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0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12. 12:29

로마서 강해 제109(16:11-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4 19()

 

사도 바울이 친척인 헤로디온, 나깃수의 가족 중 신자들, 수고가 큰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그리고 버시, 루포와 그의 어머니까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16:11-13)

 

본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용어는 친척가족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사도 바울에 의하여 새로운 관계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내 친척’,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 ‘주 안에서 수고한’,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등입니다. 그와 같이 사도 바울이 글을 적고 있는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다음과 같이 우선적으로 살펴봅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의 다메섹 회심을 주후 33년경이라고 본다면 그의 공생애는 10년 후인 주후 43년쯤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예루살렘총회에서 바나바를 시리아 안디옥교회의 담임으로 파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22).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을 말씀의 반석위에 세우기 위하여 그가 진작부터 주목하고 있던 인물 곧 하나님의 복음을 이론적으로 깊이 연구하고 있는 랍비 사울을 찾게 됩니다(9:26-30, 11:25-26). 당시 사울은 고향이 있는 소아시아 길리기아 다소에서 히브리정경의 메시아사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교훈을 비교하면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의미를 10년 동안이나 규명하고 있습니다(9:30, 1:17-24).

(2)  둘째, 바나바가 멀리 시리아 안디옥에서 다소 성까지 자신을 찾아오자 랍비 사울은 그와 함께 안디옥교회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담임목사인 바나바를 도와서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가르치게 됩니다(11:26). 바나바의 섬기는 리더십과 바울의 복음적인 가르침이 함께하자 안디옥교회는 더 크게 부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있는 성도들이 유대교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유대교에는 예루살렘에 선민 유대인들의 성전이 있고 그들의 독특한 제사의식이 있지만 교회의 성도들은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없으며 말씀중심의 예배와 성찬식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2)    둘째, 유대인들이 국내외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회당에서는 안식일에 히브리정경을 읽고 랍비들이 모세의 오경인 율법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달리 교회에서는 똑같이 히브리정경을 읽지만 담임목사와 성경선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가 된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와 만민구원의 복음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회당에서는 산술적으로 단 하나인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키시고 유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주신 언약 및 율법만을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하는 자는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 없이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고 구원으로 나아가는 거듭난 성도의 삶을 살 수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4)    넷째, 그와 같이 교회에서 가르치며 선포하고 있는 복음의 말씀이 유대교의 회당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확연하게 구별이 되자 비로소 시리아 안디옥에서부터 이방인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을 회당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과 구별하여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11:26).

(3)  셋째, 바나바와 사울이 4년간 안디옥교회를 섬겨서 말씀의 반석위에 굳건하게 세우게 되자 새로운 변화가 발생합니다. 교회의 장로들이 함께 기도하면서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인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13:1-3). 그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예루살렘교회에서만 사도들을 선교사로 파송했는데 이제는 이방 땅의 교회가 처음으로 모교회가 되어서 자체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디옥에서 이방인선교를 위하여 파송한 그 두 사람을 후속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랍비 사울은 바나바의 고향이 있는 구브로 섬에서 그와 함께 선교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라고 바꾸고 있습니다(13:7-9). 그 의미는 이제 이방인선교사로 교회를 개척하면서 남은 인생을 성도들을 섬기는 작은 자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결심으로 보입니다.

(4)  넷째, 12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3 6개월간 공생애를 지내면서 복음사역을 함께한 제자들입니다(22:28, 6:66-68, 1:21-22). 그런데 그들이 초대교회를 건설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느라고 자신들의 공생애를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선례를 후속 사도로 불리게 된 바나바와 바울이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14:3). 그렇다면 그들 사도들이 복음사역과 선교 여행이라고 하는 공생애를 살아가면서 어떠한 가족과 친척의 관념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그 점이 본문과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사항입니다;

1)    한 마디로, 사도들은 공생애 당시의 예수님의 가족관’(家族觀, view of family,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념)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5).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아브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이방 땅 가나안으로 온 족속에게 하나님의 큰 복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로 훌쩍 길을 떠난 것처럼(12:1-5, 20:7) 그렇게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3:21-23). 그때부터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함께 거듭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자신의 새로운 가족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훗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을 함께 누리게 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원한 형제와 자매들이 맞습니다.

2)    성도들은 예수님의 공생애적인 삶을 계승하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족관도 예수님을 닮아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본문에서 그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을 자신의 형제이며 자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6:11-13). ②그 가운데에는 진짜 친척도 있을 수 있으며(16:11a) 다른 사람의 어머니이지만 사도 바울에게는 영적인 어머니가 되고 있는 여인도 있습니다(16:13). ③그리고 아직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는 자들을 구별하여 글을 적고 있기도 합니다(16:11b).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16:11);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16:11a); ‘헤로디온에 대한 언급은 본문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헤로디온을 자신의 친척이라고 소개하면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그에게 문안하고 영적인 교제를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과 관련하여 두가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①하나는 헬라어로 친척이라고 하는 신제네이스’(syngeneis)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바로 앞절에서 아리스도불로에게 문안하라”(16:10)고 언급하면서 헤로디온의 이야기를 곧바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상관성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1)    전통적으로 사도 바울이 내 친척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는 그 해석이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진짜 혈통적인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친척의 범위를 동족까지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그 범위를 넓혀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친척이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 syngeneis가 친척, 친족, 동족의 뜻으로까지 확장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러한 의미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제9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9:3-4). 자신의 형제와 친척 나아가서 동포들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심정을 그렇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척이라는 용어에는 자신의 동족이 모두 포함이 되기도 합니다.

2)    그렇지만 여기 로마서 제16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그렇게 성도들을 선민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별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유대주의자들처럼 양분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친척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구원하여 자신의 동역자로 삼아 주셨는가 하는 그 점입니다. 바울이 이방인 사도로 열심히 사역에 전심전력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제와 친척을 구원하기를 소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아시고서 그들을 많이 구원하여 성도로 그리고 자신의 동역자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의 성도들이나 여러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바울처럼 온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으로 살아감으로써 그 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3)    헤롯 왕가는 이두매 출신의 왕가입니다. 그들은 본래 에돔 족속입니다. 그런데 주전 2세기에 하스모니안 왕조에 의하여 전멸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유대교를 믿기로 하고 일부가 가나안 남쪽 국경 근처에서 이두매 족속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 출중한 인물 안티파트와 그 아들 헤롯이 나타나 동진해오는 로마의 세력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하스모니안 왕가를 끝내고 유대인들의 땅에 헤롯의 왕가를 출범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헤롯의 왕족들은 동족인 이두매 출신과 피지배족속인 유대 출신을 모두 부하로 삼고 있습니다.

4)    로마시에서 살고 있는 헤롯의 왕족인 아리스도불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집에는 이두매 사람 뿐만 아니라 유대인 부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사도 바울의 친척인 헤로디온으로 보입니다. 헤로디온이 기독교인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친척인 헤로디온을 통하여 아리스도불로를 알게 되고 그에게 일찍이 헬라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아리스도불로의 권속”(16:10)이라고 하는 말 가운데에는 당연히 바울의 친척인 헤로디온이 우선적으로 포함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6:11a).

(2)  나깃수의 가족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16:11b); 주인이 기독교인이 되면 그의 가족과 종들이 모두 교회에 출석할 수 있고 성도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가족이나 종이란 가장인 주인의 소유물이므로 그러한 관행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왕이 기독교인이 되면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성도가 됩니다. 그와 같은 고대사회의 전통을 알게 되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나깃수의 집안에서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짐작할 수가 있게 됩니다;

1)    첫째, ‘나깃수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학자들이 두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그가 누구인지 달리 말하고 있는 성경의 구절이 없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당시에 권력자 가운데 악명이 높은 나깃수하고 하는 자가 있는데 그를 말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2)    둘째, 나깃수는 특정 종교를 가족이나 종들에게 강요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의 가족 중에 주 안에서 성도로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16:11b). 그 말은 나깃수가 그의 종들까지 교회에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종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여 일을 적게 하게 되면 자신에게 손해가 발생할 것이므로 성도가 아닌 주인이 종들에게 그러한 자유까지 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면 종들은 주인 몰래 교회에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고달프고 힘든 삶입니다.

3)    셋째, 나깃수의 수하와 비교할 때 아리스도불로의 신하로 살아가고 있는 사도 바울의 친척인 헤로디온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인이 성도이기 때문에 헤로디온이 더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며 전도생활까지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나 종들이 교회의 성도가 된 경우에는 자신들의 주인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기독교인이 되도록 얼마나 열심히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둘째로,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16:12); 사도 바울이 여자 성도 가운데 3사람을 묶어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생활에서 모범이 되고 있는 그들 여성도들의 헌신을 본받으라고 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①하나는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16:12a)입니다. 또 하나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16:12b)입니다. 그 의미의 차이를 살펴봅니다;

(1)  사실 주 안에서 수고한 자매 누구라고 하는 것으로 충분한 표현입니다(16:12a). 그것은 아름다운 헌신의 여성도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들의 모범을 본받으라고 하는 의미에서 그들에게 문안하라고 적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버시의 경우에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16:12b)라고 적고 있는 것일까요?

(2)  사도 바울은 젊은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주님 안에서 헌신하고 봉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선교여행을 하면서 항상 젊은이들에게 더 많이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쳐주고 복음의 큰 일꾼으로 세우고 싶어합니다. 장차 그들이 대를 이어서 이방인선교를 계승해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바울이 젊은 자매 버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3)  사도 바울은 장차 버시가 잘 성장하여 그 옛날 막달라 마리아처럼 초대교회의 역사에 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버시에 대한 애정 어린 격려와 소망의 말로써 다음과 같이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16:12b). 구체적으로, 바울이 버시를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소개하면서 수고를 많이 하고 있으며 주님 안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자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16:13); 골고다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께 실질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시몬이라고 하는 구레네 사람입니다. 시몬에 대하여 공관복음에서 공히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그의 아들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15:21). 시몬에 대해서는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또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13:1). 더구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시몬의 아내이며 루포의 어머니에 대하여 자신의 영적인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6:13).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몇가지를 차제에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북 아프리카 구레네에서 온 시몬입니다. 그는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일찍 유대교인이 된 경건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주는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에 골고다 언덕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상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선지자 예수가 자신을 저주하는 백성들과 못박는 자들을 용서해주고 있습니다(23:34). 다윗왕의 후계자이며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할 자라고 믿어지던 메시아가 허무하게 십자가 처형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인인 시몬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기이한 일입니다. 그런데 3일 후에 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무덤속에서 부활했다는 이야기가 예루살렘에 나돌고 있습니다(27:53-54). 그것이 사실일까요? 구레네 출신 시몬은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가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시리아로 옮겨가서 안디옥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13:1).  

(2)  시몬의 가족들의 삶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시리아 안디옥교회에서 시몬은 장로로서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한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13:1). 그리고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도 복음의 젊은 일꾼이 됩니다. 그래서 젊은 성도 마가가 그들과의 교류가 있었기에 시몬의 이름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5:21). 그리고 안디옥 출신인 의사 누가가 시몬을 알고 있으며 안디옥교회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쳤던 사도 바울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로 미루어 보아 객지인 안디옥에서 교역자 생활을 하고 있던 바울이 시몬의 집에서 신세를 많이 진 것으로 보입니다.

(3)  특히 루포의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이 사도 바울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시리아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사도 바울이 10년 세월을 소아시아와 유럽선교에 열심입니다. 그런데 그가 모교회인 안디옥교회에 돌아오게 되면 항상 시몬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는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16:1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몬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에 대한 언급이 왜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루포가 주님 안에서 어떠한 선택을 받고 있다는 뜻일까요? 또한 루포의 어머니를 바울이 자신의 어머니와 같다고 하는 표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간략하게 하나씩 살펴봅니다;

1)    루포의 어머니를 사도 바울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시몬의 아내인 루포의 어머니가 연세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인 시몬이 먼저 소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2)    알렉산더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가가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초창기에는 알렉산더가 함께 있었기에 서로 알고 있습니다(15:21). 그래서 마가의 기억으로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시몬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마가가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을 주후 60년경에는 루포의 가족이 진작에 시리아 안디옥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으므로 그 동안의 변화에 대하여 마가가 자세히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루포의 어미니’(16:13)라고만 표현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자면, 알렉산더는 일찍 소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3)    주님 안에서 루포가 어떠한 선택을 받고 있을까요? 주후 47년경 사도 바울이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을 때에는 교회의 장로들이 시므온의 세대입니다. 그런데 10년의 세월이 지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저술하고 있을 당시에는 그 다음의 세대가 교회의 중책을 맡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시므온의 아들인 루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루포를 그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교회의 일꾼으로 키운 것은 그의 어머니의 신앙심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를 돌보고 자신의 아들을 교회의 큰 일꾼을 키우고 있는 루포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이 사도 바울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마디로 루포의 어머니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16:13b).

결론적으로, 로마서 제16장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은 루포의 어머니까지 포함하여 실명으로 된 자가 모두 36명입니다. 그 가운데 9명이 여성으로 보입니다. 4분의 1입니다. 그 가운데 짧은 본문에서 4사람의 여성분이 사도 바울에 의하여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3사람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그리고 버시에 대해서는 크게 아는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본문에서만 그 이름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루포의 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지지도 아니하고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수고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모든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들에게 문안하고 그 점을 배우라고 하는 권면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루포의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오랜 이방지역 선교를 통하여 사도 바울은 늙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향집과 형제자매를 떠난 지도 오래됩니다. 공생애는 그와 같이 고달프고 인간적으로는 외로운 삶입니다. 그렇지만 주님 안에서 피보다 더 진한 보혈의 형제와 자매를 만나고 영적인 어머니까지 모시고 있으니 그 점에서는 사도 바울은 행운아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부디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외로움과 그것을 충분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동시에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새로운 인간관계로 끝까지 복음전파에 정진하시는 성도님들의 삶이 모두 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