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길 목사 설교요지 및 음성설교 모음

에델 망대의 목자들과 성탄절의 의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0. 12. 22. 18:18

설교제목; “에델 망대의 목자들과 성탄절의 의미”(2:8-14)

설교자; 손진길 목사(두란노순복음교회 담임)

설교일; 주후 2016 12 25(주일)

 

베들레헴 남쪽에 있는 이름난 목축지의 언덕에 세워진 망대에서 밤새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찾아와서 구주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알려주었다는 내용의 이야기는 의사 누가가 작성한 복음서에서만 실려 있습니다(2:8-21). 그렇다면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이야기를 의사 누가는 어떻게 발굴하여 어떤 목적으로 그의 복음서에 수록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의사 누가가 자료를 수집하는 방법은 다른 복음서의 저자와는 조금 다릅니다.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 그는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한 제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 마태나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에게서 직접 보고 배운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글로 적을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이에 따라 그는 예수님 공생애 당시의 증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신빙성을 분석하여 결과를 가지고 복음서를 저술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 그는 사건의 근원부터를 따지기 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1:3). 그렇게 논리적으로 사건의 발생의 근원과 전개과정을 이해할 때에 믿음이 굳건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1:4).

따라서 의사 누가는 예수님의 출생의 의미와 사역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고자 하는 데오빌로 각하나 성도들에게 도움이 있도록 열심히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성장과정을 추적하고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신 후의 행적까지 집념을 가지고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수년간 사건의 현지를 방문하고 당시의 증인들과 증거를 찾아 다닌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 얻은 자료들을 주제에 맞게 체계적으로 수록함으로써 의사 누가는 독특한 설명력을 지니고 있는 복음서를 세상에 내놓게 것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자신의 영적인 아버지인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크게 의존하여(벧전5:13)  급하게 작성하고 있는 마가의 복음서와도 상당히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특이한 복음서의 작성기법을 보이고 있는 의사 누가가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본문에서 목자들의 이야기를 독점적으로 발굴하여 수록하고 있습니다. 과연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금년 주후 2016 12 25 성탄절이자 주일인 오늘 여러 성도님들과 함께 생각을 해보고자 하는 저의 설교의 주제입니다. 많은 내용을 설명드릴 수가 있지만 여기서는 간략하게 주요한 내용만 요약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탄생은 벧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고 있는 에브랏 길의 비극과 남쪽 에델 망대의 비극을 치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주전 1,900년경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야곱이 드디어 벧엘의 하나님을 찾아가게 됩니다(35:1-7). 그는 진작에 요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자신의 서원을 지키기 위하여 곧바로 벧엘의 하나님을 찾아가지를 않았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기 직전 목초가 무성한 숙곳에서 오래 목축을 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온 다음에는 돈을 써보기 위하여 당시 가나안의 중심도시 세겜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세상의 낙을 즐기다가 소위 세겜사건 경험하게 됩니다(34:1-29). 그의 집안이 멸문의 화를 당하게 가능성이 커지자 야곱은 그때서야 진심으로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됩니다(34:30-35:1). 하나님께서는 애초의 서원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세겜을 떠나 벧엘로 남하를 것입니다.

(2)   벧엘에서 주신 하나님의 축복은 엄청난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족장이 되는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정식으로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은 능력이 있어서 후일 이스라엘이 세겜을 정복하고 그의 목축지를 북쪽 도단까지 넓히게 됩니다(37:12-17, 48:22). 그리고 장차 그의 아들들은 가나안의 드넓은 목축지를 나누어서 지배하게 되는 족장들이 됩니다(38:1-2). 그렇지만 성도의 인생길이 그렇게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스라엘은 남하를 하여 헤브론에 계시는 부친 이삭을 찾아가고자 길을 떠납니다(35:27). 남행길에서 이스라엘은 평생 잊을 수가 없는 가지의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애처 라헬의 죽음이고, 하나는 장자 르우벤과 야곱의 빌하와의 통간 사건입니다(35:16-22).

(3)   성도들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죄와 사망의 법칙을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육신을 벗지 못하고 있는 이상 죄와 사망의 비극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8:2).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직면하고 있는 라헬의 죽음 그리고 장자 르우벤과 첩실 빌하와의 간통의 죄는 야곱이 스스로 청산할 수가 없는 아픔이며 비극입니다. 어떻게 하면 상처가 치유가 수가 있으며 이스라엘이 마음속에 평화를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처방이 하늘에서부터 땅에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애처 라헬의 죽음을 당하여 절망하고 있는 야곱의 마음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치유하고 위로해줄 수가 있을까요?

(1)   벧엘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9km 위치하고 있습니다. 라마는 8km지점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라마와는 반대로 예루살렘의 남쪽 8km지점입니다. 참고로 야곱의 부친 이삭이 살고 있는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30km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은 이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하여 벧엘에서 헤브론까지 남행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베들레헴을 의미하고 있는 에브랏까지 가고자 합니다(35:16).  

(2)   그런데 라마에 왔을 그만 길가에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산통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난산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서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라헬은 사랑하는 남편 야곱을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자신의 슬픔을 담아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35:18a). 야곱은 애처 라헬의 슬픔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하는 마음에서 아들의 이름을 자신의 오른 팔을 의미하는 베냐민으로 바꾸어서 부르고 있습니다(35:19b). 비록 22첩이 있지만 야곱은 평생을 애처 라헬만 사랑한 일편단심입니다. 그는 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요? 자신의 죽음을 듯이 야곱은 온통 사망의 비극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3)   따라서 이스라엘은 다소 마음의 위로를 얻고자 라헬의 시신을 라마에서 운구하여 베들레헴 초입에 크게 묘소를 만들고 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야곱입니다. 그때부터 라마에서는 라헬의 통곡이(2:18), 베들레헴에서는 애처 라헬을 묻고 있는 야곱의 애곡이 머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비극의 땅에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천사들을 보내어 선포하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4)   야곱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로 살아가게 되면 과연 그에게 평화가 찾아올 있을까요?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는 육신적인 삶을 이길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실까요? 그러한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생입니다. 특히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부활의 은혜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도들에게 사망의 비극을 이길 있는 믿음과 소망이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에델 망대에서 발생한 야곱 가정의 비극과 죄악을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청산하고 땅에 평화를 가져올 수가 있을까요?

(1)   야곱이 베들레헴 초입에 애처 라헬을 장사하고서 다시 일어서고 있습니다. 이제 12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스라엘이 계속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떼를 몰고서 헤브론을 향하여 다시 남행에 나섭니다. 그런데 베들레헴과 헤브론 사이에는 아주 좋은 목축지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훗날 예루살렘성전에 제물로 사용이 되는 어린양을 대대적으로 키우게 됩니다. 넓고 좋은 목축지의 중앙에는 망대를 설치할 있는 언덕이 있습니다. 이름이 에델 망대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이 밤이 되면 에델 망대에서 밤새 양떼를 지키면서 비박을 하게 됩니다. 돌아가면서 파수를 하면서 하늘의 별을 쳐다보고 언덕 아래의 양떼를 내려다보고 하면서 밤을 지내는 것입니다(2:8).

(2)   그동안 삼일장을 치르느라고 양떼들을 제대로 돌보지를 못한 야곱입니다. 따라서 에델 망대에 머물면서 들판에서 며칠 지내게 됩니다. 그때 새로운 비극이 야곱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이제 약관의 나이가 장남 르우벤이 혈기가 방자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애처 라헬의 권세를 믿고서 동안 살아온 빌하가 살길을 나름대로 모색합니다. 105세나 되는 늙은 야곱보다는 앞으로 장자 르우벤의 권세가 커질 것으로 지레 짐작을 하고서 야합을 시도한 것입니다.

(3)   평소 라헬과 언니 레아와의 경쟁관계를 알고 있는 빌하로서는 길이 안방마님 레아의 구박으로부터 자신과 그녀의 소생인 아들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섣불리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야합의 관계는 쉽게 육체적인 동맹의 관계로 발전하고 맙니다. 그것은 가장인 야곱에게 있어서는 씻을 없는 수치를 몰고 옵니다. 도저히 장남과 빌하의 간통사건을 그냥 두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죄를 다스리게 된다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마음은 들어가고 있습니다. 무거운 죄악의 기운이 이스라엘마저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4)   인간의 육신 가운데 깃들어 있는 죄악을 어떻게 하면 말끔하게 청산할 수가 있을까요? 인간의 힘과 지혜로써는 그것을 청산할 수가 없습니다. 훗날 매년 10 10일이 되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성전에서 속죄일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16:29-34). 그때 대제사장이 혼자서 지성소에 들어가서 언약궤와 뚜껑인 속죄소에 제물의 피를 뿌리고 백성들의 일년 동안의 죄를 모두 사면한다고 하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신탁의 말씀이 속죄소에서 울려 나오게 되면 대제사장은 소식을 성전의 뜰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선포하게 됩니다. 속죄의 기쁨으로 한해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5)   그러나 그것은 매년 반복이 되는 불완전한 가축의 속죄일 따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속죄의 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의 탄생의 의미는 세례 요한의 증언과 같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선포입니다. 구체적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유월절 어린양으로 자신을 희생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사실을 믿고서 회개를 하는 자들은 영원히 죄사함을 받을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7:27-28). 그것이 여호와의 기뻐하심을 입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찾아오는 방법인 것입니다(2:14).

넷째로,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을 살아가자면 어떠한 목자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만 할까요?

(1)   목자에 대한 의미가 창세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지파의 조상이 되는 12아들들의 미래에 대하여 예언의 말씀을 축복을 겸하여 전해줄 때에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주고 있는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이 들어 있습니다;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 목자의 힘입음이라”(49:24). 어째서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목자의 인도하심이 평생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있으시기를 이스라엘이 축복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베푼 용서와 생명구원의 은혜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목자의 역할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창세기를 끝내기 전에 모세는 요셉의 말을 50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50:19-21). 요셉의 마음가짐이 목자의 마음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목자는 3가지의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첫째,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로지 구원에만 힘쓰고 있습니다. 둘째,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헌신합니다. 셋째, 사람들을 인도하여 목적지까지 이르게 합니다.

(3)   요셉이 그와 같은 목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그는 7년간 계속이 애굽과 주변국들의 극심한 가뭄과 흉년으로부터 만민의 생명을 살려준 인물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해친 이복 형들을 용서해주고 도리어 애굽으로 이주시켜서 고센 땅에서 살길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110세로 소천할 때까지 형제들의 가족과 자손들을 모두 돌보아 줍니다(50:22-23). 마지막으로 출애굽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그때에는 자신의 해골을 가나안 땅에 이장시켜 달라고 당부합니다(50:24-26).

(4)   그것은 세상나라 애굽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머물고 있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낫고 그곳에 묻혀 있는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훗날 메시아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천성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결론이라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11:13-16, 26). 그러므로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목자의 삶을 살아갔으며 이제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하나님의 목자를 만나서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구원을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소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제 현실화가 되고 있습니다.

(5)   요컨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하여 백성들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또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오셔서 목자의 역할을 영적으로 맡고 계십니다(14:16-21, 1:8). 그러한 목자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땅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서 마냥 슬퍼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위로와 평화만을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목자가 되셔서 성도들을 천국에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목자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2:14, 22:28-30).

그와 같은 풍성한 의미를 의사 누가는 에델 망대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성탄절의 메시지로 전달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시면서 성도의 남은 삶을 그리스도가 발령하신 목자로서 끝까지 신실하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