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1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14. 15:20

로마서 강해 제113(16:21-2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4 23(주일)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현지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16:21-24);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로마교회와 모든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인물 8명은 지금 바울 자신과 함께 고린도에 있는 동역자들입니다. 실명(實名)만 계산하더라도 35명이나 되는 많은 믿음의 동지들을 소개하면서 사도 바울이 어째서 지금 자신과 함께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을 제일 나중에 인사를 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두가지로 보입니다; ①첫째, 동양적인 겸양의 자세로 보입니다. 남처럼 멀리 있는 사람들을 먼저 언급하면서 높이고 그 다음에 자신과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소개한다고 하는 것이 자신을 낮추는 예의범절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②둘째, 전통적인 고대사회의 인사법이 그러합니다. 먼저 어른들의 안부부터 묻습니다. 나중에 자신 앞에 서있는 당사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입니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자신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범위를 넓혀가면서 소개를 하고 있는 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작성하고 있는 시대가 고대이며 그 장소가 그리스 반도의 최남단의 항구도시인 고린도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당장 이 서신을 받아보게 되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중심으로 생각하여 사도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들을 대체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됩니다; ①첫째, 로마시에 들어가 있거나 그곳에 살고 있는 성도들, ②둘째,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반도에 살고 있는 성도들, ③셋째,  소아시아와 시리아에 살고 있는 성도들, ④넷째, 지금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의 순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순서로 선교의 열정이 있으며 헌신적인 성도들을, 그것도 무려 35명이 넘는 동역자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①첫째, 그들에게 로마교회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문안을 하고 영적인 사귐을 가지게 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는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그들과의 영적인 교류를 통하여 부디 함께 로마시에서부터 서바나까지 이르는 서유럽선교를 마무리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가 원하고 있는 이태리의 로마가 아니라 정반대로 동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당도하게 되면 그곳에서 유대주의자 등 자신을 반대하고 있는 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그들의 의혹에 대하여 해명을 해야만 합니다. 그들이 순순히 바울의 진심을 알아줄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차제에 자신을 정죄하고 처형하고자 할 것입니다(20:25, 21:11, 21-22).

사도 바울이 다시 선교여행을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미구에 예루살렘에서 발생하게 된다고 한다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곧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대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16:20) 바울은 그 일이 걱정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받아보게 되는 로마교회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아무쪼록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인물들과 상의하여 바울 자기 대신에 지중해 끝까지 세계선교를 완성해달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자신과 함께 고린도에 머물고 있는 동역자들을 독자들에게 인사를 시키고자 합니다. 따라서 그 표현이 지금까지 당신들이 누구 누구에게 문안하라”(16:3-16)는 것과는 달리 누구 누구가 당신들에게 문안한다”(16:21-23)는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또 하나 본문의 두드러진 특징은 8명의 인물에 대하여 성경에서 또다시 언급이 되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6:21);

(1)  사도 바울은 디모데, 누기오, 야손, 소시바더 등을 모두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6:21a). 바울과 뜻을 함께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4명의 동역자 가운데에는 젊은 복음의 일꾼 디모데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2)  디모데는 부친이 헬라인입니다(16:1). 그리고 나머지 3명은 사도 바울이 나의 친척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진짜 친척이거나 아니면 선민 유대인들입니다(16:21b). 따라서 복음의 일꾼 선교의 일꾼이 되는데 있어서는 이방인이거나 선민이거나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3)  그들 4명은 지금 모두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을 로마서를 받아 보게 되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인사를 시키고자 합니다;

1)    그 표현이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6:21c)는 것입니다. 그러한 표현은 지금까지 사용한 표현, “(누구에게) 문안하라”(16:3-16)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2)    바울이 지금까지는 로마서의 독자들에게 바울 자신과 떨어져서 살고 있는 헌신적인 성도들에게 문안하고 서로 친교를 하도록 하라고 권면하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자신과 함께 있는 성도들이 독자들에게 문안인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디모데와 바울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1)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 초기에 소아시아 루스드라에서 만나서 선교여행에 동행을 시키고 있는 젊은이입니다(16:1). 젊은 선교일꾼을 키우기를 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개설한 성경공부반에 디모데를 참여시키고 있습니다(18:5, 11, 19:8-10). 그리고나서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갈 때에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의 목회를 맡기고 있습니다(딤전1:3).

2)    누기오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두 사람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①한 사람은 시리아 안디옥교회의 장로인 구레네 사람 루기오입니다(13:1). ②또 한 사람은 사랑하는 의원 누가입니다(4:14, 딤후4:11, 1:24). 그 가운데 의사 누가가 누기오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첫째, 주후 47년경 시리아의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서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할 당시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벌써 나이가 많은 원로입니다(13:1-3). 주후 33년경 집사 스데반이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당하자 시리아 안디옥까지 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구레네 사람들이 있는데 루기오가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11:19-21). ②둘째, 의사 누가는 골로새와 로마에서 사도 바울과 감옥생활을 함께할 정도로 계속 선교여행에 동행하고 있는 동역자입니다. 그렇지만 원로 루기오는 나이가 많기에 그렇게 여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겠습니다.

3)    야손은 사도 바울이 마케도니아의 큰 도시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당에서 만난 유대인 교포입니다(17:1-3). 그는 바울의 복음을 듣고서 그를 따라 고난에 참여하고 선교의 동역자가 되고 있습니다(17:5-9, 16:21).

4)    소시바더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이웃도시인 뵈뢰아의 회당에서 만난 유대인 교포 소바더로 보입니다(17:10-12, 20:4). 그는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행을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바울이 저술할 때에도 함께 있었으며(16:21) 그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소아시아로 넘어갈 때에도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20:3-4).

둘째로,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16:22); 더디오에 대한 언급이 이곳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신원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그는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의 글을 대필(代筆, 대신 기록함)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헬라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헬라어를 잘 알고 있는데 어째서 더디오가 대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사도 바울이 원본과 여러 개의 사본을 동시에 만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본은 고린도의 인근인 겐그레아에 교회를 개척한 바가 있는 헌신적인 여집사 뵈뵈 편으로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냅니다(16:1-2). 그리고 여러 개의 사본은 사도 바울이 지니고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초대교회에 전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6:23);

(1)  가이오는 고린도교회를 자신의 집에 세우고 선교사들을 자신의 집에서 대접하고 있는 현지교회의 유력한 인물입니다(고전1:2, 14). 따라서 옛날 번역에서는 가이오에 대하여 한국식으로 알기 쉽게 식주인’(食主人)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의 집에 숙식을 하는 선교사들이 바로 식객’(食客)입니다. 식주인의 도움이 있기에 숙박시설이 없는 고대 로마사회에서 선교사들이 안심하고 여행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세계에서는 식주인들을 후견자또는 보호자’(benefactor)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의 가이오는 고린도 사람이므로 마케도니아 사람인 가이오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 이름만 같고 다른 사람)입니다(19:29).

(2)  2차 선교 당시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그곳의 회당장 그리스보에게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18:8, 고전1:14). 그리고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의 집에 함께 살던 바울이 회당에 가까운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있습니다(18:3, 7). 그러므로 고린도에서의 식주인인 가이오는 디도 유스도일 가능성이 크다고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적 타당성이 엿보이는 논리적인 추론이라고 하겠습니다.

(3)  고린도의 재무관인 에라스도가(16:23) 과연 사도 바울과 선교여행을 같이하고 있는 젊은이 에라스도와 동일인물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명이인으로 보입니다; ①첫째, 고린도와 같은 대도시 그것도 바울이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16:23)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공무에 바쁜 그가 수년간 자리를 비우고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19:22, 딤후4:20). ②둘째, 사도 바울이 마치 디모데처럼 에라스도를 편하게 심부름을 시키고 있습니다(19:22). 아무리 사도 바울이 영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개 성의 재무관을 그렇게 함부로 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4)  형제 구아도는 누구일까요? 여기에서만 사도 바울이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1)    그런데 바울이 형제 구아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젊은 성도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아도는 고린도에 살고 있는 청년일 가능성이 큽니다.

2)    혹시 사도 바울이 구아도라고 부르고 있는 청년을(16:23) 의사 누가가 에라스도라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19:22) 고대사회에서는 두개의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3)    그 영향으로 사도 바울도 훗날 로마의 감옥에서는 구아도에라스도라고 부르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딤후4:20). 참고로, 바울이 작성하고 있는 디모데후서 제4장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에라스도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나니”(딤후4:20).

4)    그것은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에라스도가 고린도 사람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감옥에 의사 누가가 바울과 함께 갇혀 있으면서 에라스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딤후4:11).

넷째로,없음. (그러나 어떤 사본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에게 있을지어다. 아멘”(16:24);

(1)  로마서 제16장에서 사도 바울은 벌써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6:20)라고 축복의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본에서는 제24절에서 또 한번의 인사말을 적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필요가 없는 중복입니다. 따라서 주로 생략을 하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없음입니다(16:24).

(2)  참고로, 그렇게 생략을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이 되는 이유는 제27절의 축도의 내용이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전체의 인사를 확실하게 마무리하고 있으므로 도중에 들어 있는 제24절은 의미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이 서로 문안하며 영적인 교제를 가지고 합력하여 세계선교를 마무리해주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전하게 되면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성도들의 부활 승천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기쁨으로 모든 동역자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형제 자매로 더불어 영생을 누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망과 소원이 있기에 사도 바울이 오랜 이방선교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젊은 세대를 복음으로 훈련을 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인들의 교회에 젊은이들이 너무 적다고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사도 바울처럼 이방인 선교를 그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여행을 통하여 그들 젊은이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훈련을 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모범과 솔선수범이 없이 후세대가 바르게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가서 물고기를 잡겠다고 하는 어리석음)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복음의 생활화와 선교의 사명에 솔선수범함으로써 후세대를 확실하게 양성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