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01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9. 17:42

로마서 강해 제101(15:19-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4 11()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저술한 곳이 어디이며 언제쯤 이 편지를 로마교회에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들에 대하여(15:19, 22, 26, 16:1-4, 22, 18:26, 19:21, 20:2-3);

 

다음과 같은 단서들을 종합하여 판단해보면, 사도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 주후 55-57년 사이에 그리스의 헬라에서 로마서를 작성하여 여집사 뵈뵈 편으로 로마교회로 보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 첫째, 무엇보다도 로마서 제16장의 안부의 글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특별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문안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6:3-4). 이는 그들 부부가 이미 로마시에서의 유대인 추방령이 풀려서 로마교회로 되돌아가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로마의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재위 AD41-54)가 유대인들을 로마시에서 추방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후 54년에 서거하고 제5대 황제인 네로가 즉위함으로써 전임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이 자연스럽게 풀린 것으로 학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2) 둘째, 로마서 제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부터 두루 행하여 그리스 반도의 서북쪽에 있는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5:19). 그리고 이제는 이 지방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에서 더 이상 일할 곳이 없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15:2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제2차 선교와 제3차 선교가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때는 구체적으로 주후 55-57년 사이의 어느 시점으로 보입니다.

(3) 셋째, 사도 바울과 선교여행을 같이 하면서 주치의로 섬겼던 의사 누가의 기록인 사도행전에 따르게 되면 바울이 로마로 가려고 하는 그의 결심을 내비치고 있는 시점이 제3차 선교기간 중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2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동안 더 있으니라”(19:21-22). 그런데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이 대충 끝나고 있습니다. 다만 로마로 가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 시점이 제3차 선교여행 기간 중에 그리스반도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있는 때입니다(15:19, 20:1-6). 마게도냐와 아가야 여러 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전달해 달라고 성금까지 사도 바울에게 맡긴 이후입니다(15:26). 그러므로 주후 55년 이후가 됩니다.

(4) 넷째,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 시점은 헬라에 3달간 머물고 있는 기간이 유력합니다. 그 근거는 세가지입니다; ①하나는, 헬라에서 사도 바울의 체류기간이 3달로 길기 때문에 바울이 머리속으로 로마서와 같은 어려운 교리서를 구상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체계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②또 하나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라고 하는 그의 서신을 여집사 뵈뵈 편으로 로마시에 있는 교회에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태리 로마로 가기 위해서는 헬라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③마지막으로 여집사 뵈뵈는 그리스의 고린도 근방에 살고 있는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살고 있는 그녀에게 헬라에서 부탁하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5) 다섯째, 그런데 이상하게도 로마서를 구상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직접 글을 적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머리속에 있는 생각들을 더디오에게 부탁하여 대필하게 하고 있습니다(16:22).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두 가지 경우 중의 하나로 보입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이 글을 적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대필자에게 그 내용을 구술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금이 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제3차 선교여행 중 헬라에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20:1-3). 그렇지만 사도행전에 기록된 경우가 아니더라도 옥중생활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여지를 주고 있는 사도 바울의 기록이 고린도후서 제11장에서 발견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고후11:23).

2)    둘째, 사도 바울의 로마서는 로마시에 있는 성도들에게만 전해지고 있는 서신이 아닙니다. 그 사본을 많이 만들어서 동시에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볼 수 있도록 회람을 시키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에 관한 귀중한 교리서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세상에 복음서가 공식적으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는 주후 50년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 그 옆에서 동시에 사본을 만들기 위하여 기록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 곧 로마시가 고향인 더디오의 이름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제16장에 기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16:22).

 

사도 바울은 이사야 제52장과 제53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호와의 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15:20-21)

 

일반적으로 대 선지서인 이사야 제52장 말미와 제53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호와의 종 또는 여호와의 의로운 종에 대해서는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해석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도 곧 전도나 선교에 열심인 성도들도 여호와의 종이며 의로운 종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그의 사상을 로마서 제15장에서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15:20-21).

참고로, 바울이 원용하고 있는 이사야의 글을 직접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52:13-15);

간략하게 그 뜻을 한번 풀이해봅니다; ①첫째, 여호와의 종은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합니다. ②둘째, 그러나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결국은 형통하며 존귀하게 됩니다. ③셋째, 여호와의 종이 당하는 고난의 끝은 이 세상에서 죽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능력으로 그 죽음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높이 들리는 것이며 지극히 존귀하게 되는 기이한 사건으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④넷째, 그와 같은 (대속의) 죽으심과 지극히 존귀하게 되는 것(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쪽 보좌에 앉으심)은 모든 세상의 임금들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⑤다섯째, 그 기이한 소식이 복음으로 온 세상에 처음 듣게 되는 소식으로 전파가 될 것입니다.

참고로, 메시아가 성취하게 되는 복음의 성취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미 들은 바 있는 내용이 아닌 것이라는 데 주안점을 두고서 겹치지 않게 복음을 온세상에 골고루 편만하게 전하는 것이 옳다고 그의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15:20-21).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이사야가 예언한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자기 나름대로 원용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  첫째,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52:15)는 글을 약간 다르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15:21)라고 기록함으로써 그 기이한 소식을 듣게 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 복음을 전해주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은 두 번 듣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처음 듣게 되는 기이한 소식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점에 유의하여 이미 다른 성도가 복음을 전한 곳에는 들어가지 아니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뜻을 사도 바울이,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15:2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둘째, 그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인용이 아니라 원용입니다. 그러한 원용은 여호와의 의로운 종에 사도 바울과 선교사들이 포함이 되고 있다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자신이 여호와의 종의 하나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1:1, 고전1:1, 1:1). 애초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를 염두에 두고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직접적으로 메시아라고 표기하지를 아니하고 제52장과 제53장에서 여호와의 종이라로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여호와의 종이방선교에 힘쓰는 사도들과 성도들이 배제가 되고 있다고 좁게 해석하기에도 무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셋째, 사도 바울은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의 행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본받아 살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자신을 채워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얻으신 그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자신도 얻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에서의 면류관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4)  넷째,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사상을 그의 글과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교훈에서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가노라”(3:10-12),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5)  참고로, 사도 바울이 소망하고 있는 그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나라에서의 논공행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도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12-1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17:24).

  아무쪼록 로마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