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의 골자 제9강(롬9:1-3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8. 17. 04:41

로마서 강의 골자 제9(9:1-3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8614()

 

1.    사도 바울이 지니고 있는 큰 근심이 무엇이며 그것은 그 옛날 모세의 간구와 어떻게 닮아 있는가?(9:1-3, 32:31-32)

(1)  사도 바울의 상반된 신앙고백에 대하여(8:37-39, 9:1-2);

1)    사도 바울이 자신의 구원과 성도들의 구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7-39).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2)    사도 바울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시고 공생애를 살게 하셨으며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을 감당하게 하셨다는 사실과 아버지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받들어 복음전파와 대속의 삶을 살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시키셨다는 그 사실 앞에서 한가지 진리를 깨닫고 있음(8:37-39);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믿고서 예수님의 제자로 남은 평생을 살아가게 되면 자신에게도  이 세상을 이기는 영적인 삶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부활과 영생의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임”(3:10-12).

3)    그렇게 궁극적인 승리와 부활의 산소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큰 근심과 고통을 지니고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위와 같이 그가 확신하고 있는 믿음의 승리와는 영 어울리지 아니하고 있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보이고 있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9:1-2).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4)    그것은 자기 자신의 부활과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골육이며 형제인 동족의 구원에 대한 문제가 그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임(9:3).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째서 자신의 구원만 얻는데 그치지를 않고 그토록 형제와 골육의 구원을 위하여 애타게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자신의 구원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구원과 믿음의 회복을 위하여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하고 오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실천하셨으며 그 제자인 성도들이 이제는 그 뒤를 이어서 실천해야만 하기 때문임. 요컨대, 사도 바울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기쁨으로 확신하고 있지만 아직 동족들을 구원해야만 한다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것은 아닌 것임.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간구가 무엇이며 그것은 그 옛날 모세의 간구와 어떻게 닮아 있는가?(9:3, 32:31-32)

1)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고 하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은 묘하게도 그 옛날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다음과 같은 모세의 간구와 일치하고 있는 것임;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32:31-32).

2)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 세상제국인 애굽에 파송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을 세상제국의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을 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만들고자 하시는 것임. 그 뜻이 모세를 통하여 이루어지자 여호와께서는 시내 산에 강림하셔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심; “내가 애굽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19:4-6).

3)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선택이 된 모세의 사명과 출애굽의 은혜를 입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사명이 같은 것임. 모두가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대속의 삶을 살아가는 제사장들이 되어야만 하며 거룩한 백성 곧 하나님 자녀의 성화된 삶의 모습을 온세상에 보여 주어야만 하는 것임.

4)    그러한 맥락에서 선민 이스라엘이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만 한다고 하는 시내 산 언약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통하여 고스란히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도 전달이 되고 있음. 곧 성도들이 이제는 그 사명을 완수하는 제사장이며 선지자 그리고 성도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임. 따라서 사도 바울이 동족을 구원하고자 중보기도하고 있는 모세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괴로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는 것임;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

 

2.    사도 바울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9:4-5) 그것은 육신의 자녀에게 속한 것일 뿐 약속의 자녀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9:6-9)

(1)  사도 바울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9:4-5)

1)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영광언약들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4-5).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세상에 자랑할 만한 많은 것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열거하고 있는데 그것들을 간략하게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음;

2)    먼저 3가지가 다음과 같음; ①첫째, 양자 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신의 백성이며 아들이라고 불러 주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임;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4:22),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103:13). ②둘째, 사도 바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게 되며 그것으로 하나님나라를 상속하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음(8:15-17). 그러한 은혜가 사실은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먼저 주어진 것임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임(9:4). ③셋째, 영광은 하나님 자녀의 영광을 말하고 있는 것임(8:17-18).

3)    다음으로 3가지가 다음과 같음; ④넷째, 언약은 그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으며(12:1-4) 시내 산 언약으로 이어지고 있음(19:4-6). ⑤다섯째, 여호와를 섬기는 인류최초의 신정국가 이스라엘이 시내 산 앞에서 선포가 되고 그 법률체계로서 율법이 모세를 통하여 선민들에게 주어진 것임(19:7-8, 20:18-19, 24:3-7). ⑥여섯째, 회막에 임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 앞에 서서 예배한 것임(33:10).

4)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가 다음과 같음; ⑦일곱째, 여호와의 약속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원을 회복하기 위하여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신다는 것임(7:14, 9:1-2, 11:1-9). 그것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기에(11:1) 이스라엘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탄생하게 되는 것임(9:5).

(2)  그것은 육신의 자녀에게 속한 것일 뿐 약속의 자녀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9:6-9)

1)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9:6-9); 먼저 창세기의 말씀을 풀이해보고 그 다음에 다른 말씀을 풀이해보고자 함;

2)    첫째, 아브람은 여호와의 축복의 약속만을 믿고서 아버지 데라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남하하여(12:1-5) 10년 동안이나 여호와의 선지자의 삶을 위험천만한 이방인 땅에서 살아왔지만(16:3) 약속과 달리 여호와께서는 아들을 주시지 아니하심(15:1-7). 따라서 아브람은 총애하는 충직한 젊은 가신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을 자신의 뜻으로 양자를 삼고 그를 축복해 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하고 있음(15:2-2). 그때 여호와께서는 그가 너의 후계자가 아니고 아브람의 몸에서 상속자가 태어날 것이라고 확언하심(15:4). 그에 따라 사라의 권유로 아브람은 여종인 애굽여인 하갈을 씨받이 첩으로 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얻고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고 있음(16:1-3, 15-16, 17:17-18).

3)    둘째,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방여인 하갈의 소생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계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아내인 사라에게서 약속의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심(17:15-19). 아브라함과 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어서 창조주의 놀라운 능력을 모르고 감히 비웃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들에게 익숙한 이성적인 판단과 사회적인 상식에 사로잡혀 있는 피조물들의 교만한 행동임(17:17-18, 18:12-14).

4)    셋째, 그와 같은 아브람과 사래의 잘못과 불신앙의 자세를 바로 잡아 주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실제로 다음해에 100세인 아브라함과 불임여성으로서 90세가 된 사라의 사이에 아들 이삭이 탄생하도록 창조주의 능력을 베푸신 것임(21:1-7). 그것은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창조주의 능력을 사용하신다고 하는 진리를 그들이 똑똑하게 깨닫도록 만들기 위한 것임(15:6). 그렇게 이삭이 탄생한 이유는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모두 물리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임하여 믿음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예언을 성취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

5)    넷째,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음;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0-13).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온세상에 자랑하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를 아니했으며 그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를 배척한다는 것임.

6)    다섯째, 그 대신에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곧 인간의 능력이나 방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에 의하여 만민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고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시고 복음사역자의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임. 참고로, 그와 같은 의미가 벌써 히브리정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음;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103:13),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

 

3.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서 엿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은 무엇이며(9:10-13)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째서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는가?(9:14-18)

(1)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서 엿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은 무엇인가?(9:10-13)

1)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0-13); 사도 바울이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계속 설명하고 있는 대목인데 그 내용은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참으로 어렵다고 하겠음. 그 이유는 피조물인 인간들이 살면서 익숙하게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는 그 이성적이고도 경험적인 기준과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적인 관점과 판단의 기준이 영 다른 것이기 때문임. 쉽게 설명하자면 영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 앞에 서셨을 때에 다음과 같은 통찰력과 판단력을 가지시고 벌써 그 자리에 서 계신 것인데 그것을 피조물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의 기준에 빠져서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임;

2)    첫째,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피조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한꺼번에 통찰하시고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인간 앞에 서 계신 것임.

3)    둘째,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인 사람들은 마치 아브람이나 사래처럼 그 마음 속으로 어떠한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고 교만한 비웃음을 흘리고 있는지를 하나님께서는 벌써 투시하고 계시는 것임.

4)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그 자리에서 혼내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그 교만한 생각을 고치도록 기회를 주시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심. 띠라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만들어 그들의 아들로 안겨 주신 것임(21:1-7). 그때야 비로소 비웃음이 기쁨의 웃음으로 바뀌면서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 경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임(21:33, 22:12).

5)    넷째, 그러나 한가지 여전히 풀리지 아니하는 의문사항이 남게 됨. 그것은 미래까지 통찰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어째서 리브가의 태중에 여호와의 뜻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칼로써 한 세상을 지배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에서의 기질이 자라나고 있는데 그것을 사전에 제거하지 아니하시고 계시는가? 하는 것임. 그것은 어째서 악한 영들을 완전히 토벌하지 아니하시고 이 세상에 남겨 두어서 인간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반역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것임.

6)    다섯째, 그 해답의 실마리는 하나님께서는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그 책임을 질 줄 아는 이른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지 결코 로봇을 제조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임(1:26-27). 요컨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권이 없으면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없으며 심판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임. 따라서 성경은 로봇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을 닮아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어떻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갈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을 그들의 가치관과 인생관 그리고 세계관의 변화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생동적이면서도 위대한 기록이라고 하겠음.     

(2)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완악하게도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그들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가?(9:14-18)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9:14-18); 여기서 사도 바울은 출애굽기의 기록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시작하고 있음. 그 내용은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한 그 잘못이 그의 완악한 마음에 따른 선택이냐? 아니면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잘못 때문이냐? 하는 논쟁인 것임.

2)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 두가지를 모두 출애굽기에 기록으로 남기도록 다음과 같이 조치를 하고 계심;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7:13-14),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7:22), “그러나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더라”(8:15),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9:12),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10:20). 앞의 세 문장은 바로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는 쪽으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음. 그러나 후자인 두 문장은 그것이 아님. 바로가 그렇게 완악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전적으로 바로를 그와 같은 인간형으로 만드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책임이시라는 기록임.

3)    그러므로 그 잘못된 선택의 책임이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있으므로 창조주께서 그 책임을 먼저 지신 다음에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참으로 이상한 출애굽기의 기록이 다음과 같이 그 진리의 빛을 드러내고 있음;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32:9-10),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32:34-35), “모세가 이르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8-19). 항목을 달리하여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임;

4)    첫째,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거룩한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양육하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그것이 아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출애굽의 신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제멋대로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행하고 있는 것임. 그것은 하나님말씀의 취지인 십계명을 여지없이 어기고 만 패역한 행동임(20:3-5). 따라서 진노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모조리 진멸하고 모세의 자손만으로 새로운 선민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심(32:10).

5)    둘째, 모세의 목숨을 건 중보의 기도로 여호와께서는 그 마음을 돌리시지만(32:11-14) 그들의 잘못을 잊지 않고 보응할 날이 되면 보응을 하시겠다고 선포하심(32:34).

6)    셋째, 모세는 그 보응할 날이 언제인지? 그리고 어떻게 보응하실 것인지? 나아가서 그렇게 패역한 백성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나라로 만들어 사용하실 것인지? 그것이 참으로 궁금한 것임.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상상도 할 수가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과 직결이 되고 있는 관삼사인 것임.

7)    넷째, 구체적으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변화시키는 그러한 여호와의 은혜가 역사 가운데 나타난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게 되는 창조주 하나님의 긍휼이신 것임. 그와 같은 사실을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모세의 글이 다음과 같은 것임; “모세가 이르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8-19).

8)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신 것이 보응할 날에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임.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보고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주시며 그 때까지 죄인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멸망시키지 아니하고 참아 주신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함이신 것임. 그것이 이스라엘의 장래이며 모든 인류의 미래지사이고 여호와의 역사섭리의 방향임을 알고서 모세는 훗날 느보 산에서 편히 눈을 감은 것으로 보임(34:1-7).

 

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선민 유대인들에게 설명하고 있는가?(9:19-24)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선민 유대인들의 생각은 무엇인가?(9:25-26)

(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선민 유대인들에게 설명하고 있는가?(9:19-24)

1)    혹 네가 내게 이르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9:19-24);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말하고 있음;

2)    첫째, 출애굽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두가지임; ①하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시키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는 바로의 완악함을 하나님께서는 경천동지할 재앙으로 처벌하신다는 것임. 그것이 흔히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히브리정경에 대한 지식임. ②또 하나는 다음과 같이 상당히 깊은 내용임; “여호와께서는 이방 땅에서 영광을 얻기 위하여 바로를 완악하게 만들고 그의 위력을 온 땅의 백성들에게 드러내고 계신다고 하는 것임”(9:17, 9:12, 16).

3)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로의 완악함은 그의 책임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책임인 것임.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은 바로처럼 다음과 같이 여호와 앞에서 반박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임; “혹 네가 내게 이르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9:19). 연약한 육신을 가진 피조물인 인간은 황제라고 하더라도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뜻을 거절할 수가 없는 존재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절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임. 그러므로 그 책임은 여호와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논리의 항변인 것임.

4)    둘째,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대적할 수가 없는 창조주 여호와의 명령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 순전히 여호와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지적하면서 반박을 하고 있는 인간의 행위는 어떠한 것에 속하는지를 이제부터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음; 한 마디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피조물인 인간은 감히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도전하거나 그 주권의 행사에 대하여 반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임”(9:20-21).

5)    셋째, 그 주권의 행사보다는 긍휼과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피조물을 살려 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드러내고 계신다는 것임(9:22-24). 바로를 완악하게 만드시고 그것으로 이방 땅에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그것이 결국은 애굽을 포함한 모든 이방세계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의 역사 섭리라고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음(19:22-25). 구체적으로, 완악한 죄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속자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 죄를 속죄하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임(3:16-17). 그와 같은 역사가 이 세상에 임할 때까지 죄인들을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참으신 여호와의 인내와 긍휼에 대하여 사람들은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임.

(2)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선민 유대인들의 생각은 무엇인가?(9:25-26)

1)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할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9:25-26). 호세아 선지자의 글을 원용하여 사도 바울이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의 구원계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음;

2)    첫째,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이방신을 따랐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더 이상 그들을 돌보실 실익(實益, 실제적인 이익)이 사라지신 것임. 여호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선민들이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임. 그런데 이기적인 선민사상에 빠져서 선민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문화를 도입한 것임. 따라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려버렸기에 선민의 나라가 세상의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강대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만 것임.

3)    둘째, 선민들에 대하여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시고 내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하시자 그들의 나라가 망하고 이방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된 것임. 먼 훗날 그들의 후손 가운데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부르짖고 있는 것임(6:11-13).

4)    셋째, 대속자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세계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선민의 후손들에게 전해지자 이방인들과 함께 여호와신앙을 회복하게 되는 역사가 발생하고 있음(11:9-12). 그것이 초대교회의 역사임.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며(1:7, 10-11)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임(9:26).   

 

5.    선지자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이 무엇이며(9:27-28) 사도 바울은 그 사상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9:29)

(1)  선지자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이 무엇인가?(9:27-28)

1)    또 이사아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9:27-28);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 제10장의 내용이 다음과 같음;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 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10:22-23). 서로 대조를 해보면 다음 사실을 알 수가 있음;

2)    첫째, 선지자 이사야는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 흩어져서 살다가 그 가운데 여호와신앙을 파수하는 남은 자들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예언을 하고 있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믿게 되는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아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임.

3)    둘째, 선지자 이사야는 이 세상의 멸망이 찾아오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지 못하는 세상을 멸하고 창조주의 공의를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임. 그 공의를 실천하시는 이가 바로 메시아라고 말하고 있음(11:1-5). 사도 바울은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로 벌써 이 세상에 오셨으며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이미 부활 승천하셔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임. 그러므로 주님께서 심판을 위하여 다시 오신다는 말씀임.

4)    셋째, 선지자 이사야는 예레미야의 말처럼 선민의 나라가 멸망을 하고 이어서 이방나라들이 순차적으로 모두 멸망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임(25:29). 그렇게 끝까지 멸망을 하고 남은 자들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예언하고 있음(10:23). 그에 비해서 사도 바울은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믿고서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 일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임(9:28).

(2)  사도 바울은 그 남은 자 사상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9:29)

1)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9:29);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 제1장의 내용이 다음과 같음;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1:9). 상호비교를 해보면 다음 사실을 알 수가 있음;

2)    첫째,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문화에 빠져든 선민의 백성들이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에 흩어져서 오랜 세월을 지내게 된다고 보고 있음(6:11-13). 그 후에 그들의 자손 가운데 여호와신앙을 회복하는 남은 자가 나타나게 된다고 예언하고 있는 것임. 그것이 여호와께서 남겨두시고 있는 생존자인 것임.

3)    둘째, 그와 같은 사실을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가지고 사도 바울이 다시 설명하고 있음. 그는 여호와신앙을 회복하는 남은 자나 생존자가 바로 그리스도가 전한 천국복음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서 그 씨앗을 온세상에 전파하는 일꾼들이라고 보고 있는 것임.

4)    셋째,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씨 뿌리는 비유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음;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100, 어떤 것은 60, 어떤 것은 30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13:23-24).

 

6.    선민들이 자랑하고 있는 자신들의 의와 율법생활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9:31) 그 대신에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고 있으니 그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9:30, 32)

(1)  선민들이 스스로 자랑하고 있는 자신들의 의와 율법생활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9:31)

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9:31); 선민 이스라엘이 어떠한 율법생활을 했기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지 아니하게 된 것일까요?

2)    첫째,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모두 살리고자 하시는 공의의 원칙을 지니고 있음. 그와 같은 생명사랑과 구원의 뜻을 실천하도록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일꾼인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임.

3)    둘째,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들만 율법생활을 함으로써 구원을 받고자 한 것임. 그것은 만민구원의 하나님을 이스라엘만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여호와로 바꾸어 버린 것임. 따라서 선민들은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는 주변의 이방인들을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멸망시켜 버리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그 일을 성취하는 자가 바로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인 것임.

4)    셋째,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임. 구체적으로 유대교지도자들이 백성들 앞에서 의인이라고 인정하는 그것이 그들의 구원의 기준이 되고 있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먼저 보고 계시는 여호와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있는 소위 외식적인 율법생활의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임. 그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하게 질책하신 것임(23).

(2)  그 대신에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고 있으니 그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9:30, 32)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믿음에서 난 의요”(9:30),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쳤느니라”(9:32);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을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반면에 하나님의 눈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하는 율법생활을 행위라고 말하고 있음. 따라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해짐;

2)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선민 유대인들의 율법선생인 랍비와 그들이 속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더 이상 사람들의 눈만 의식하는 가식적인 율법생활을 백성들에게 교육시키지 말고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참된 믿음생활의 모범을 보이라고 강조하고 있음.

3)    둘째,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지적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예수님을 정죄하고 로마총독의 힘을 빌려서 십자가에 처형하고 만 것임.

4)    셋째,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그의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파된 것임. 따라서 이방인들이 먼저 예수님의 믿음의 의를 이루고 있으며 유대인들은 후순위가 되고 있다고 하겠음(11:11).

 

7.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시온에 두고 있는 걸림돌은 무엇이며 그보다 훨씬 거대한 거치는 바위가 무엇인가?(9:33a)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어째서 그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가?(9:33b)

(1)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시온에 두고 있는 걸림돌은 무엇이며 그보다 훨씬 거대한 거치는 바위가 무엇인가?(9:33a)

1)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거치는 바위시온에 두노니”(9:33a); 여기서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는 각각 그 의미가 다음과 같음;

2)    첫째, 걸림돌은 율법으로 시험한 돌인 것임. 그와 같이 볼 수가 있는 이유는 이사야 제28장의 원문이 다음과 같기 때문임;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28:16).

3)    둘째, 시험을 했다고 하는 것은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지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만 지키는지를 지켜 보신 것임. 그 결과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동시에 실천하지 아니하고 율법선생인 랍비들부터 오로지 사람들이 보는 눈 앞에서만 행위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 눈가림만 하고 있다는 것임. 그래서 그들의 율법행위가 그만 걸림돌이 되고 만 것임.

4)    셋째, 이사야의 표현 그대로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백성들에게 전파하시고 그 때문에 유대교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서 그만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신 것임.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올바로 실천했기에 부활과 승천을 얻게 되신 것임.

5)    넷째,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이 유대교지도자들과 선민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의 가식적인 율법생활이 들통이 나게 되는 거치는 큰 바위가 되고 있으며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반석이 되고 있는 것임.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어째서 그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가?(9:33b)

1)    그를 믿는 자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9:33b).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 제28장의 내용이 다음과 같음;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28:16); 서로 비교를 해보면 다음을 알 수가 있음;

2)    첫째, 선지자 이사야는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심판의 때를 당하여서도 다급하게 되지를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임(28:16b).

3)    둘째,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생활의 모범으로 삼는 데서 진일보하여 그를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면 성도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언제나 부끄럽지 아니한 믿음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음(14:16-20, 24:49, 1:8).

4)    셋째, 그렇게 성도들의 남은 인생 가운데 주님께서 보호하시고 큰 힘을 주시는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가지고 증거하고 있는 것임. 왜냐하면, 성령님과 함께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고 있는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하여 그의 갈 길을 언제나 인도하여 주시고 있기 때문인 것임(16:6-7, 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