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베드로후서 강해 제16강(벧후2:20-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 25. 04:51

베드로후서 강해 제16(벧후2:20-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9 19()

 

성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떠나게 되면 어찌되는가?(벧후2:20-22)

 

본문에 들어오기 직전에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2:19).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의 로마서 제12장의 몇 구절을 다음과 같이 빌려오고 싶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 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19-21).

지금 로마당국이 교회를 탄압하고 성도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로마시에서 초대교회를 돌보고 있는 사도 베드로도 곧 체포를 당하고 순교를 당할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벧후1:13-15). 어떻게 교회와 성도들이 로마제국의 핍박을 이겨낼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은 그들과 같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싸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5:44-48) 몸소 대속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보여주신 그 방법으로 싸워서 승리를 얻는 것입니다(23:34, 43, 46, 24:6-7). 그 방법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대속의 삶과 죽음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에게서 배운 방법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으로 환난을 극복하고자 시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대답을 사도 베드로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성도들은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받고 이제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옛날 육신의 탐욕과 욕정에 이끌려서 죄악된 삶을 살아가던 때를 청산하고 성령님을 모시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님의 가르치심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움을 모두 거절을 하고서 세상적인 그 옛날의 방법으로 다시 박해자들과 맞서 싸우려고 한다면 그 나중의 형편이 그 옛날의 모습보다 더욱 나빠질 것입니다(벧후2:20).  

(2)  둘째, 나중 형편이 훨씬 악화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제11장에서 벌써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11:24-26). 예수님의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더 알기 쉽게 마치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제22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비유는 베드로가 기억하고 있는  잠언 제26장의 다음 말씀입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26:11).

(3)  셋째, 시몬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살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입니다. 어획이 제법 좋다고 하더라도 식구가 많아서 생활이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는 결혼을 하여 아내가 있으며 장모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4:38). 그리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아니한 남동생 안드레를 데리고 함께 살고 있습니다(1:29). 그러므로 공부를 하거나 학문을 배울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억력은 비상합니다. 60대 중반의 나이인 그가 30년 전에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아직도 많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를 배신하게 되는 가룟 유다의 운명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14:21).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 제21절과 같이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2:20);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벧후2:20a);

1)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배워서 실천하게 되면 성도들이 세상의 더러움을 피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민 이방인 구별없이 누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면 영생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 뿐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살아가기만 하면 세상의 더러움에 휘말리지 아니하고 경건한 삶을 끝까지 살아갈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한 거룩한 삶은 영적인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육신의 탐욕과 음욕을 따라가지 아니하는 삶을 말합니다(벧후2:2-3). 그것은 육신을 지니고 있는 인간 자신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서 그 영적인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전폭적으로 따르는 대속의 삶을 살아갈 때에 가능합니다(1:8, 8:1-17).

3)    그런데 성도들이 과연 남은 인생가운데 그러한 대속의 희생과 헌신의 삶을 끝까지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세상의 환난과 핍박이 극심해지게 되면 이탈자가 속출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지금 로마시에서 초대교회를 돌보면서 로마당국의 교회탄압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그러한 배교와 배도의 현상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심정을 반영하여 지금 그의 유언과도 같은 당부의 말씀을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2)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벧후2:20b);

1)    성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본래의 성격과 습관을 고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육신이 옛날의 버릇과 습관에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가 영적인 주의를 잠시라도 게을리하게 되면 영락없이 옛날 습관과 버릇이 튀어나오고 자기 성격대로 만사를 해치우게 됩니다. 특히 지금과 같이 로마당국의 탄압이 노골적인 때가 더욱 그러합니다. 성도들도 사람인지라 부당한 로마당국의 탄압을 그대로 감수하기가 힘이 듭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으면 저항운동이라고 펼치고 싶고 그것이 어려우면 아예 교회를 떠나서 그 옛날처럼 세상 편하게 살고도 싶습니다.

2)    그러한 유혹과 시험이 대거 성도들에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에게 두가지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다시 세상의 더러움으로 돌아가 그들과 얽매여서 살아가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환난을 맞았다고 하여 거룩한 믿음의 삶을 버리고 옛날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핍박하는 자에게 지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가 옛날 버릇대로 세상적인 무력을 사용하여 그들을 대항하게 되면 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하나님께 간구를 해야만 합니다(5:44, 12:21).   

(3)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2:20c); 만약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고난을 대속의 심정으로 이겨 나가지 아니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도 베드로는 한 마디로 형편이 더욱 심하게 나빠질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1)     그것은 세상적인 역사의 전개과정을 바라보더라도 그러합니다. 영원한 제국이 없듯이 인간역사에 있어서 영원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도 없습니다. 탄압과 박해가 극에 달하게 되면 피지배자의 반란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반란군이 몰살을 당하거나 아니면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뒤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극적인 보복의 악순환이 자행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11:24-26). 만약 성도가 고난을 맞이하여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방법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를 보호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적인 방법으로 맞대응을 하거나 배교를 하게 되면 그것은 귀신을 더 많이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2:21);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벧후2:21a);

1)    진리라고 하는 것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남은 인생 가운데 그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고 자신의 삶을 복음적인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또한 그것이 만민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까지 확신하고 있는 성도가 세상의 환난과 핍박 때문에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전파와 성화의 사명을 저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2)    말 그대로 진리라고 하는 것은 겉과 속이 같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뜻이 동일한 것입니다. 그 진리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진리의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고 계십니다(16:13-15). 그런데 성도들이 그 진리의 자리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주하신 성령님께서도 그러한 성도들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진리의 성령님께서 그 자리에 여전히 머물러 계시겠습니까?

(2)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2:21b);

1)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듣게 되는 그 인생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들었기에 이제는 당사자의 선택만이 다음과 같이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①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 들이고 남은 인생을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되면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25:34-40). ②둘째, 그러하지 아니하게 되면 영벌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25:41-46).

2)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자들과 인생 가운데 전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자에게는 여전히 구원의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4:14).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인생에게는 여전히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접하였지만 선택을 잘못하게 되면 구원의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고 맙니다.

3)    그러한 의미에서 사도 베드로가 본문에서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2:21)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14:21).

셋째로,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2);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벧후2:22a); 여기서 참된 속담에라고 하는 것은 잠언에라고 하는 뜻입니다. 실제로 잠언 제26장을 살펴보면 동일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26:11).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도로 살아가다가 세상의 환난과 핍박이 심하기 때문에 배도(背道)를 하게 되면 그 나중 형편이 그 옛날의 더러움으로 돌아가는 꼴보다 더 형편이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2)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2b);

1)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에 이방인 성도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귀에 알아 듣기 쉽도록 돼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돼지를 사람들이 더러운 동물인 줄 잘못 알고서 돼지우리를 더럽게 하여 키우고 있지만 실제로 돼지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동물입니다. 특히 선민 이스라엘의 사회가 아니라 이방인의 도시 예를 들면 갈릴리 동편에 있는 거라사에는 식용돼지를 이천 마리나 키우고 있습니다(5:13).

2)    이방인 가운데 새끼 돼지를 애완용으로 엄청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돼지를 깨끗하게 목욕을 시켜서 끼고 삽니다. 그렇지만 돼지가 성장하여 제멋대로 하기 시작하여 더 이상 주인을 따르고자 하지 아니하게 되면 그 돼지를 씻기지도 아니하고 더러운 돼지우리에 돌려보내고 맙니다. 그러한 경우가 바로 세례를 받고서 거룩함을 받은 성도가 예수님처럼 더 이상 살아가지 아니하겠다고 함으로 이제는 더러운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버리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따져 놓고 보면 사도 베드로의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로마당국의 교회 핍박과 성도들에 대한 박해가 심하다고 하더라도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그 탄압을 감수하면서 온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거룩한 하나님자녀의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서 자녀의 상급을 얻는 승리의 길입니다(22:28-30).

반면에 세상적인 방법으로 대응을 하거나 아예 교회를 떠나 다시 옛날의 삶으로 되돌아가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구원의 기회를 얻지못하게 되고 그 나중의 삶은 더욱 더러운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왕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성도의 삶을 시작하였으면 세상의 환난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끝까지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