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0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10. 11:22

로마서 강해 제103(15:25-2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4 13()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성도들이 그 빚을 예루살렘에 그리고 이방세계에 어떻게 갚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15:25-28)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처하고 있는 어려운 입장과 그 마음속의 갈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지의 세계인 서유럽에 선교를 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이루고자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그토록 가고 싶어하는 사도 바울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신의 발길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금 작성하고 있는 로마서는 우선적으로 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전달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본은 기타 여러 지역의 초대교회에 회람이 될 것입니다. 그 서신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두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이 히브리정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복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면 성도들은 믿음의 뿌리가 견고하게 됩니다.

(2)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거듭난 인생 가운데 그 사랑의 빚을 갚아가야 합니다. 그 점을 깨닫게 되면 너나없이 사도 바울처럼 이방인 선교에 나서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열심히 설명한 다음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과 어째서 예루살렘을 다녀서 그 다음에 로마에 갈 수밖에 없는지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과 바울의 처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우선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에게 유럽선교의 문이 열린 것은 제2차 선교 때입니다. 1차 선교 때에 방문했던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재차 방문하고자 계획을 하고 있는데 성령님과 예수님의 영이 자꾸만 그 길을 막고 있습니다(16:6-7). 그 때에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16:9-10).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소아시아 서단의 항구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유럽 땅 동쪽 끝의 항구인 네압볼리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후 빌립보를 비롯한 마케도니아 지역의 여러 도시를 방문하고 남하하여 그리스 반도의 대도시에 선교를 하게 됩니다. 특히 주후 50년에서 52년 사이에 고린도에서 장기간 체류하는 시기에는 로마시에 살다가 추방을 당한 바가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서 로마교회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18:1-4). 사도 바울은 그들 부부에게 추방령이 풀리게 되면 제국의 수도인 로마시로 함께 들어가서 서유럽 선교를 추진해보자고 의기투합한 것으로 보입니다(18:18).

(2)  둘째, 사도 바울이 제3차 세계선교를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 제4대 로마 황제인 클라우디우스가 서거하고 유대인 추방령이 풀리게 됩니다. 따라서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반도로 옮겨와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시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가운데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주후 54년에서 55년 사이에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그들이 살고 있는 로마시의 성도들을 방문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길이 쉽게 열리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하여 사도 바울의 동역자인 의사 누가는 사도행전 제19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19:21).

(3)  셋째, 사도 바울의 세계선교의 바쁜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되돌리게 하는 상황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지난 번 강해에서 살펴본 내용을 다시 간추려서 적어 봅니다;

1)    첫째, 초대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자꾸만 커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구원을 얻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제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들처럼 할례와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론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율법의 의를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속자를 메시아로 이 세상에 주셨다는 것입니다.

2)    둘째, 사도 바울이 이론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구원의 방법은 율법의 의가 아니고 믿음의 의입니다(3:23-28).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사람의 능력으로 성취할 수 없는 그 언약의 성취를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 창조의 능력으로 실현하실 수 있다고 믿는 그것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15:6, 4:3). 현실적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육적인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2-25).

(4)  넷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구원으로 나아갈 수조차 없는 자신임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유대교의 할례와 율법생활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자들이 유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서 초대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내에서 이방인출신 성도들을 차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출신 성도들이 할례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무식하게 신앙생활을 제멋대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경건과 거룩함이 없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오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할례와 율법을 준수하고 선민 유대인들처럼 거룩한 성도의 생활을 영위해야만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얻을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자들이 교회내에 들어와 있는 유대인출신 성도들 가운데 일부 강경한 유대주의자들입니다.

(5)  다섯째, 유대주의자들이 눈에 가시로 여기고 있는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사도라고 자칭하면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 등지에서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예루살렘총회에 고발을 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에 대하여 전혀 가르치지를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둘째, 선교자금을 많이 모아서 개인적으로 유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셋째, 생전에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를 함께 한 사실이 없는 바울이 감히 사도라고 자칭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4)    넷째, 이방선교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자신의 제자들만을 목회자로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러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는 예루살렘의 선교사들이 괄시와 배척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6)  여섯째, 사도 바울의 행적과 관련하여 그와 같이 주장하고 있는 반대자들의 거짓고발이 예루살렘총회에 청원으로 나타나게 되자 그 소식을 바울이 듣게 됩니다. 그는 한창 제3차 선교여행에 나서고 있는 도중입니다.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그 소식을 인편으로 전해 듣자 바울은 탄식을 합니다(19:21). 여전히 율법의 의를 주장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이 믿음의 의를 강조하고 있는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사도성을 문제삼고 있는 반대파들이 유대주의자들을 옹호하면서 득세를 하고 있는 현실이 큰 걱정입니다. 참고로, 주후 49년경 예루살렘에서 열린 제1차 총회에서는 총회장인 사도 베드로, 차기 총회장으로 내정이 된 예수님의 동생인 장로 야고보, 그리고 실세로 떠오르고 있는 예수님의 사촌동생인 장로 시므온 등이 사도들의 이방인 선교를 돕기 위하여 이방인출신 성도들에게는 할례와 율법을 강제하지 아니하기로 의결을 해주었습니다(15:4-21). 그러나 이제는 예루살렘총회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바울의 반대파와 유대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너무 큰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를 비롯한 장로들이 그러한 분위기를 사도 바울에게 전해주면서 함께 걱정을 나누고 있습니다”(21:17-26).

(7)  일곱째, 바울이 제3차 세계선교를 떠나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3년간 제자훈련을 시키고 있는 동안에 제국의 수도에서 큰 변화가 발생합니다. 주후 47년경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 바 있는 제4대 황제가 주후 54년에 서거하고 네로가 제5대 황제로 즉위한 것입니다. 전임황제의 서거로 말미암아 유대인 추방령이 유야무야가 되고 있습니다. 차제에 로마시를 떠나서 살고 있던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시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도 로마교회로 되돌아 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좋은 기회에 로마시를 방문하고 서유럽 선교에 나서고자 계획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들려온 소식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의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15:25-28).

위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15:25-26);

(1)  서쪽에 있는 로마시로 가고 싶은 사도 바울이 반대로 동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을 섬기는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유럽인 성도들이 복음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경제적으로 돕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였는데 그것을 전해주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다는 설명입니다. 바울의 설명 가운데에는 이해하기에 쉽지 않은 대목들이 다음과 같이 들어 있습니다;

1)    첫째, 유럽에서 연보한 돈을 멀리 예루살렘까지 전해주자면 시일이 많이 걸립니다. 아무리 그 일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이방인 선교에 바쁜 사도 바울이 직접 그 돈을 들고서 예루살렘까지 갈 일은 아닙니다. 젊은 제자들을 골라서 대신 보내면 더 안전하고 빠르게 전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속사정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    둘째, 그 속사정은 반드시 사도 바울이 직접 예루살렘총회를 방문하여 해명을 해야만 하는 일이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충 짐작만 해보더라도 ①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시비, ②할례와 율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견해, ③선교비용을 불투명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의심, ④이방인교회를 바울파로 장악하고 있다는 시비 등입니다.

3)    셋째, 더 중요한 변화는 예루살렘총회에서 이제는 사도 바울의 이방인선교를 위하여 그를 지지해주고 있는 세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거의가 선교를 위하여 동서남북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과 친한 장로들은 이제 연로합니다. 젊은 성도들의 리더들이 예루살렘교회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난 10여년간 소아시아와 유럽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업적에 대하여 과소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유대주의자들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처지가 참으로 난감합니다.

(2)  사도 바울은 이상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이방인 선교를 한 결과 복음을 받아 들인 이방인 성도들이 복음의 발상지인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에게 감사한다는 의미로 예물을 보내고 있다는 성의 표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이방지역에 널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도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하는 소위 윈윈(win win) 전략의 중요성을 일깨워줄 것입니다.

둘째로,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15:27);

(1)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인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아니하고자 조심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으므로 그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잘 살고 있는 유럽인들이 성금을 보냈다고 하는 의미의 전달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반도의 유럽인 성도들이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에게 예물을 드리고 있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15:27a). 그리고 그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15:27b).

(2)  실제의 형편에 있어서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그 생활이 어렵습니다. 다른 유대교인들도 생활이 어렵지마는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이 특히 생활이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선민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황제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로마황제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속국의 백성들에게는 각종 로마제국의 혜택이 경제적으로 주어지지를 않습니다. 그 때문에 유대인 사회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 들고 있습니다.

2)    둘째, 유대교인들보다 기독교인들이 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교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선민들의 종교 유대교를 버리고 이단아 나사렛 예수를 섬기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인들이 미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경제적인 활동에서 제외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특히 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성도들이 헬라파 유대인 성도들입니다(6:1). 그들은 가족들이 살고 있는 헬라의 여러 도시들을 떠나서 예루살렘에 와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처음 시작이 되었을 때에는 뜨거운 열정으로 많은 성도들이 공동체생활을 했습니다.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분배를 했습니다(2:43-47). 열심이 있는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헌금을 했습니다(4:34-35). 곧 예수님의 재림이 있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서 단체생활을 하면서 그 신앙이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10년 세월이 지나가도 세상의 종말이나 예수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열심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굶주리고 있는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은 영적인 것을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울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1-2). 조금 더 살펴봅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보전한 자들이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히브리정경의 내용을 그들이 파수한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신앙을 선민 유대인들이 주전 15세기 출애굽 당시부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선민 우월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3)    셋째,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로 복음사역을 한 곳도 유대인들의 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도 유대 땅에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4)  그렇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선민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발생에 있어서 공로와 과오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공로는 위에 열거한 것들입니다. 그 반면에 그것을 상쇄할 만한 과오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만민구원과 천국구원의 복음을 배척하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110만명이 살해를 당하고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되는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미래지사를 15년 정도 남겨두고 있는 주후 55년경에 사도 바울이 그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전혀 언급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선민 유대인들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15:27). 그 이유를 은연중에 다음 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로,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15:28);

(1)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당장의 관심사는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반대자들의 고발이 거짓임을 밝히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바울 자신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반도에서의 유럽선교의 실적을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보고하고 이제는 로마와 서유럽으로의 선교여행에 대하여 지지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2)  그들의 지지를 얻게 되면 사도 바울은 곧바로 로마제국의 심장부로 들어가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서유럽 선교에 나서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차제에 로마제국의 권력자 그룹에 속하고 있는 그들과 사귐으로써 바울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그 동안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바울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그의 발걸음이 무겁기 그지 없습니다. 비록 예루살렘교회에 보내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성도들의 연보돈을 가지고 가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자신을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신의 심중을 은연 중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15:32).

기독교의 총본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바울 자신을 지지하는 지도자들이 나이가 들어 자꾸만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선민 유대인들의 전통을 중시하고 있는 젊은 유대주의자들이 득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대교의 개혁과 개방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할례와 율법을 기독교인들도 준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하는 유대주의자들의 득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예루살렘교회내에서도 자꾸만 가리워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답답한 유대인들의 도시 예루살렘을 빨리 벗어 나서 넓은 세계 그것도 제국의 수도인 로마시로 가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로마인 성도들로부터 위안과 지지를 얻고 싶습니다. 그리고 원기를 회복하게 되면 다시 선교팀을 이끌고 서유럽으로 총 진군하여 서바나까지 가고  싶은 것입니다.

부디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시는 성경공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쪼록 바울처럼 원기를 회복하여 땅끝까지 선교에 나서시는 여러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