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룡전21(작성자; 손진길)
1222년 가을에 아룡이는 아내인 최사월과 함께 오래간만에 나들이를 한다. 지난 봄부터 여름까지 아룡이는 격일로 집에서 최사월에게 무예를 전수하느라고 바빴다. 또한 4일에 한번씩은 최우 장군의 저택에 있는 연무장에서 친구인 관창, 장무, 조룡, 유장에게 무예를 전수했다.
그 일이 얼추 끝나고 나자 아룡이가 모처럼 여유를 가지고 최사월과 함께 시전으로 나온 것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배운 절기만을 그들에게 전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새로 고안하여 그것을 가르친 것이다. 따라서 아내인 최사월과 친구 4명의 성취가 상당히 빠르다.
아내 사월이와 함께 휘적휘적 걷다가 보니 벽란도를 통하여 또한 북쪽 국경을 통하여 고려의 개경에 들어온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는 가게들이 눈에 뜨인다. 그 가운데 특히 다양한 품목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큰 상점이 하나 있다. 그들 부부가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아룡이와 사월은 특히 만주의 여진족과 거란족의 상품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자 그 가게의 주인이 다가온다. 그가 유심히 두사람의 행색과 몸놀림을 살피더니 말한다; “북방에서 생산한 물품이 신기하신 모양이군요. 마음에 드시는 것을 한번 골라 보시지요. 제가 싸게 드리겠습니다”.
아직 22세에 불과한 아룡과 사월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친절한 가게 주인을 경계하지 아니하고 편하게 대답한다; “개경에서 흔하게 보지 못하는 술이 나와 있군요. 백두산 근처에서 생산한 토속주인 모양입니다. 가격이 어느 정도 됩니까?... “.
가게 주인이 호의적으로 대답한다; “술값보다는 운반비가 더 든 상품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문을 조금만 남기고 드리겠습니다. 들쭉술을 한 병 드릴까요?... “. 가게 주인은 매우 인상이 좋은 중년이다. 그리고 인심도 좋아 보인다.
그래서 아룡이 품안에서 은전을 꺼내어 술 한 병을 사면서 말한다; “저는 아룡이라고 합니다. 혹시 주인장의 성함을 알 수가 있을까요?... “. 그 말을 듣자 가게 주인이 예를 갖추면서 정중하게 말한다; “저는 선친으로부터 이 가게를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는 경종성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서우진왕의 무예를 사부 도학스님을 통하여 익히고 있는 아룡이 그 옛날 서우진이 개경의 상점에서 만났던 상인 경호민의 아들을 지금 우연히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언가 사로 끌리고 있다.
그 옛날 사람을 보는 통찰력이 남달랐던 경호민이다. 그의 아들인 경종성이 지금 그러하다. 그래서 그는 아룡이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그의 특유의 통찰력으로 벌써 파악하고서 그에게 호의적으로 대한 것이다.
그때 그 가게로 들어서고 있는 30세 중반의 부부가 있다. 그 가운데 남자가 경종성에게 말한다; “경선생님, 저희들이 넘긴 상품이 잘 나갑니까?... “. 그 말을 듣자 경종성이 대답한다; “잘 나가다 마다요. 야율선생은 언제나 최고의 품질만 넘겨주시니 이곳 개경의 부자들이 많이 사가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룡이 잠깐 긴장한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이상하다. 이 자가 누구이기에 야율이라는 성씨를 사용하고 있는가? 고려사람이 아니다. 혹시 서우진왕 곧 야율종진왕과 관련이 있는 인물인가?... 관계가 있다고 하면 분명히 내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
그래서 슬쩍 아룡이 자신의 내기와 외기를 혼합하여 은밀하게 방출하면서 그 자의 기운을 살핀다. 그러자 놀랍게도 극성으로 수련하여 갈무리하고 있는 내기가 그 자에게서 느껴지고 있다. 내밀하게 확인이 끝나자 아룡이 모르는 척 하면서 그자에게 말한다; “우리 고려에서는 없는 성씨이군요? 야율 선생은 어디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
그제서야 아룡의 존재를 인식했는지 그 자가 아룡을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친절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율 성씨는 우리 여진족의 것입니다. 오로지 저의 집안에서 야율 성을 사용하고 있는데 오늘날 그 수가 희귀합니다. 반면에 유사한 성씨가 거란족에게 있지요. 그것이 아율입니다. 거란인 아율의 수는 대단히 많습니다만… “.
아룡이 반가운 김에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물어본다; “혹시 선생은 야율종진왕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순간 그 자가 깜짝 놀란다. 그 다음에 도리어 질문한다; “나이가 저보다 훨씬 적어 보이는데 어떻게 젊은이가 그 옛날 종진국의 야율종진왕을 알고 계십니까?... “.
의외의 반응이다. 아룡과 사월이 그들 부부의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그런데 그 앞에서 가게 주인인 경종성이 묘한 미소를 띄면서 두 쌍의 부부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더니 대뜸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연이 있으면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지요. 이것도 그러한 모양입니다. 4분이 모두 저희 가게에 들리신 손님들이시니 제가 차 한잔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함께 가게 안쪽에 있는 내실로 들어가시지요… ”.
가게 깊숙한 곳에 있는 내실이다. 평소 가게 주인장인 경종민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휴식장소인 모양이다. 그곳에 탁자가 있고 그 위에는 차 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다. 그가 내실로 들어가는 복도 입구에서 이미 종업원에게 지시했다; “나는 손님들과 함께 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가게를 잘 보도록 해라… “.
경종민이 대접하는 차를 마시면서 야율선생 부부와 아룡이 부부가 서로를 마주 본다. 그때 경종민이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연다; “저의 선친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곳 개경 귀족청년인 서우진이 이 가게에 들렀다가 저의 선친을 만나고 그 인연으로 야율상 선생을 만나서 만주에 종진국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아룡이 말한다; “저의 사부이신 도학스님께서 서우진왕 곧 야율종진왕으로부터 무예의 절기를 많이 배우셨지요. 그래서 그런지 그 옛날을 회고하시면서 저에게 야율상 재상에 관한 말씀도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만… “.
그 말을 들은 경종성이 말한다; “제 짐작이 맞았군요. 제가 오늘 처음으로 저의 가게를 찾아오신 아룡님을 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역시 소문으로 들은 최우 장군 댁의 오십부장이 맞으시군요. 저는 역시 타고난 장사꾼인 모양입니다. 한번 보고서 그 사람의 내력을 짐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하하… “.
그 말을 듣자 야율선생이 말한다; “그렇다면, 주인장께서는 제가 누구인지도 벌써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 그러자 경종성이 더 크게 웃으면서 대답한다; “제가 알기로는 만주에서 오신 분 중에 야율 성씨를 사용하고 있는 분은 극소수입니다. 그것은 여진족 가운데 야율족의 족장 가문의 성씨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
경종성이 숨을 조금 쉰 다음 담담하게 이어서 설명한다; “불행하게도 종진국이 대금의 군대에 의하여 1189년에 사라지고 나자 야율 성을 쓰는 사람들이 만주에서 사라졌습니다. 만약 남아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야율종진왕이나 야율상 재상의 후손일 것입니다… “.
그 말을 듣자 야율선생이 놀라면서 말한다; “경선생님은 장사꾼이 아니라 마치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고승과 같습니다. 저는 야율종진왕의 양딸인 야율은옥의 차남 야율진종입니다. 우리 야율 성씨를 보존하기 위하여 할머니 야율애령께서 전장에서 저희 가족을 미리 대피시켰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게 살아남게 된 망국의 왕손이지요… “.
그 말을 듣자 경종성이 말한다; “그렇다면, 11년 전에 요동지방에서 대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바 있는 야율유가 장군의 가족이 되시겠군요?... “. 그 말을 들은 야율진종이 깜짝 놀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으로 경선생께서는 모르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어째서 그렇게 야율 일가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신 것입니까?... “.
그 말에 경종성이 대답하는 대신에 아룡이 부부를 먼저 보고서 말한다; “두분께서도 저의 설명을 듣고 싶으십니까?”. 아룡과 최사월이 함께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자 경종성이 야율진종을 보고서 말한다; “여기 젊은 부부는 지금 최우 장군의 사병을 지휘하고 계시는 아룡 부부입니다”.
그 말을 듣자 야율진종가 말한다; “최근 개경의 무예계에서 그 소문이 파다한 청객 김성곤 옹의 제자이신 아룡님이시군요. 그러면 그 옆의 부인은 최사월 오십부장이시겠군요.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의 옆에 있는 사람은 저의 내자인 하영란입니다”.
남편이 자신을 소개하자 하영란이 먼저 인사한다. 그러자 아룡이 부부가 마주 인사한다. 그 정도 인사가 끝나자 경종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의 선친께서는 야율 재상과 호형호제를 하던 매우 친한 사이입니다. 그래서 종진국이 위기에 몰리자 야율재상이 저의 선친에게 한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은… “.
경종성이 두 쌍의 부부를 한번 본 다음에 이어서 천천히 말한다; “종진국의 중요인물들을 고려로 피신하게 하고자 하는데 그 일을 도와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개경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사용하여 달라면서 미리 큰돈을 맡기기도 했지요. 그런데 종진국이 대금에 의하여 멸망하고 수년이 지나자 정말 저의 가게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놀라운 사실이다. 그 말을 듣자 아룡이 부부 뿐만 아니라 야율진종 부부도 크게 놀란다. 그들의 귀에 더 놀라운 말이 들려온다; “선친께서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개경에서 자리를 잡도록 철저하게 도와준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개경에는 사라진 종진국의 신하들이 상당수 숨어서 살고 있습니다… “.
그 말을 듣자 아룡은 퍼뜩 한가지 생각이 스친다. 그래서 즉시 물어본다.; “혹시 그분들이 서우진왕의 무예를 익히고 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 경종성이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요. 그들은 서우진왕의 무예를 물려받아 모두들 비기를 익히고 있는 인물들이지요… “.
아룡이 한가지를 더 물어본다; “그들의 수가 기십명은 되겠군요. 그들은 이곳 개경에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 그 말을 듣자 경종성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한다; “역시, 아룡 오십부장은 예리하십니다. 제가 보통 무사가 아니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들의 생각은 한마디로, 북쪽의 적들로부터 고려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룡이 고개를 조용히 끄떡인다. 그러자 야율진종이 말한다; “사실은 저의 형님이 대금의 장군이었던 야율유가입니다. 11년전에 남하하는 몽골과 내밀하게 협조하여 요동에서 대금의 황제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지요. 종진국을 무너뜨린 대금에 대하여 보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은 몽골의 장군으로 역시 요동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듣자 아룡이 질문한다; “그러면 야율선생께서는 이곳 고려의 개경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 그 말을 들은 야율진종이 아룡의 눈을 똑바로 보고서 말한다; “청객의 제자라고 하시니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지요. 나는 형님의 부탁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
아룡과 사월이 눈도 깜짝하지 아니하고 경청한다. 그러자 야율진종이 계속 말한다; “형님은 대금을 치기 위하여 몽골과 손을 잡으셨지만 그들이 이제는 고려를 치고자 획책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염려하십니다. 그래서 저보고 고려의 개경에 들어가서 실권자들에게 몽골의 의도에 대하여 경계하고 미리 대비하도록 전하라고 했습니다만… “.
그 말을 듣자 아룡이 조용히 야율진종에게 말한다; “고려의 군부의 실력자에게 그 말씀을 전하자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저보다는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전문가들을 만나시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제가 그들에게 야율선생을 안내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야율진종이 기뻐한다. 그래서 아룡에게 말한다; “저희들이 한달이나 개경 땅을 돌아다녔지만 적당한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덕분에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경선생님으로부터 좋은 말씀도 들었고요. 고맙습니다”.
경종성이 싱긋 웃으면서 말한다; “야율 재상은 저에게 있어서도 숙부와 같습니다. 이제 그 자손을 만나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물론 저희 가게에 그동안 좋은 여진족의 상품을 많이 가져다 주어서 그것도 감사하고요… “.
그들의 말이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아룡이 경종성에게 말한다; “저도 경선생님을 만나서 좋았습니다. 나중에 다시 들릴 것이니 종진국의 유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주십시오. 저도 그들과 힘을 합하여 고려를 지키고 싶습니다”.
경종성이 대답한다; “제가 그분들에게 직접 아룡 오십부장님을 찾아 뵙도록 말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 그 말을 끝으로 서로가 다음을 기약하면서 가게를 나선다.
아룡이 야율진종에게 말한다; “저는 그 비밀조직을 찾아가는데 우리 모두가 갈 것이 아니라 저와 야율선생만 가고자 합니다. 그러니 부인을 저의 내자와 함께 먼저 저의 집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야율진종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룡이 최사월에게 먼저 부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을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룡은 야율진종을 데리고 금청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과연 그곳에서 그들은 누구를 만나며 어떠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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