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베드로후서 강해 제18강(벧후3: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 26. 15:10

베드로후서 강해 제18(벧후3: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9 21()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능력에 대하여(벧후3:3-5);

 

로마제국은 주전 192년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3세와 전쟁상태에 들어갑니다. 그 이유는 안티오쿠스3세가 애굽 원정에서 큰 성과를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지중해에서 로마제국의 세력을 몰아내고자 서진정벌(西進征伐)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의 운명이 걸린 그 전쟁에서 로마제국이 시리아의 대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얻습니다. 따라서 주전 188년에 그리스 반도와 소아시아를 차지하게 됩니다.

당시 헬라 세계의 지배자는 시리아입니다. 그러므로 시리아 안티오쿠스3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제국은 이제 헬레니즘을 청산하고 로마의 실용주의 사상으로 자신들의 속국을 다스릴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점령국에 대하여 엄청난 포용력과 선진문명에 대한 수용정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철학과 학문, 예술과 과학 등에 뛰어난 헬레니즘이 로마제국의 시대에도 꽃을 계속 피우게 됩니다.

그 영향이 사도 베드로가 구술하고 있는 본문에서도 다음과 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첫째, 헬레니즘 가운데 철학과 종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원시적인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는 영과 육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영의 세계가 육의 세계를 창조하였지만 더 이상 육의 세계에 관여를 하지 아니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고차원적인 영의 세계가 저차원인 육의 세계와 교통하거나 교류하지 아니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입니다. 그와 같은 영과 육의 분리는 히브리 사상과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2)  둘째, 영과 육으로 분리하여 사고하게 되면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세계가 그냥 우연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에서 지혜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철학적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셋째, 그 반면에 영지주의가 영과 육의 불연속성을 창조한 이후부터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시각이 헤브라이즘 및 복음사상과 완전히 달라지고 맙니다. 영의 세계에서 육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 이후부터 불간섭 불개입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헬라의 철학자들에게는 신학이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하늘의 영적인 이치를 깨닫게 되는 철학자들의 손에 맡겨지게 되는 것이므로 인간들의 인본주의 학문의 상부구조인 철학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가 된 이후에는 이 세상이 마치 무주공산(無主空山)과 같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넷째, 그와 같은 원시적인 영지주의가 그리스도의 복음사상에 다음과 같은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    첫째, 헬라의 사상체계에서는 영이신 하나님과 육의 세상과는 완전히 결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구원주로 성육신하셨다고 사도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헬라 철학자들이 인정할 수 없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원시적인 영지주의 개념을 가지고 일부 헬라파 유대인들이 초대교회와 성도들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이 적그리스도의 주장에 현혹이 되고 있다고 그의 서신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요이1:7).

2)    둘째, 헬라파 집사인 니골라는 그리스도에 의한 성도의 구원이란 영혼구원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성도의 몸은 자신의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있어서도 몸을 버리고 그 영혼이 승천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구원을 받은 성도는 그 다음에 육신적인 소욕대로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에 따라 헬레니즘의 육신적인 쾌락주의가 교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니골라 당의 발호입니다(2:14).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과 육의 온전한 구원자라고 하는 복음사상을 처음부터 마치 적그리스도처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요일2:22).

(5)  다섯째, 히브리정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1:1-31) 지금도 역사를 섭리하시고(12:29-42, 삼상2:30, 19:22-25) 이 세상의 종말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65:17-18).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세상구원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이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3:16-17).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강림도, 부활도, 하나님의 역사섭리도 모두 부정하고 있는 자들은 육신적인 탐욕과 정욕 그리고 쾌락을 쫓아 행하고 있는 자들과 함께 모두 멸망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벧후3:3-7).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하며 조롱하여”(벧후3:3);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먼저 이것을 알지니”(벧후3:3a); 베드로후서 제3장은 사도 베드로의 유훈(遺訓, 죽기 전에 후세에 남기고 있는 교훈)을 마무리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대목에서 시몬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가장 명심하도록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보다도 이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온갖 어려움과 환난을 이겨 나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 적을 먼저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모두 승리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원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연 교회와 성도들의 원수는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2)  말세조롱하는 자들이 와서”(벧후3:3b);

1)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 시대를 벌써 말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벧후3:3ba). 그러므로 사도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그때부터 말세가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그때가 바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선택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법치국가에서 법의 도달 시점에서부터 그 법이 발효가 되고 개인적으로 적용이 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2)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들려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복음을 배척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원수의 이야기가 함께 들려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악한 영들이 먼저 알아채고서 동시에 방해공작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하여 사도와 성도들이 전하고 있는 복음의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벧후3:3bb).

(3)  자기의 정욕을 따라 하며 조롱하여”(벧후3:3c); 사도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 스스로 육신적인 정욕을 따라 행하며 사람들에게 육신적인 정욕을 제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벧후3:3ca, 2:1-2). 거짓 선생들은 성도들이 쾌락을 추구해도 신앙생활을 얼마든지 영위할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화신인 뱀이 선악과를 따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로 유혹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3:1-4). 그렇게 사람들의 육신적인 정욕과 쾌락을 부추기게 되면 욕심이 발동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곧 대로 지키고자 하는 성도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조롱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벧후3:3cb).

둘째로,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3:4);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벧후3:4a); 두가지로 풀이가 됩니다;

1)    하나는 예수님의 초림(初臨, the first coming)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이신 독생자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성육신하셨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요이1:7).

2)    또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再臨, the second coming)에 관한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역사의 심판과 성도들의 완전한 구원을 위하여 반드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고 하는 약속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 사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벌써 천사들에 의하여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1:11).

3)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거듭난 인생을 함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지상명령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성화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 결과 불시에 재림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한 종이라고 하는 칭찬을 들어야만 합니다(25:19-21). 그런데 그러한 결산이 없다고 주장하는 거짓말쟁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주인이 있다는 사실도, 심판과 구원을 위하여 다시 오심도 모두 부정하고 있는 소위 영지주의 철학에 물들어 있는 유물론자들입니다(요일2:22).

(2)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3:4b); 사도 베드로가 헬라의 철학자들과 유물론자들의 생각을 이 대목에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두가지입니다;

1)   하나는 만물은 영적인 지혜가 만든 것인데 그것은 창조가 된 이후에는 영적인 세계와 결별이 된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한 마디로 무주공산이며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3:4b)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육신적인 삶을 살다가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향년대로 살았든지 병사나 사고사를 당하든지 일단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그 의식이 다시 돌아가서 그 육신을 다시 살리는 그러한 현상이 전혀 발생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조상때부터 인류의 공통된 경험입니다(벧후3:4ba). 그것은 생전에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선보였던 선지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세상사람들은 죽음이란 인생의 끝이라고 하는 철칙을 신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당연히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3:5);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벧후3:5a); 사도 베드로는 하늘이 옛적부터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천체가 땅으로 떨어지지 아니하고 자신의 궤도와 위치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천체보다 더 위대한 힘이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아니하도록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치가 욥기에 실려 있습니다(38:31-33). 그 사실을 여기서 증거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라고 하겠습니다(벧후3:5a).

(2)  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벧후3:5b); 역시 욥기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도 베드로가 원용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38:8-11).

(3)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3:5c);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지 아니하시면 악의 증폭과 확대재생산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벌써 전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체와 땅도 서로 궤도를 이탈하여 충돌함으로써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구에 있어서는 바다가 땅을 침범하여 육지가 사라지고 물이 온세상을 덮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가 달라지게 되면 지상에 살 수 있는 생명체가 사라지고 없을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창조주의 살아 계심과 그 역사하심을 증거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현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자정능력을 믿으며 유전자 불변의 법칙을 숭상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가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3:5c)고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창조주가 아니 계신다 또는 창조 후에는 완전히 피조세계에서 손을 떼고 전혀 간섭하지 아니하신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창조주께서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신 적이 없으며 예수가 그리스도도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사람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구원과 인류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그들이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일까요? 전혀 그러하지가 못합니다. 그저 파멸과 전멸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과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눈을 감고자 획책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주후 20세기 중반에 구미의 유명한 학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경쟁적으로 핵무기를 생산하였습니다. 그 결과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가 세계 제3차대전의 발생으로 한꺼번에 터진다고 하면 지구를 여러 번 전파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인류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걱정하거나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인류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므로 그 이후를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벌써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지구상의 인류가 생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핵 억지력에 의한 결과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보호하심 때문일까요?  세상의 지도자들이 모두 제정신이고 무지무지하게 현명하였기 때문에 핵 단추를 아직 누르고 있지 않다고 가정하기에는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선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인류는 당사자가 원하든지 아니하든지 상관없이 그 생존여부와 미래가 온전히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겸손하게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다시 서서 그 종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