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의 골자 제10강(롬10:1-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8년 6월 21일(목)
1. 어째서 사도 바울은 동족들의 구원을 그토록 소원하고 있는가?(롬10:1) 그리고 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가?(롬10:2-4)
(1) 어째서 사도 바울은 동족들의 구원을 그토록 소원하고 있는가?(롬10:1)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10:1); 문맥상 다음과 같은 풀이가 가능한 문장임;
2) 첫째, 여기서 “형제들아”(롬10:1a)는 말은 초대교회에서 사도 바울의 글을 받아 보게 되는 성도들임; ①먼저는 로마서의 수신자임. 그들은 로마제국의 수도에 있는 자생적인 초대교회의 성도들임. ②그 다음에는 다른 초대교회의 성도들임. 바울의 로마서의 사본을 회람하게 되는 다른 지역 초대교회의 성도들인 것임. ③그 가운데에는 물론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성도들인 본토 유대인들도 포함이 되고 있는 것임. 결론적으로 “형제들아”는 선민 유대인 출신 성도 뿐만 아니라 이방인 출신 성도까지 두루 포괄하고 있는 용어인 것임.
3) 둘째, 신앙생활의 기본은 성도 자신의 소원이 주님 안에 있어야 하고 주님의 소원이 성도의 생각과 행동을 통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임.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 곧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롬10:1b)는 사도 바울이 주님께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있는 문장임. 따라서 그것은 사도 바울의 일방적인 소원인 것임. 그것에 대한 주님의 답변을 아직 사도 바울이 진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의미라고 하겠음.
4) 셋째,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일방적인 기도 제목을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10:1)고 토로하고 있음. 그것은 아직 주님의 확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 자신이 끊임 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임. 그만큼 이방인 사도로 전력투구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사실은 굉장한 애국 애족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임.
5) 흔히 기독교의 복음에는 국경이 없지만 성도들에게는 개인적으로 국경이 있다고 말하고 있음. 그 말과 같이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랍비 시절부터 무한한 애정을 지니고 있는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의 구원이 그의 간절한 소원인 것임.
(2) 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가?(롬10:2-4)
1)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2-4); 그 깊은 의미를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엄청난 애정을 가지고 사도 바울이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를 하고 있는데, 자신의 기도가 다음과 같은 응답을 받고 있다는 것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를 선민 유대인들이 버리고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임”. 유대인들이 그토록 열심히 율법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에는 불합격이라는 것임.
3)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모범을 보이고 있는 복음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기본사상에 입각하고 있음; ①하나는 선민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임. 선민 유대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선민만의 구원은 결코 아닌 것임. ②또 하나는 현세적인 선민 이스라엘 제국의 재건이 아니라 영생하는 하나님나라의 건설임. 그것은 선민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여 천국에서 함께 영생을 누리도록 한다는 것임.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생구원인 것임.
4) 셋째, 선민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저버리고 선민만의 구원과 현세적인 이스라엘 제국의 재건만을 메시아사상으로 백성들에게 강조하고 있음.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만민구원과 하나님나라의 건설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임.
5) 넷째, 그와 같은 결과는 근본적으로 선민 유대인들이 율법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지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사람들 앞에서 특히 유대교지도자들 앞에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단정하고 있는 자신들만의 인간적인 의인사상인 것임. 불행하게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영적인 인정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임. 왜냐하면, 사람의 중심을 먼저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만 의롭게 보이고자 애를 쓴 외식적(外飾的)인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임(마18:6-10, 23:5-28).
2. 모세가 말한 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한 의미가 무엇인가?(롬10:5, 레18:5)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실천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1) 모세가 말한 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한 의미가 무엇인가?(롬10:5, 레18:5)
1)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롬10:5)라는 사도 바울의 기록은 레위기의 말씀 곧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8:5)는 말씀을 원용한 것임.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말은 레위기의 그 말씀에 대한 정확한 풀이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임. 그러한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함;
2)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율법의 형식으로 주고 있음. 모세의 율법은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법률체계와 같은 것인데 그것을 ‘법률’(法律, 개인적인 자율성보다는 사회적인 강제성이 앞서는 법)이 아니라 구태여 ‘율법’(律法, 자율성을 강조하는 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신학적인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임.
3) 둘째, 신앙생활의 기본은 피조물인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해야만 된다는 것임. 그와 같은 의미가 창세기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여호와에 의하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선포가 되고 있음;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풀이를 해보자면, 사람의 중심을 먼저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게 되면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인생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임.
4) 넷째, 반대해석이 다음과 같이 가능함; “반면에 피조물인 사람들 앞에서만 율법생활을 하게 되면 그것은 창조주에 의한 구원을 얻지를 못하게 된다는 것임. 왜냐하면, 피조물은 사람의 행동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지도 못하고 온전한 구원을 줄 수도 없기 때문임”(창17:1말씀에 대한 반대해석). 그러므로 사람들의 눈 앞에서 영위하고 있는 외식적인 율법생활은 신앙생활을 마치 법률행위처럼 하고 있는 것임. 그것은 강제적으로 그리고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마음속 기쁨과 즐거움에서 멀어지고 있음. 반대로, 하나님의 눈 앞에서 먼저 행하고 있는 복음적인 삶은 성도의 하나님사랑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며 모든 계명과 율법을 이루는 대강령이 된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임(막12:30-31).
(2) 선민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실천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1) 신앙생활의 기본은 여호와 하나님의 눈 앞에서 말씀의 뜻을 묻고 그 해답을 얻어서 실천을 하는 것임(창17:1).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의 뜻이 드러나게 되면 자신의 생각과 뜻을 그것에 맞추어 나가야만 하는 조율과정이 반드시 필요함. 그 조율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습관적인 반복 기도라고 하겠음(눅22:39-42).
2) 그 기도의 과정이 결코 쉽지가 아니함.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과 뜻을 앞세우고자 하는 이기주의와 자기실현의 욕구 그리고 영생보다는 당장 현세적인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의 육신생활 가운데 가득하기 때문임. 따라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는 것임;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1-25).
3)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있는 이유를 위에서 두가지로 볼 수가 있음; ①하나는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져 주셨기 때문임. 즉, 죄에 물든 육신의 욕심을 이기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여서(눅22:42) 고난의 십자가 그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것임. ②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어 주신 것임. 성도들이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영적인 소원을 따라서 의사결정을 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또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신 것임(요14:16-20).
4) 따라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짊어진 예수님의 육신이 죽고 이제는 주님께서 영의 몸으로 부활을 얻게 하셨으니)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1-6).
5) 요컨대, ①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에 성도들이 자신의 육신의 욕심을 못박고 ②이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가는 영적인 그리고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그리스도처럼 해야만 한다는 것임. 그것이 사도 바울의 영적인 기독론이며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핵심내용임.
3. 어째서 선민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며 상대적으로 이방인들은 쉬운가? 그리고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보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롬10:6-10)
(1)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율법적인 선민사상은 어떠한 것인가?
1) 선민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여호와를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믿고서 살기로 맹세를 하고 모세가 전해주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의 법률체계로 받아 들이고 있음. 따라서 다음과 같은 율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임;
2) 첫째, 언약의 조상을 가진 이스라엘 자손들을 노예로 삼고 학대한 애굽사람들은 여호와의 진노로 재앙을 당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해방을 맞이한 것임.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는 애굽을 벌하시고 선민을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임.
3) 둘째,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려고 추격한 애굽 바로의 정예병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조리 홍해에 신위적인 방법으로 수장을 시켜 버리심.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위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해주시고 선민을 괴롭히고 있는 적군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멸망시켜 버리신다는 것임.
4) 셋째,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선민을 괴롭히고 있는 주변국들을 모두 정벌하게 하여 이스라엘 제국의 속국으로 삼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 그러므로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 제국을 다시 건설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지닌 메시아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어 주신다는 것임. 그것이 선민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임.
5) 넷째, 메시아가 선민 유대인의 땅에 오시게 되면 외세인 로마제국이나 헤롯의 왕가가 모두 무너지고 시온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며 선민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게 된다는 것임.
(2)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자면 어떠한 율법생활을 영위해야만 하는가?
1) 옛날처럼 여호와의 선민 구원의 역사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언약 안에 머물러야만 하는데 그 방법이 율법과 할례, 그리고 성전문화와 제례 의식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임.
2) 그것을 감독하는 기관이 산헤드린 대 공회이며 공회원인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잘 지켰다고 인정을 하게 되면 그들은 선민 유대인 사회에서 의인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임.
(3) 이상의 선민사상을 종합하여 요약을 해보면, 무엇을 알 수가 있는가?
1)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이 됨; ①첫째가 선민만의 구원사상임. ②둘째가 이방인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임. ③셋째가 유대교지도자들이 보기에 율법생활을 잘하면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임.
2) 따라서 그 문제점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음; ①첫째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만을 의식하는 형식적인 율법생활에 머물고 있다는 것임. ②둘째가, 이방인에게 여호와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를 아니하고 있는 지극히 이기적인 신앙생활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임.
(4) 선민들의 유대교가 히브리정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니고 있는 유일신론은 어떠한 것인가?
1) 유대교지도자들은 신명기 제6장에 기록된 쉐마의 말씀을 1차원적인 산술적인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음(신6:4-9). 따라서 오직 유일한 창조주 곧 산술적으로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전심전력으로 섬기는 것이 참된 여호와 신앙이라고 믿고 있음.
2) 그것은 인간의 산술적인 개념에 하나님의 차원 높은 신비를 가두어 버린 지극히 저(低, 낮은) 차원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함. 하지만 유대교인들은 자신들의 산술적인 유일신론에 엄청난 열심을 보이고 있음.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있을 수가 없으며 더구나 그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은 하나님의 신성을 사람의 인성으로 타락시키고 있는 여호와 모독죄에 해당한다고 정죄하고 있음.
3) 나아가서 그의 제자들이 무덤속에서 죽은 예수가 스스로 3일만에 부활하였다고 선전하면서 예수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주님으로 믿고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여 성령님으로 내주 역사하신다고 전파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혹세무민이라고 여기고 있음.
4) 따라서 그러한 신비적인 복수의 하나님을 설정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나 그의 추종자들은 말살을 시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의무라고 보고 있음. 참고로, 그러한 열심에 앞장을 섰던 자가 바로 로마서의 저자인 그 옛날의 유대교인 랍비 사울인 것임.
(5) 이방인들은 어떠한 자이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복음적인 장점은 무엇인가?
1) 이방인이란 유대인과 같은 선민사상을 지니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임. 그리고 산술적으로 하나인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론으로 가진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지 아니한 자들이 이방인들임.
2) 이방인들은 유대교인과 같은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없기에 훨씬 쉽게 예수 그리스도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임.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동일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신비로운 하나님의 비밀 곧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삼위일체의 신론까지 더 쉽게 구원의 복음으로 믿기에 이르고 있는 것임.
(6)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보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롬10:6-10)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6-10); 간단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구원의 능력을 믿는 것임.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언약의 성취와 구원을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며 그것을 이루어 주시는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임. 그러한 믿음이 올바른 것이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데 그것을 사도 바울이 여기서 ‘믿음의 의’라고 표현하고 있음.
3) 둘째, 유대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음.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능력을 선민인 자신들의 의도와 능력으로 대신할 수가 있다고 믿고 있음. 따라서 유대교지도자들 앞에서 실천하고 있는 자신들의 율법준수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의로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임.
4) 셋째, 그와 같은 유대교인들의 생각과 행동은 자력구원(自力救援)의 종교적인 가르침과 다름이 없음. 즉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구원을 성취하고자 애쓰고 있으므로 스스로 율법생활을 잘 하여 하늘에 올라가겠다고 하며 음부에 빠져 있는 자를 살려내는 신과 같은 능력의 소유자가 된다고 하는 것임.
5) 넷째, 그와 같은 사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물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제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능력으로 도달하여 있다는 것임. 그러므로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구원의 선물에 감사하면서 믿음생활을 시작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의이며 영생의 구원을 얻는 방법이라고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임(롬10:6-10).
6) 참고로, 위와 같은 사도 바울의 진술은 모세가 신명기 제30장에 벌써 기록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원용하고 있는 것임;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신30:11-16). 요컨대, 선민 유대인들은 모세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구원의 능력을 올바로 믿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외식적인 율법생활로 인위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얻고자 하는 헛된 노력을 경주한 셈이 되는 것임.
4. 예수 그리스도가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실천한 모범이 되고 있는가?(롬10:11-13)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롬10:9)
(1) 예수 그리스도가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실천한 모범이 되고 있는가?(롬10:11-13)
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사28:16)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욜2:32)”(롬10:11-13); 간략하게 풀이를 보자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떳떳하게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예루살렘에 두신 기초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음(롬10:11).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시험한 돌이며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 되시기 때문임(사28:16).
3) 둘째, 선지자 이사야가 ‘시험한 돌’이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들의 율법생활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그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눈앞에서만 하고 있는 것인지를 예수님께서 시험하고 계시기 때문임. 예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 앞에서 행한 믿음생활은 구원을 얻으며 그것이 아닌 외식적인 유대인들의 율법생활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임.
4)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임(눅22:42). 그 결과 부활의 역사가 발생하고 있음.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앞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대속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주춧돌이 되어 주신다고 하는 의미인 것임. 그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욜2:32)는 요엘 선지자의 말을 원용하여 여기서 적고 있는 것임(롬10:13);
5) 넷째, 육신을 입고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께서는 시공간에 갇혀서 살으셨지만 이제는 부활하여 영의 몸을 가지셨기 때문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 없이 모든 믿는 성도들에게 동시에 한꺼번에 영적으로 임재를 하시는 주님이 되고 계신다는 사도 바울의 지적이 바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영적으로 임하여) 부요하시도다”(롬10:12)라고 하겠음.
6) 요컨대, 육적인 삶은 한정된 피조세계의 재화를 서로 나누고 있는 것이므로 일종의 ‘제로섬’(zero-sum) 게임과 같이 궁핍한 것이지만, 영적인 삶은 주님께서 성도에게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처럼(요6:9-13) 부요한 것임.
(2)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롬10:9)
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사도 바울의 로마서 제8장의 내용을 참조하여 풀이를 해보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성도가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을 거듭난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시인하게 되면 주님께서 영적으로 임재를 하신다는 것임(롬10:9a, 8:9). 그와 같은 의미를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주님의 말씀으로 적고 있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성령님의 임재와 함께 주님의 임재가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벌써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임.
3) 둘째,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그 육신이 죽어 무덤 속으로 들어간 예수님을 살리신 이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심.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창조의 능력으로 신령한 영의 몸을 주어 예수님을 살리신 것임(고전15:44). 그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제8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4) 셋째,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는 성도들은 자신 속에 내주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부활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복음사역의 일꾼으로 살아간 후에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사실을 그 마음에 믿어야만 하는 것임. 그와 같은 영생의 부활을 마음으로 믿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임;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b).
5. 사도 바울이 복음전파와 선교의 중요성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데(롬10:14-15) 이 글을 쓰면서 그렇게 적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롬15:23-24)
(1) 사도 바울이 복음전파와 선교의 중요성을 어떻게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가?(롬10:14-15)
1)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사52:7) 함과 같으니라”(롬10:14-15); 사도 바울의 기록이 상당히 논리적임. 그만큼 설득력이 있으며 복음전파와 이방선교에 역점을 두고 있는 권면의 말씀임. 그 논리를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이사야는 선민들의 율법생활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선지자임. 그는 이사야 제6장에서 자신이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되었을 때에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 “여호와께서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하심.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께 나아와서 자신들의 신앙생활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결코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는 것임. 선민 유대인들은 여호와 앞으로 직접 나아 오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뜻을 묻지도 아니하며 제멋대로 인위적인 율법생활만 유지하다가 마침내 이방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그 백성들이 이방 땅에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는 것임. 그러나 그 중에 남은 자가 여호와의 은총을 입어 참다운 여호와 신앙의 싹을 띄우고 그것을 온 세상에 복음으로 전파하게 되는 시대가 마침내 도래하게 된다는 것임”(사6:9-13).
3) 둘째, 선지자 이사야가 선민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이 여호와 앞에서 그 뜻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방인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에 선민의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것임. 그러나 먼 훗날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고 그것을 온세상에 전파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임.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유대인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먼저 말하고 있음.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것임(롬10:15).
4) 셋째, 이방인들이 성도들이 전하고 있는 복음을 듣게 되면 그것을 믿도록 성령님께서 그 마음속에 역사를 한다는 것임(롬10:14b). 이방인출신 성도의 믿음이 성숙하게 되면 주님께서는 그를 불러서 또다른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도록 역사를 하신다는 사도 바울의 말임(롬10:14a).
5) 참고로,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보다 약800년 전에 예언하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 다음과 같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나는 그 가운데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66:20-21).
(2) 이 글을 쓰면서 그렇게 적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롬15:23-24)
1)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롬15:23-24);
2) 첫째, 사도 바울은 로마제국의 수도인 이태리 로마시에 들어가기 전에 3차례의 세계선교를 실시하고 있음; ①제1차 선교는 구브로 섬과 소아시아 남부지역에 대한 선교임(행13:4-14:28). ②제2차 선교는 소아시아 남부와 서부 그리고 유럽의 관문인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에 대한 선교임(행15:40-18:22). ③제3차 선교는 이미 개척한 소아시아 남부와 서부 그리고 그리스의 여러 교회를 다시 방문한 것임(행18:23-21:17). 이제 남은 지역은 로마에서 서유럽에 이르는 마지막 서방선교임.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롬15:23a) 라고 적고 있는 것임.
3) 둘째, 바울은 마지막 남은 서유럽 선교에 나서기 위해서는 먼저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 개척이 되어 있는 자생적인 초대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 그 이유는 두가지임; ①하나는 로마제국의 권력과 부가 집중이 되어 있는 수도인 로마시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성도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는 것임(롬15:24a). ②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 마음이 뜨거워지면 로마교회의 성도들도 서유럽선교에 나서고자 할 것이며 그 팀을 이끌고 사도 바울이 지중해 끝에 있는 서바나 곧 스페인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싶다는 것임(롬15:23b, 24b).
6. 복음이 선민 유대인에게 먼저 전파가 되었지만 어째서 그 열매가 크지 아니하며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더 열매가 많은가?(롬10:16-19) 사도 바울은 자신과 같은 선민 선교사들에 의하여 이방인들이 많이 믿게 되면 동족들의 구원이 어떻게 많이 발생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가?(롬10:19-21)
(1) 복음이 선민 유대인에게 먼저 전파가 되었지만 어째서 그 열매가 크지 아니하며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더 열매가 많은가?(롬10:16-19)
1)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사53:1),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시19:4).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신32:21) 하였고”(롬10:16-19);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사도 바울은 사도와 성도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열매를 맺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뜻과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말하고 있음(롬10:17).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들이 볼 때에는 아무도 믿지 아니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임(롬10:16).
3) 둘째, 실제로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들이고 믿는 자들이 발생하고 있음. 그것은 사도나 성도의 능력이 아니고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 그러므로 그 열매가 당장 보이지 아니한다고 복음사역자들이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임. 벌써 그 씨앗은 이방인들의 땅에 그리고 앞으로 온세상에 뿌려질 것이기 때문임;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시19:4) 하였느니라”(롬10:18).
4) 참고로, 시편의 말씀이 다음과 같음;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19:4).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위치와 움직임까지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의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기에 성도들이 부지런히 천국복음의 씨를 땅끝까지 뿌리게 되면 그 열매는 여호와의 질서와 섭리에 따라서 순서대로 거두게 되는 것임. 그 순서가 먼저는 이방이며 그 다음이 선민 유대인들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음(롬10:19).
(2) 사도 바울은 자신과 같은 선민 선교사들에 의하여 이방인들이 많이 믿게 되면 동족들의 구원이 어떻게 많이 발생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가?(롬10:19-21)
1)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신32:21) 하였고,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사65:1)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사65:2) 하였느니라 ”(롬10:19-21);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이방인들이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많이 믿게 되는 것을 보고서 선민 유대인들이 그것을 시기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된다는 것임(롬10:19). 사도 바울은 이미 모세가 신명기에서 예언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원용하여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임;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신32:21).
3) 둘째, 이사야가 훗날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먼저 전파되고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그의 선지서 제65장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음;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65:1). 실제로 그와 같은 역사가 주후 34년경부터 발생하고 있음(롬10:20).
4)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하고 나자 유대교지도자들의 박해를 피하여 유대인 성도들이 이방 땅으로 흩어져서 이방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 교포들과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임(행11:19-26). 그 결과 놀랍게도 시리아 안디옥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주후 40년대에 바나바와 바울을 서방선교사로 파송하는 조직적인 이방인 선교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 것임(행13:1-12).
5) 셋째,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들의 땅에서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선민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들이도록 기다리고 계심. 그와 같은 여호와의 마음을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을 글을 원용하여 말하고 있는 것임(롬10:21).
6) 참고로 이사야의 선지서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음;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65:2). 여기서 ‘패역’(悖逆, 패륜과 반역)이라고 하는 용어는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사용이 되고 있음(신32:20). 그 이유는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으로 삼아 주신 그 은혜를 저버리고 패륜행위와 반역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목이 곧은 백성들이 바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기 때문임(출32:7-10).
'로마서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강의 골자 제12강(롬12:1-21)(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8.19 |
---|---|
로마서 강의 골자 제11강(롬11:1-36)(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8.18 |
로마서 강의 골자 제9강(롬9:1-33)(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8.17 |
로마서 강의 골자 제8강(롬8:1-39)(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8.16 |
로마서 강의 골자 제7강(롬7:1-25)(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