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히스기야(손진길 작성)

소설 히스기야1(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0. 3. 17. 08:20


소설 히스기야1(작성자; 손진길)

 

1.    선지자 이사야가 바라본 웃시야 시대와 왕자 히스기야의 입장

 

이스라엘왕국의 제2대 국왕이 된 다윗은 정복전쟁을 시작하여 주전 996년경에 중동에서 거대한 제국을 완성한다. 다윗왕이 건설한 이스라엘제국은 유프라테스강의 서쪽에서부터 나일강의 동쪽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예언이 역사가운데 실현된 것을 의미하고 있다;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15:18).

하지만 다윗의 후계자인 솔로몬왕이 전반기에는 부왕인 다윗의 유언을 받들어 여호와를 잘 섬기다가 후반기에는 스스로 교만하여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향락과 영광에 도취가 되어 그만 유다지파를 제외한 기타 지파에게 너무나 과중한 부담을 지우고 만다.

그 때문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 밖에 나게 되어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그 다음해인 주전 930년에 이스라엘제국이 두개의 왕국으로 쪼개어진다. 북쪽에는 여로보암의 이스라엘왕국이 성립되고 남쪽에는 다윗왕조의 유다왕국이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에 의하여 존립하게 된다.

그런데 남북조시대에 외생적인 여건의 변화로 인하여 뜻밖에도 한차례 부흥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주전 760년을 전후하여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강대국인 앗수르우라르투가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계속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동북지역에서 생사를 건 혈투를 한창 벌이고 있는 강대국 앗수르가 서쪽의 시리아지역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 틈에 북조 이스라엘왕국의 여로보암2가 마치 빈집을 차지하듯이 북쪽과 동쪽으로 영토를 크게 넓힌다. 동시에 남조 유다왕국의 웃시야왕도 동쪽과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고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웃시야왕 말기부터 선지자 이사야가 나타나서 그 시대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군사적 경제적인 번영이 도리어 여호와신앙에 있어서 엄청난 퇴보를 초래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입장은 여로보암2세 시대를 비판하고 있는 북조 이스라엘의 선지자 호세아와 같은 것이다.

웃시야왕의 뒤를 이은 요담왕과 그 다음 아하스왕이 모두 경제적 번영에 취하여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물질적인 성공과 번영의 지속을 소원하면서 그들은 하나같이 우상을 섬기고 강대국의 힘을 빌려서 손쉽게 왕국의 안보를 도모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나라 다윗왕조 유다왕국을 보전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왕과 신민들이 진심으로 창조주 여호와의 공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종으로서 하나님의 높은 뜻을 실천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여호와를 의지하여 자주국방의 토대를 마련해야만 한다.

그런데 북쪽에 있는 아람왕국과 이스라엘왕국이 연합하여 유다왕국으로 쳐들어올 때에 히스기야 왕자의 부친인 아하스왕이 엄청난 잘못을 외교적으로 범하고 만다. 그것이 메소포타미아의 패권국이 된 강대국 앗수르에게 겁도 없이 원군을 요청한 것이다.

이리를 피하려고 호랑이를 가까이 불러들이는 어리석음을 주전 734년에 유다왕 아하스가 범하고 만 것이다. 그때 앗수르제국의 황제인 디글랏 빌레셀3(재위 주전 745-727)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왜냐하면, 영웅왕인 디글랏 빌레셀3세는 즉위하자 마자 동북면의 강대국 우라르투왕국을 물리치고 이제는 서서히 서쪽으로 진출하고자 눈을 돌리고 있는데 때마침 유다왕이 원군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므로 즉시 대군을 이끌고 정벌에 나선다. 그 결과 주전 733년에 다메섹을 정복하고 아람왕국을 멸망시키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면 앗수르의 군대가 남진을 할 것인데 그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순진하게도 아하스왕은 다메섹으로 가서 디글랏 빌레셀 황제를 만난다. 그리고 동맹관계를 재확인하면서 함께 축배를 든다.

아하스왕은 참으로 어리석다. 왜냐하면, 앗수르가 다메섹에 세운 우상을 섬기는 큰 제단을 보고 그것이 부러워서 예루살렘에 그러한 제단을 마련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형편없는 모습을 보면서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혀를 차신다. 그래서 아하스왕의 아들인 왕자 히스기야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고 계신다.  

당시 다메섹을 점령한 영웅왕 디글락 빌레셀3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는 차제에 이스라엘왕국과 유다왕국 그리고 에돔왕국을 차례로 점령하고 나아가서 나일강의 애굽제국까지 정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발판이 되는 다메섹에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와 제도를 이식하여 앗수르의 도시로 만들고 아울러 대군을 주둔시킨다.

 30만명 이상의 앗수르 병력이 추가로 다메섹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그때서야 유다왕 아하스가 눈치를 채고 있다; “이거 큰일났구나. 앗수르가 아람왕국만 정벌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왕국을 치고 그 다음에 우리 유다왕국을 정복하고자 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

아하스왕은 비겁하게도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한다. 그는 역사적인 죄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주전 728년에 돌연 왕좌를 13살이 되어가는 왕자 히스기야에게 양위하고 스스로 상왕이 된다. 그리고 아하스는 상왕이 되어 히스기야가 25세가 될 때까지 신왕의 이름으로 통치를 계속한다.

그 결과 주전 722년에 앗수르의 사르곤2가 북조 이스라엘왕국을 멸망시키는 해를 히스기야왕 6이라고 이스라엘의 역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왕하18:10-11). 하지만 그 시기는 사실상 아하스왕이 상왕으로서 국정을 뒤에서 요리하던 시기로 보인다.

25세가 될 때까지 히스기야는 부왕 아하스의 그늘에서 시달림을 당했다. 그래서 주전 715년에 독자적으로 유다왕국을 통치할 수 있게 되자 부왕 아하스와는 전혀 다른 정책을 추진한다. 그것이 바로 유다왕국에서 여호와신앙을 바로 세우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우상을 섬기고 예루살렘성전을 거의 폐쇄하다시피 한 악한 왕 아하스를 본받지 아니하고 히스기야왕이 여호와신앙을 올바로 세우고자 한 것은 다분히 그의 모친인 스가리야의 딸 아비의 덕택이다. 일명 스가랴라고도 불리고 있는 스가리야는 웃시야왕 때 활동한 유명한 선지자인 것이다(대하26:5).

당시의 기록을 열왕기하 제18장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한갓 놋조각에 불과하다는 의미임)이라 일컬었더라”(왕하18:3-4).

히스기야는 강대국 앗수르를 섬기는 외교 및 국방정책을 혁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여 자주국방을 실천한다. 그 결과 그는 군사력으로 블레셋을 치고 국방을 튼튼히 하게 된다.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앗수르의 왕 사르곤2가 주전 705년에 서거하자 그의 아들인 산헤립이 새로운 황제가 된다. 젊은 신왕 산헤립은 부왕이 이스라엘왕국을 정복하였으므로 자신은 다윗왕조의 유다왕국을 정복하는 위업을 달성하고자 한다.

그래서 주전 701년에 2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유다왕국으로 쳐들어온다. 히스기야왕의 유다군사들이 앗수르의 강군 앞에서 힘을 쓰지를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전투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유다왕국의 여러 성읍이 앗수르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이제는 왕도인 예루살렘마저 위협을 받게 된다. 그때 히스기야왕이 너무나 화급하여 그만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그 대신에 히스기야왕은 어떠한 선택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 결과가 역사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