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강해 제15강(벧후2:17-1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년 9월 18일(월)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바알브올을 섬긴 선민들과(민25:1-9) 발람의 길을 따른 군인들(민31:6-20) 그리고 니골라의(행6:5) 주장을 추종한 성도들의(계2:15)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벧후2:17-19)
본문에 들어오기 전에 사도 베드로는 발람의 길에 대하여 먼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벧후2:15). 악한 영들의 유혹에 빠져서 마치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이 행동을 하고 있는 자들의 대표적인 경우로서 우선 동방의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들어서게 되면 이제는 제17절에서 악한 영의 이단사상을 전파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들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벧후2:1, 12). 그리고 제18절에서는 그 옛날 모압 땅에서 바알브올을 섬기고 음란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민25:1-9)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발람의 꾀를 쫓아간 이스라엘 군대의 잘못을(민31:6-20) 동시에 엿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결론삼아 제19절에서는 성도들과 세상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선택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 되는지 다시 한번 생각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먼저 제17절과 제18절의 내용파악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다음과 같이 살펴봅니다;
(1) 첫째,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38년간은 시나이 반도를 위시한 남쪽의 광야에서 지냅니다. 여호와의 명령으로 그곳에 머물면서 20세 이상의 백성들이 모두 멸절하는 광경을 지켜보게 됩니다(신2:14). 예외적으로 살아남은 자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제사장들과 여분네의 아들 갈렙 및 눈의 아들인 여호수아 뿐입니다(민14:30, 20:26, 신34:5, 수14:6-15, 24:29, 33).
(2) 둘째, 38년만에 기성세대가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백성들을 이끌고 북상을 하여 요단 강 동편지역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십니다(신2:16-18, 24-25). 그러나 아브라함의 일가인 에돔 족속, 모압 족속, 암몬 족속의 땅은 정복하지 말고 평화공존을 하라고 지시하십니다(신2:4-5, 9, 19). 그러나 모압 왕 발락은 그 사실을 믿지를 않습니다. 광야의 무법자인 아말렉 족속을 그 옛날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크게 물리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울 뿐입니다(민22:3). 따라서 동방 땅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능력을 크게 행하고 있는 브올의 아들 발람의 도움을 얻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물리치려고 합니다(민22:5-6). 많은 재물과 높은 자리를 제안하면서 고위직 신하들을 재차 보내자 고민하던 선지자 발람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굽혀가면서 모압 땅으로 가고 있습니다(민22:15-21).
(3) 셋째, 사도 베드로가 발람의 이야기 가운데 취하고 하는 예화는 그의 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민22:28-30);
1) 어쩔 수 없어서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발람을 모압 왕에게 보내어주지만 발람은 이미 재물에 대한 탐욕 때문에 영안이 멀어져 있습니다. 그대로 모압 왕에게 가게 되면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예언을 할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예방하기 위하여 천사를 파견하여 칼을 들고서 그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민22:32-33).
2) 그 놀라운 광경을 미물에 불과한 발람의 나귀가 보고서 피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발람은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그 사정을 알지를 못합니다. 채찍질만 가할 뿐입니다. 하도 답답하여 나귀가 사람의 목소리로 항변을 합니다(민22:28-30). 그때서야 발람은 여호와의 역사하심과 자신의 잘못을 알아채고서 땅에 내려서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민22:31).
3) 그 대목에서 사도 베드로는 재물의 유혹에 끌려서 성도를 비롯한 사람들의 육신이 탐욕으로 물들게 되면 영적인 소경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나귀보다도 못한 마치 이성이 없는 짐승이 되어 교회와 성도들을 대적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벧후2:1, 12).
(4) 넷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압 땅 주변에 살면서 그 땅의 우상인 바알브올을 섬기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째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보다 모압의 우상인 바알브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모세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25:1-3);
1) 모세는 죽기 전에 모압 땅의 느보 산에 올라가서 요단 강 건너 서편의 가나안 땅을 전부 내려다 보게 됩니다(신34:1-6). 그런데 느보 산에서 동북쪽으로 약간 진행하면 브올 산이 있으며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면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는 아람의 도시 브돌이 있습니다. 그곳의 선지자가 브올의 아들인 발람입니다(민22:5).
2) 성경학자들은 여호와의 강력한 경고로 말미암아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예언을 할 수가 없었지만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미디안 족속의 땅에 머물면서(민22:5, 24:25, 31:8) 모압 왕인 발락에게 한가지 꾀를 제공하고 재물을 얻었다고 보고 있습니다(민31:16). 그 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할 수는 없지만 모압의 브올 산에서(민23:28)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청하여 여사제들과 혼음을 즐기게 하면 음란문화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선민들을 타락시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민31:16, 벧후2:18, 계2:14).
3) 브올의 아들인 발람의 계교는 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모세의 기록 그대로 느보 산 북서쪽인 싯딤에 머물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성들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바알브올을 음란하게 섬기면서 여호와 신앙을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로 발생한 전염병으로 2만4천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민25:9). 모세는 국난을 극복하고자 이스라엘의 군대를 보내어 미디안을 치고 브올의 아들 발람을 죽이도록 조치합니다(민31:8).
(5) 다섯째, 모세는 여호와의 뜻에 따라 미디안을 징계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합니다. 각 지파에서 천명 씩의 장정을 차출하여 1만2천명의 대군으로 미디안 땅을 공격하게 합니다(민31:5-6);
1) 모압 왕 발락과 합세하여 발람의 계교를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도모하고 있던 미디안 5왕들은 물론 그들의 비호를 받고 있던 브올의 아들 발람도 죽임을 당합니다(민31:7-8).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의 군대가 미디안의 모든 촌락을 불태우고 그 재물을 약탈해오면서 미디안의 남자들은 모두 죽였지만 여자들은 모두 사로잡아 옵니다(민31:7, 9).
2) 그것을 보고서 모세가 격노합니다(민31:13-14). 그 이유는 미디안의 여자들에게 이스라엘 남자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민31:11). 그것은 마치 발람처럼 욕심에 눈이 먼 것입니다. 바알브올을 섬기고 있는 그 여인들은 모압의 여인들처럼 발람의 꾀를 쫓아 장차 선민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성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타락시킬 것입니다(민25:1-2, 31:16). 따라서 처녀들만 남기고 모든 미디안의 유부녀들을 죽이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민31:17).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벧후2:17);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벧후2:17a); 한 마디로, 생명수가 영적으로 말라버린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에게 자신은 그녀에게 생수를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요4:10). 그 생수는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수입니다. 장차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영적으로 깨닫게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온세상에 그리스도의 영생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2)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 심령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며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이 없는 자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아 실천하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마치 그것은 물이 없는 샘과 같습니다(벧후2:17a). 말라버린 그 샘에서는 하나님의 생수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구체적으로 발람처럼 욕심에 눈이 어두워 영적으로 소경이 된 자들이며(벧후2:15-16) 악한 영들에게 유혹을 받아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벧후2:12).
(2)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벧후2:17b);
1) 아침에 해가 떠오르게 되면 바다와 지면을 뒤덮고 있던 안개가 일시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와 같이 여호와의 생명의 말씀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으로 전파가 되면 그 생명의 빛 때문에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게 됩니다(요1:4-5). 그러한 역사가 이 세상에 사람들의 심령속에서 발생하도록 성령님께서 마치 큰 동풍과 같이 어두운 영들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2) 악한 영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힘 앞에 일시에 쫓겨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벧후2:17b)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강력하게 역사하시게 되면 교회와 성도들을 탄압하고 있는 로마의 권력자들과 악한 영들이 일시에 물러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악한 영들의 행동대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들도 속절없이 패퇴하고 말 것입니다.
(3)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벧후2:17c); 악한 영들과 함께 세상의 악한 권력자인 짐승들 그리고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들이 한꺼번에 여호와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심판의 결과는 영원한 불 못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 제19장과 제20장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계19:2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0).
둘째로,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벧후2:18);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벧후2:18a); 여기서 그들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행태를 재미나는 비유의 말씀으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바리새인들은 상대적인 의로움 그것도 사람의 눈만을 의식하고 있는 가식적인 의로움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도 된 것처럼 허탄한 자랑의 말을 마구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가관이라고 하겠습니다.
(2)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벧후2:18b); 선민과 이방인들이 모두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하여 다음과 같이 올바른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1) 선민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외식적인 바리새인들로부터 사람들의 눈만 의식하는 율법생활을 하도록 종교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나서 그것이 사람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경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회개를 하고서 개종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이 이제는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2) 이방인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신론자이며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소원성취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던 그들이 이제는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전해 듣고서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를 건설하고 온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열심입니다.
(3)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벧후2:18c);
1) 그런데 교회의 성도들을 유혹하는 악한 영들의 책동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듭난 성도들이 여전히 죄악에 연약한 육신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탐욕과 음욕을 교묘하게 충동하고 있습니다.
2) 예를 들면, 원시적인 영지주의를 이용하여 구원과 육체적인 쾌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니골라 당’의 주장입니다(계2:14).
3) 그리고 그 옛날 ‘발람의 꾀’를 따라 바알 신을 섬기고 여사제와 브올 산에서 혼음을 즐기던 그 잘못된 풍습이 다시 발생하고 있습니다(민25:1, 31:16). 악한 영들이 거짓 선지자들을 내세워서 성도들의 육신적인 욕정을 충동질하고 있는 것입니다(벧후2:1-2).
셋째로,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2:19);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벧후2:19a);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게 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마지막 인생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있는 그 인생이 이제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영생이냐 아니면 영벌이냐가 결정이 되고 맙니다. 다시는 또 한번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인생이 제공이 되고 있지를 못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세가 동족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마지막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30:19-20).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영생을 얻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시종일관 자신의 인생 가운데 그 귀한 선택의 자유를 잘못 행사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한 마디로, “멸망의 종들이니”(벧후2:19a)라고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2)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2:19b);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2:19b)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무력과 힘으로써 상대방을 이기게 되면 그것이 승리자입니다. 승리자는 약한 자를 정복하고 종으로 삼으며 한 세상을 권력자로 군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원한 생명 앞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작부터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6-28).
2) 성도들은 남은 인생을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만민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세상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삶이 무엇인가를 눈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꾀와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승리자의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가장 약하고 작은 자 하나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천국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마25:40, 45-46). 그와 같은 역설적인 논리가 바로 천국의 이치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탐욕과 음욕을 버리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승리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처럼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고 이웃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헌신하는 삶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섬기는 그것이 하나님나라에서 승리자가 되고 하나님자녀의 상급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눅22:28-30, 계21:7).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 세상의 환난과 고난을 예수님의 제자답게 이기시고 하나님나라에서 승리자로 우뚝 서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느보산과 벧브올의 위치)
(느보산과 싯딤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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