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06강(롬16:3-5)

손진길 2021. 5. 11. 09:37

로마서 강해 제106(16: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4 16(주일)

 

로마시로 되돌아간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 가정교회에는 누가 출석하고 있는가?(16:3-5)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로마시로 되돌아 가서 살고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16:3). 문안을 해야하는 이유는 크게 보아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그들은 사도 바울과 함께 목숨을 내놓고 선교여행을 같이한 헌신적인 복음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16:3).

(2)  둘째, 선교의 현장에서 바울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의 위험까지를 감수한 바가 있는 의리가 있는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16:4a).

(3)  셋째, 그러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희생정신으로 세워진 이방교회의 성도들이 그들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6:4b).

(4)  넷째, 지금은 유대인 추방령이 풀려서 로마시로 되돌아가 현지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6:5). 참고로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의 집에 그 교회가 세워져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6:5a).

(5)  다섯째, 사도 바울은 자신이 소아시아의 도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처음 얻은 남자 성도인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고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16:5b).  어째서 그 대목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의 가정교회 다음에 들어 있으며 같은 구절로 분류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의미에 대하여 다음에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16:3);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16:3a); 예수님은 메시아이십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1:29). 실제로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십니다. 이제 그 사실을 믿고서 영원한 제물인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죄를 안수하고 위임하는 자들에게는 대속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의 무게를 철저하게 깨닫고 눈물로써 통회하며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선민 이방인 상관하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나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거듭난 인생으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들의 거듭난 인생에 있어서는 몇 가지 변화가 수반이 되고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이 그 피로 산 생명이기 때문에 성도의 남은 인생이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님으로 모시고 그 제자로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둘째,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실천해야 합니다.

3)    셋째,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는 신앙공동체에 소속이 되며 같은 지체들이므로 성도들 사이에는 새로운 형제 자매라고 하는 영적인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16:3a).

4)    따라서 서로가 만나면 기쁘고 서로 떨어져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안부를 전하며 가까이 있으면 서로가 찾아보고서 문안을 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2)  나의 동역자들”(16:3b);

1)    이방인 사도인 바울은 혼자서 선교여행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형제들과 함께 공생애를 살아가며 동역을 하라고 하는 가르침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에서 벌써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복음사역을 하실 때에 두 차례 사도와 제자들을 지역선교에 나누어서 파송하신 적이 있습니다. ①첫째, 마태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갈릴리 지방에서 12사도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지역을 나누어서 복음사역을 하도록 파송하셨다고 적고 있습니다(10:1-15). ②둘째, 누가복음 제10장에서는 의사 누가가 더 정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2명씩 팀을 이루게 하여 사마리아 여러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사역을 하도록 조치하셨다는 것입니다(10:1-20).

3)    두가지의 경우를 종합하여 생각해보면 한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에게 독자적인 복음사역을 명령하셨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혼자 보내지 아니하셨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제10장에서는 12제자를 불러서 치유사역의 권능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12사도로 승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분의 변화는 70명의 제자들을 35개조로 나누어서 파송하였을 때에도 여전히 함께 복음사역을 하도록 팀장의 지위를 12사도가 얻고 있는 것으로 풀이가 됩니다.

4)    또한 12사도들이 70명의 제자들과 함께 여러 고을로 다니면서 복음의 사역 예정지를 먼저 확보하게 되면 그러한 지역을 예수님께서 방문하시는 것으로 마태복음 제11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12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11:1).

5)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복음사역에 그들을 동역자로 사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복음전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게 하고 치유사역의 방법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함께 동역을 하고 있다는 그것이 복음사역을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는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와 같은 이치를 그가 수집한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 가운데서 깨닫고서 그대로 그의 선교일정에서 적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6:3b).

(3)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16:3c);

1)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 기간 중 그리스 반도의 남단에 있는 큰 항구도시 고린도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아굴라는 본래 소아시아 북쪽 지방 본도에서 태어난 유대인 교포인데 결혼을 하여 아내와 함께 로마시에 살고 있다가 고린도로 이주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로마시를 떠나온 이유는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가 주후 40년대 후반에 유대인들을 로마시에서 쫓아내었기 때문입니다(18:2).

2)    처음 고린도를 방문한 나그네 사도 바울을 그들이 따뜻하게 대접한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①첫째, 아굴라와 같이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 교포이며 그 직업이 천막을 만드는 아굴라와 같았기 때문입니다(18:3, 22:3). ②둘째, 이방인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바울과 아굴라 부부의 관심사항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 부부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히브리정경의 메시아 예언을 전하는 바울의 설교를 들었으며 바울이 고린도에서 1 6개월간 성경공부반을 운영할 때에 열심히 참석하게 됩니다(18:4, 11).

3)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는 사도 바울의 세계선교에 동참하게 됩니다(18:18). 고린도를 떠나는 사도 바울과 함께 소아시아의 항구도시 에베소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18:19-26). 그들 부부는 에베소에서 알렉산드리아 출신 성경학자 아볼로를 만나 그들이 사도 바울에게서 배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18:24-26).   

둘째로,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16:4);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16:4a);

1)    언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선교과정에서 사도 바울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았을까요? 그 대목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위기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고후11:23). 여러 번 죽은 뻔한 그 경우의 하나에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사도 바울과 생사를 함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그들은 사도 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먼저 희생의 자리에 나선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2)    그 하나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에베소에서 발생한 폭동사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후 52년에서 55년까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3년간 성경공부반을 운영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자 그 지역에 초대교회 부흥의 역사가 발생합니다(19:8-20). 그러자 제우스와 아데미 신을 섬기는 헬라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고자 난동을 부리게 됩니다. 그 와중에서 목숨이 위험해진 사도 바울을 구하고자 제자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서 나서게 됩니다(19:28-31). 그들 제자들 가운데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포함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18:18, 26, 19:30, 16:4a).

3)    그 소동이 일단 잠잠해지자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새로운 담임목사로 디모데를 세우고 유럽의 마케도니아로 건너가게 됩니다(20:1, 딤전1:3). 그리고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는 주후 47년경에 로마시에서 유대인들을 축출한다는 칙령을 내린 바 있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18:2) 주후 54년에 서거하였으므로 이제는 안전한 로마시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교회도 세우고 전도활동을 계속하고자 합니다(16:5). 사도 바울 자신도 여건만 조성이 된다면 로마시로 들어가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안하고자 합니다(19:21, 15:22-24).

(2)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16:4b); 사도 바울은 그 당시의 기억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 부부가 어째서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먼저 희생을 당해도 좋다고 생각했을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대속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인간적으로는 그 희생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아굴라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중한 이야기를 그가 개척한 이방인교회에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방인 모든 교회도 그들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셋째로,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16:5);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16:5a);

1)    주후 40년대 후반에 로마의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시에서 유대인들을 축출했습니다(18:2). 그때 로마교회에 다니고 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다른 유대인 성도들과 함께 로마시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아굴라 부부는 이태리 반도에서 그리스 반도로 건너와서 고린도에서 천막 만드는 사업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서 소아시아 에베소에 건너가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    주후 54년경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서거함에 따라 아굴라 부부는 로마시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면 그들 부부는 로마교회에 다시 출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서 배운 대로 로마시에서 전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성도들을 양육하게 됩니다. 그들과 함께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자신들의 집입니다. 소위 가정교회가 아굴라의 집에 개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그 옛날 그 교회의 성도였던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로마시로 되돌아 가서 가정교회를 개척하고 전도활동에 열심이라는 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희망을 담아서 다음과 같이 벌써 말하고 있습니다;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16:5a).

(2)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16:5b);

1)    아굴라 부부가 개척한 가정교회 이야기와 성도 에배네도에 대한 이야기를 같은 구절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다른 두가지 종류의 이야기이므로 구절을 달리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그렇게 분리를 하지 아니하고 같은 절에 묶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그 두가지 사이에 깊은 관련성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2)    가장 강력하게 추론해볼 수 있는 시나리오는 에배네도가 그 가정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굴라 부부와 에배네도는 언제부터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 부부가 소아시아 에베소에 머물고 있을 당시로 보입니다. 아굴라와 에배네도는 사도 바울을 잘 알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친해졌을 것이며 함께 로마시로 들어가서 교회를 개척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참고로 여기서 에배네도는 남자 성도로 보입니다. 만약 여자 성도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이 나의 사랑하는 자매라고 그를 소개했을 것입니다.

(3)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16:5c);

1)    사도 바울이 제1차 선교 때 소아시아를 방문합니다. 그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성도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청년 에배네도로 보입니다. 비시디아 인디옥에서의 그 일을 의사 누가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13:43-44),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13:51-52).

2)    그 때가 주후 46-47년경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이 서신을 작성하고 있는 때는 주후 56-57년경입니다. 그동안 10년 동안에 에배네도는 어떠한 성도의 삶을 살아간 것일까요? 그가 로마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고 아굴라의 가정교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에서 전도와 선교의 일꾼으로 나름대로 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배네도의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에배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16:5c).

결론적으로, 로마서 제16장의 특이성에 대하여 말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 35명의 이름을 게재하고 있으며 로마교회의 성도들과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동역자가 되고 있는 그들에게 일일이 문안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서로 연락을 취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네트워킹을 마련해두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사도 바울이 로마서라고 하는 서신을 뵈뵈 편으로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전달하게 하고 자신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그 상황과 관련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잘못되면 다시는 에베소 지역의 장로들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0:25). 그렇게 된다면 남은 세계선교의 일정은 누가 담당해야만 할까요? 사도 바울이 서로 문안하라고 소개하고 있는 그 인물들이 힘을 합하여 수행해야만 하는 사명입니다.

그와 같은 비장한 심정으로 적고 있는 글이기에 심히 특이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시고서 로마서 제16장에 기록이 되고 있는 그의 동역자들의 실명을 하나하나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바울이 기억하고 있는 그 이름처럼 자신의 이름이 주님께서 실명으로 기억하시는 생명의 이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