 다음해인 1920년에는 그들을 방문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김춘엽 선비의 경우에는 노모께서 별세를 하셨기에 초상을 치르느라고 바빴고 서배 할배의 경우에는 두번째 손자가 태어나는 해라서 나름대로 바빴던 것이다.

며느리 정애라가 배가 많이 불러 있었기에 시어머니인 이채령이 며느리를 대신하여 8살인 손녀 손해선과 4살인 손자 손수정을 돌보고 있다. 그렇지만 6월달에는 사돈 김경화의 친정 노모인 정해옥 여사가 별세를 하였기에 어쩔 수가 없어서 두 손주를 배가 부른 며느리에게 도로 맡겨 두고서 겨우 남편 손상훈과 함께 그 초상에 다녀온 것이다.  

1920년 8월에는 며느리 정애라가 두번째 아들을 순산하였다. 그러므로 시어머니인 이채령은 산모를 도와 애기를 씻기고 또 산모의 산후 몸조리에 신경을 쓰느라고 바빴다. 그렇게 집사람이 바쁘므로 서배 할배 손상훈은 자신이 칠순이라고 하여 잔치를 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러한 속사정은 서배 할배의 친구인 김춘엽도 마찬가지이다. 모친상을 당했기에 고희연에 대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해가 지나가고 1921년이 되자 손상훈이 2월에 성동 사랑방모임에 나가서 김춘엽에게 제안을 한다; “우리 금년 봄에는 한번 장교장과 안교장이 살고 있다고 하는 부산에 부부동반으로 다녀오는 것이 어떠한가? 자네 생각은 어때?”.

김춘엽이 마치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나 한 것처럼 즉석에서 답을 한다; “서배 할배 나도 좋으이. 우리가 작년에는 칠순인데 집안에 바쁜 일들이 많아서 고희연을 모두 못했으니 금년에는 칠순기념으로 부부동반하여 국내여행이나 한번 하자구…”.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이채령과 이가연이 한쪽에서 자기들끼리 의논을 한다. 그러더니 나중에 구체적인 의견을 이채령이 대표로 제시한다; “저희 둘이 상의를 한 결과 금년 봄에는 부산만 여행하지를 말고 아예 넉넉하게 시간을 마련하여 몇 군데를 더 돌아보았으면 좋겠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어요. 구체적으로, 대구와 한성은 물론이고요 가능하면 만주와 중국의 상해까지 한번 가보면 좋겠어요…”.

서배 할배 손상훈과 김춘엽은 칠순잔치를 대신하여 기껏 부산을 여행하는 것으로 생각했더니 부인들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다. 조선의 3대도시는 물론이고 아예 중국까지 살펴보자고 한다. 부인들의 생각의 범주가 남편들의 범위보다 더 넓다. 역시 조선사람들은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대담한 것일까?

남편들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고서 이번에는 이가연이 말을 한다; “저희 두사람의 생각은 그래요. 더 나이가 들면 칠십이 넘은 남편들과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이 힘들게 될 것이니 지금 이 정도 건강이라도 있을 때 조선반도는 물론이고 중국 대륙까지 한번 둘러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거예요. 저희들도 나이가 더 들면 가고 싶어도 그런 곳을 갈 수가 없답니다”.

들고 보니 옳은 말이다. 그리고 1901년에는 일본을 덕천 사랑방모임의 5부부가 한달 가까이 여행을 했는데 이제는 20년 세월이 흘렀으니 반도와 대륙을 한번 둘러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개화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또한 일제가 건설을 한 철도로 외국까지 여행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1921년 4월 하순에 두가정이 먼저 부산을 방문한다. 그곳에 장교장과 안교장이 이웃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떠나는 날 먼저 서배 할배가 부인 이채령과 함께 30리길을 걸어 경주 읍내 김춘엽의 집으로 간다. 그들 모두는 부부동반으로 함께 경주역사에 가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기차는 빠르고도 정확하다. 3시간 남짓 지나자 부산역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마중을 나온 안성기 교장을 만난다. 미리 전보를 쳐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날 안성기 교장은 그들 두 부부를 인도하여 부산항 가까이에 있는 주택가로 들어선다. 그들이 그 주택가에 살고 있다. 그 위치는 배를 타면 건너편 영도 섬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곳이다;

맞은 편 영도 섬을 건너다 보면서 안성기 교장이 간략하게 설명을 한다; “영도 섬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개발이 되어 한때 많은 일본사람들이 그곳에서 살았지요…”;

그리고 안성기 교장은 일본인들이 싱싱한 해산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제주도의 해녀들이 부산 영도로 몰려와서 해산물을 채취하여 그들에게 팔았다고 말한다;

그날 안교장은 자신의 집으로 서배 할배와 김선비의 부부를 안내한다. 그 집에 벌써 장교장 내외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4가정은 그날 다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1919년 6월에 헤어지고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니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러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저녁식사를 함께하면서 장교장이 말한다; “이곳은 영도 섬과 마주 보고 있는 지역입니다. 영도 섬이 현해탄의 파도를 막아 주고 있기에 이곳에 부산의 항구가 들어서 있지요. 고마운 영도 섬은 본래 ‘절영도’라고 불린 곳입니다. 중국의 황제들이 조선의 왕들에게 바다로 진출하지 말라고 쇄국정책을 명했기에 조선은 영도 섬의 가치를 모르고 살았지요”.

안성기 교장이 장교장의 설명을 보충한다; “역사적으로 조선은 군마를 키우고 바다를 지키는 요새로만 절영도를 사용했지요. 그런데 1876년에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은 다음에는 획기적으로 달라집니다. 일본사람들이 조선사람이 별로 살지 않고 있는 영도를 개발하여 자신들의 섬으로 만든 것이지요”.

안교장의 말에 이어서 이번에는 장교장이 다시 설명을 한다; “부산항은 그 앞에 영도 섬이 있기 때문에 절묘하게도 항구로서의 값어치가 풍성합니다. 세찬 현해탄의 파도를 영도 섬이 그 몸으로 막아 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육지에서 좀 떨어진 섬이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이 그 섬에 대규모로 살고 있으면 조선사람들의 위협을 덜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렇다. 1876년 일본이 조선과 처음으로 강화조약을 맺었을 때에는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일본의 군사력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막상 조선에 오게 되면 조선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이다. 그러니 부산에 일본사람들이 들어와서 살더라도 영도 섬에 집중적으로 주거지를 형성하는 것이 안전한 것이다.

그렇지만 1921년인 지금은 그것이 아니다. 수많은 일본의 물동량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부산항으로 곧바로 들어오고 있다. 그러므로 부산항이야 말로 무역의 본거지가 되고 있다. 그러한 잇점 때문에 일본에서 10년 이상 살면서 중학교까지 다닌 장교장과 안교장이 항구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 통역의 일거리가 그곳에 많은 것이다.

다음날부터 서배 할배 손상훈 부부와 김춘엽 선비의 부부는 장인식 교장 부부 및 안성기 교장 부부와 함께 부산의 이곳저곳을 함께 관광한다. 부산시내의 상점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물건이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부산은 신작로가 참으로 잘 닦여져 있다.

신작로의 특징은 땅을 잘 다져 놓아 우마차가 다녀도 별로 출렁거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평평하게 신작로를 만들어야 자동차가 편하게 다닐 수가 있고 속력을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작로의 가로수로 포플라 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를 많이 심고 있다;

 특히 따뜻한 부산에는 벚꽃나무가 많다. ‘일본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그런가?’하고 이채령이 생각을 한다. 그녀가 일본에서 ‘사쿠라’라고 불리는 그 벚꽃나무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산사람들은 굉장히 개방적인 것 같다. 상투에 갓을 쓴 사람들보다는 서양식 머리를 하고 모자를 쓴 남녀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부산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과 조선의 중간쯤 되는 도시로 보인다. 아무래도 서양의 바람은 부산에서부터 조선반도로 불어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날 4부부 8사람은 그 옛날 동경에서처럼 부산 시내에 있는 빵집에 들어가서 팥빵과 사라다 빵 종류를 먹어본다;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불란서의 빵을 흉내 내어 만든 ‘바게트’ 빵의 맛도 다시 본다.  그들은 그 빵의 맛을 보면서 어느 사이에 그 옛날의 추억에 젖고 있다;

누구나 젊은 시절이 지나고 나면 나이가 들어서 그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만든 그 빵의 맛을 부산에서 다시 맛보니 20년 전에 일본의 동경에서 맛보던 바로 그 맛을 즐길 수가 있다. 따라서 8사람은 자신들의 입맛이 늙지 아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즐거워한다.

인생의 낙이란 것이 무엇일까?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그 옛날에 맛보았던 그 음식을 먹으면서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저 혼자 스스로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되돌리거나 붙들어 둘 수는 없지만 그 옛날의 기억과 아름다운 추억은 그렇게 반추를 할 수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한 젊은 날의 기쁨을 되살려준 그곳이 바로 부산이다. 그리고 부산의 시가지 풍경은 20년 전에 그들이 오사카에서 보았던 그 풍물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조선말로 적혀져 있는 그 간판을 일본말로 바꾸어 버린다고 하면 부산의 시가지 풍경은 거의 20년전 일본의 오사카와 흡사하다고 하겠다.

이틀간 부산 시내를 구경하러 다니는 동안에 하루는 안교장의 집에서 묵고 또 하루는 장교장의 집에서 묵었다. 그런데 재미가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집이 모두 일본식으로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들이 그런 집에 살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여 이채령이 물어본다; “한옥이 아니라 일본식 집에 살고 계시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장인식 교장의 부인인 최순옥이 답변을 한다; “아 그거요. 그것은 영업상 그런 거예요. 장교장이 이곳에서 주로 통역일을 하고 있는데 주 고객이 일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일본식 집에 살고 있으므로 편한 마음으로 찾아온답니다. 그들이 조선말을 잘 하지 못하기에 그들의 사업을 우리 장교장이 일본말로 도와주고 있지요”.

일본사람들이 조선에 와서 살면서 장사를 하고 있지만 역시 그들은 다다미 방이 있는 일본식 집이 편한가보다. 그러니 같은 값이면 일본식 집에 살고 있는 조선사람에게 자신들의 거래상 통역업무를 의뢰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장교장과 안교장이 이곳 부산진에 살고 있으며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지 일순간에 이해가 되고 있다.

이틀동안 그들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이채령과 이가연이 최순옥과 이다연에게 제안을 한다. 함께 대구를 들러 한성까지 한번 여행을 해보자고 한다. 그 말을 듣고서 최순옥과 이다연은 남편들을 설득한다. 나이가 들어가면 부인말에 꼼짝을 못하는 것이 조선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함께 열차를 타고 대구로 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