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의 골자 제11강(롬11:1-3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8. 18. 20:51

로마서 강의 골자 제11(11:1-3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8628()

 

1.    사도 바울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면서 제시하고 있는 증거가 무엇이며(11:2-6)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베냐민 지파에게 어떻게 적용이 가능한 것인가?(11:1, 7)

(1)  사도 바울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면서 제시하고 있는 증거가 무엇인가?(11:2-6)

1)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000명을 남겨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11:2-6); 본문에서 찾아낼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믿음의 발견은 다음과 같은 것들임;

2)    첫째, 사람들이 인정하는 율법적인 행위의 의로움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의가 다르다는 것임. 그 증거로서 사도 바울은 열왕기상 제19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엘리야의 행적을 들고 있음; “엘리야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 내에서는 이세벨의 박해로 쫓기고 있는 자신을 숨겨줄 수 있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보고서 여호와께 자신을 편히 죽여 달라고 소원을 하고 있음.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자 7,000명을 아직 이스라엘에 남겨두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임”(왕상19:2-4, 10, 14, 18).

3)    둘째, 백성들의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믿음생활인지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만 율법을 잘 지키는 척하고 있는 행위위주의 외식적인 율법생활인지 분별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임. 따라서 선지자 엘리야도 그 식별을 쉽게 하지 못하여 절망 가운데 헤매고 있는 것임. 그렇지만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벌써 사람들의 중심을 보시고 그 내밀한 믿음의 상태를 감찰하고 계심. 따라서 엘리야의 견해와는 달리 바알 우상을 심하게 섬기고 있는 북조 이스라엘 아합 왕의 시대에도 믿음의 백성 7,000명을 알고 계시며 그들을 남겨서 보호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심. 실제로 엘리야는 하산하여 북조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길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믿음의 용사 엘리사를 만나 자신의 제자로 삼고 있는 것임(왕상19:19-21).

4)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차이를 벌써 아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심;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7:6-9). 따라서 사도 바울은 선지자들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적이 동일하며 그 진리는 사람들 앞에서만 의롭게 보이는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믿음생활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임(1:16-17).

5)    넷째, 그와 같은 선례를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을 믿음의 의라고 부르고 있음(3:20-21, 27-30). 동시에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임(4:13-16).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선을 보이고 있는 믿음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로 온세상에 퍼져 나가고 있으며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구원하는 방법론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임(3:21-31).

6)    다섯째, 종교적 암흑기 아합 왕의 시대에도 여호와 보시기에 믿음의 의를 지니고 있는 백성 7,000명을 하나님께서는 남겨 놓으시고 있음. 따라서 사도 바울은 여호와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선민들을 이방인들과 함께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임.  

(2)  그 증거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베냐민 지파에게 어떻게 적용이 가능한 것인가?(11:1, 7)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1:1),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 졌느니라”(11:7);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의 씨, 베냐민 지파(3:5), 그리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본문임;

2)    첫째,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10지파가 참여하고 있었는데(11:1a, 왕상12:20-21) 그들의 종교적인 암흑기라고 불리는 주전 9세기 중반 아합 왕의 시대에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믿음생활을 한 의인 7,000명이 남겨져 있어서 망하지 아니했음(왕상19:18). 그러나 주전 8세기 후반에 가서는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멸망이 되고 만 것임(왕하17:5-6). 그 이유는 그 남은 자들이 우둔하게 되어 한 성읍 당 10명의 의인이 없어서 망한 것으로 보임(18:23, 31, 왕하17:7-23, 11:7b).

3)    둘째,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그리고 레위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은 몇 차례의 종교개혁이 있었다는 점이 이스라엘 10지파가 참여하고 있던 북조 이스라엘 왕국과는 다른 점임. 따라서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후손들인 유다와 베냐민 그리고 레위의 자손들은 선민의식이 강하며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시대에는 선민 유대인이라고 불리고 있음(11:1c). 그러나 히스기야 왕의 뒤를 이은 므낫세 왕이 영적으로 타락하여 선민 유대인들과 함께 우상을 심하게 섬기고 무죄한 자의 피를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심히 많이 흘린 결과(왕하21:11-16) 그의 손자인 요시야 왕의 한 차례 종교개혁이 있었지만(왕하23:1-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전 586년에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마지막 선민의 나라가 멸망하고 만 것임(왕하23:26-27, 25:1-7).

4)    셋째, ‘아브라함의 씨’(11:1b)라고 하는 것은 두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 ①하나는 혈통적인 의미이고 ②또 하나는 믿음과 은혜의 의미임. 먼저 혈통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8명의 아들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씨인 것임(21:13, 25:1-6). 그러나 여호와를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를(15:6) 계승하고 있는 자는 믿음의 어머니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임.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하고 있는 믿음의 씨는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라고 하겠음(17:19, 18:14, 21:12).

5)    넷째, 혈통을 자랑하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를 온전히 계승하지를 못하고 선민 유대인들도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시대에 그러한 것임.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에 있다는 사실을 천국복음으로 전파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을 온세상에 전파하는 자가 바로 선민과 이방인 가운데서 주님의 택하심을 입은 성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임(11:7).

 

2.    이방인들이 먼저 복음을 듣고 주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선민들도 그 은혜를 누릴 수가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음(11:6-8). 그 은혜는 선민들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주어지게 되는가?(11:8-12)

(1)  이방인들이 먼저 복음을 듣고 주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선민들도 그 은혜를 누릴 수가 있다고 사도 바울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11:6-8)

1)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 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29:10, 29:4) 함과 같으니라”(11:6-8); 먼저 제9장에서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두가지 의미를 알지 못하면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본문임. ①첫번째 하나님의 영광은 토기장이의 주권과 같은 것임. 귀히 쓸 그릇을 만들거나 혹은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거나 그것은 전적으로 흙으로 그릇을 빗고 있는 토기장이의 마음이며 창조주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것임.(9:21)  그 만들어진 그릇과 같은 피조물은 감히 창조주이신 토기장이의 주권에 도전을 하거나 항변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임(9:19-20). ②두번째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상에 베푸신 은혜와 긍휼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임.

2)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은혜는 진노의 그릇을 부수어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고칠 때까지 끝까지 인내하신 것이며(9:22) 그 긍휼의 마음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임(9:23).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임(9:5). 그와 같은 사실을 참조하여 본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

3)    첫째, 이스라엘이 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임. 그런데 그것을 구하고 있는 그들의 방법이 잘못된 것임.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은혜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사람들 앞에서 열심히 율법생활을 하면 당연히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임.

4)    둘째, 여호와께서는 누가 자신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눈 여겨 보고 계심. 그렇게 믿음생활을 하는 자를 택하여 여호와의 종으로 삼으시고 계심. 그러므로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눈만 의식하고 율법생활을 하게 되면 여호와의 종이 될 수가 없으며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임. 그 반면에 이방인이라고 하더라도 여호와 앞에서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게 되면 여호와의 종으로 선택이 되는 은혜를 얻게 되며 주님의 제자로 복음사역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의 구원을 누리게 되는 것임.

5)    셋째, 사도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선민들은 마치 영적으로 눈뜬 소경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같고 그 심령이 세상적인 것으로 혼미하게 되고 말았다고 히브리정경의 말씀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는 것임(29:10, 29:4).    

(2)  하나님의 은혜는 선민들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주어지게 되는가?(11:8-12)

1)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과 듣지 못할 를 주셨다(29:10, 29:4) 함과 같으니라.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69:22-23)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1:8-12);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음;

2)    첫째, 선민들이 여호와신앙에서 실패하고 있는 이유를 사도 바울은 두가지로 보고 있음; ①하나는 선민들이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유대교의 지도자들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을 받는 율법생활을 하기에 열심이기 때문이라는 것임(29:10, 10:2-3, 29:4). ②또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는 세상일이 더 우선인 것임. 따라서 먹고 사는 일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으며, 멀리 보지를 못하고 늘 허리를 구부려서 세상적인 짧은 이익을 취하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임(69:22-23).

3)    둘째, 사람들 앞에서 의인인 체 율법생활을 하고 있는 선민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데리고 와서 자신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면 올바른 믿음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임. 그러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선민들에게 회개를 종용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지도자들이 죽여 버림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먼저 크게 전파가 되는 역사가 발생하고 있는 것임(11:11).

4)    셋째,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고 회개의 자리에 많이 나아오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의 회개와 구원도 멀지 아니하였음으로 깨닫고 있음(11:11-12). 그 이유는 믿음도 회개도 구원도 모두 사람의 노력과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며 긍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9:22-24, 11:6) 그것이 주님 안에서 풍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임(11:12, 1:14, 16-17).

 

3.    선민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가 되고 구원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면 만약 선민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풍성하게 되면 온세상에 어떠한 은혜가 주어질 것인가?(11:12-16)

(1)  랍비 사울이 이방인 사도 바울이 되는 경우와 무신론자인 이방인이 유신론자가 되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경우와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1)    선민 유대인들은 주전 15세기 출애굽 때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오고 있음. 그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구성원들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신정국가를 운영하는 법률체계인 율법으로 알고서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음.

2)    그런데 유대교인인 사울은 선민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인 랍비였음. 그는 히브리정경에 정통하고 이야기로만 전승이 되고 있는 미쉬나 곧 탈무드에 해박함. 그리고 히브리정경과 미쉬나를 비교연구하여 편찬한 미드라쉬 곧 주석도 10년 이상 공부하여 율법선생의 자격을 나이 30에 취득한 인물임.

3)    그러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음성을 가진 사람의 형상으로 만난 것임(9:1-9). 유대교에서는 오직 산술적으로 한 분 뿐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믿는 산술적인 유일신론을 가지고 있는데(6:4-5) 그것에 익숙했던 랍비 사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지니고 나타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 신론에 있어서 대 혼란을 경험하게 됨.

4)    오랜 방황과 탐구의 생활 그리고 히브리정경을 중심으로 그가 배운 미쉬나와 미드라쉬를 다시 공부하면서 그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지니고 계시는 유일한 신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게 됨(4:5-6, 고후13:13). 특히 여호와의 영광과 창조의 능력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멸망의 종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무덤 속 부활을 통하여 영생의 구원으로 나타난다고 본 것임(고전15:20-23, 3:10-14).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창조주 여호와의 영광은 한없는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인식이 되고 있는 것임.

5)    사도 바울이 오랜 랍비 생활을 통하여 그가 얻고 있는 히브리정경에 관한 지식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재해석하고 복음적인 지식의 체계화에 성공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앞으로 선민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이 되고 복음에 심취하게 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하여 풍성한 깨달음을 이 세상에 전해줄 수 있다고 하는 것임. 그와 반대로, 이방인 출신 성도들은 그러한 히브리정경에 대한 깊은 공부와 유일신론에 대한 기초가 부족하여 31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유대인 출신 성도보다 깊지 못할 수가 있다고 사도 바울이 자신의 체험으로 미루어 짐작을 하고 있는 것임.  

(2)  선민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가 되고 구원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면 만약 선민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풍성하게 되면 온세상에 어떠한 은혜가 주어질 것인가?(11:12-16)

1)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 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곡식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1:12-16);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문장임;

2)    첫째, 선민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자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먼저 전파가 되고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임.

3)    둘째, 선민 유대인들이 만약 사도 바울처럼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된다면 그들은 복음의 이해에 있어서 이방인들이 따라올 수가 없을 정도로 충만한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가 있고 그것을 온 세상에 전해줄 수가 있다는 것임.

4)    셋째,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방인 사도의 직분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임; ①하나는 랍비 사울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 땅에 전하는 사도로 살아가면서 그가 얻고 있는 그 충만한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소망을 그의 골육들이 부러워하고 시기하여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이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기 때문임. 

5)    ②또 하나는 선민만의 구원사상과 현세적인 축복사상에 깊이 빠져 있는 선민 유대인들을 버리시고 먼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통하여 이방세계에 전파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 그렇지만 선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치 죽은 자식이 살아서 돌아온 것과 같은 큰 기쁨이 될 것임. 항상 일의 뿌리를 중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와신앙의 뿌리가 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그러한 믿음의 부활의 역사가 있게 하실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임.  

 

4.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비유는 어떠한 것이며(11:17-20) 원가지와 접가지의 차이는 무엇인가?(11:21-24)

(1)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비유는 어떠한 것인가?(11:17-20)

1)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a wild olive shoot)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graft)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the olive root)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11:17-20); 다음과 같이 풀이가 됨;

2)    첫째, 사도 바울은 십여 세가 되었을 때에 부모님이 살고 계신 소아시아 길리기아 다소 성을 떠나 홀로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에게서 사숙을 한 인물임(22:3). 영특한 청소년인 사울은 15년 이상 예루살렘에 살면서 가말리엘의 수제자가 되고 나이 30에 율법선생인 랍비가 되었음. 그렇게 오래 예루살렘에 살았기에 동쪽 교외지역 감람산에 밀생하고 있는 감람나무에 대하여 많이 보고 배운 것임. 그래서 그는 감람나무(olive tree) 가운데에는 좋은 올리브를 얻을 수 있는 참감람나무가 있고 야생이며 그 열매가 신통하지 아니한 돌감람나무(wild olive tree)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

3)    둘째, 돌감람나무가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는데 그 이유는 접붙임의 뿌리가 되고 있기 때문임. 참감람나무의 가지를 일부 잘라서 돌감람나무에 접을 붙이게 되면 야생인 돌감람나무의 진액을 빨고서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튼실하게 자라는 것임. 그리하면 돌감람나무에서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얻을 수가 있게 됨.

4)    셋째, 그와 같은 자연의 이치와 접붙임의 원리를 완전히 뒤집어서 사도 바울은 그 반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임; ①일반나무는 그 가지의 품종에 따라 좋은 열매 또는 나쁜 열매가 맺히지만 영적인 나무는 그것이 아님. 그 뿌리의 진액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의 열매가 결정이 되고 있다는 것임(11:16). ②그러므로 비록 돌감람나무의 가지라고 하더라도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게 되면 그 뿌리에서 좋은 진액을 흡수하여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는 것임(11:17). 따라서 사도 바울은 다음 두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

5)    하나는 돌감람나무와 같은 이방인을 참감람나무에 접을 붙여 그 좋은 진액을 흡수하여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하나님께서는 참감람나무의 가지 일부를 꺾어 버리셨다는 것임(11:17). 꺾어버린 가지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하면서 율법행위를 하였기 때문임(11:20a). 그 대신에 대속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제자로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이방인 성도들이 그러한 믿음생활을 영위하도록 주님께 지체가 되는 접붙임을 받았다는 것임(11:20b). 어쨌든 선민 유대인들의 실패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진액을 함께 얻게 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는 것임.

6)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이 동족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강조하고 있는 사실임. 이방인 성도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민 유대인들의 상당수를 버리셨다는 그 사실을 인식하고서 선민 유대인들에 대하여 우월성을 가지거나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을 버리는 것이 옳다는 것이며(11:21-24) 이방인 자신들도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되면 언제나 선민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사도 바울의 주장임(11:20c).

(2)  원가지와 접가지의 차이는 무엇인가?(11:21-24)

1)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11:21-24); 원가지와 접가지의 차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

2)    첫째, 참감람나무의 원가지가 찍혀 나가지 아니하고 그대로 붙어 있어서 좋은 진액을 받고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 그렇게 원가지인 선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자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해야만 함. 그러한 믿음생활을 시작하지 아니하게 되면 원가지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성도들을 접붙이기 위하여 찍어 버리시는 것임(11:21a).

3)    둘째, 이방인 성도들은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다고 마냥 우쭐거릴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고자 접붙임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크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믿음생활에서 이탈한 선민 유대인들을 가차없이 찍어 내버리신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준엄하심도 함께 지니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두루 기억해야만 한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음(11:22a).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 자고(自高, 스스로를 높임)하거나 거만하게 행동하게 되면 역시 더 쉽게 찍혀 나가게 되는 것임(11:21b, 22b).

4)    셋째, 사도 바울은 접붙이는 능력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말하고 있음(11:23).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자세가 신앙생활의 처음이며 나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임. 그러한 믿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하는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영위하다가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눈 밖에 났으나 그러한 잘못된 신앙의 자세를 청산하고 주님께 돌아오게 된다면 그들의 신원회복은 참으로 빠를 것임을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음(11:24b).

5)    넷째, 이방인들은 본래 여호와를 창조주로 섬기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유물론적인 삶을 탐닉하던 자들이므로 그 본성이 좋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자들임.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긍휼로 말미암아 이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으니 부디 이방인들은 그 은혜를 알고서 옛날의 본성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임(11:24a). 

 

5.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언제까지 그러한 기회가 제공이 되고 있는가?(11:25) 선민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 들이는데 있어서 후순위가 되고 있는 또다른 이유가 무엇인가?(11:26-28)

(1)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언제까지 그러한 기회가 제공이 되고 있는가?(11:25)

1)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11:25);

2)    첫째,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기독교인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고 있다는 것임. 그 기간 동안에 선민들은 우둔하게도 전통적인 유대교를 계속 고집하게 된다는 것임.

3)    둘째, 그러나 선민 유대인들의 회개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운동이 활발하게 발생하게 되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이미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판단하고서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지적인 것임.

(2)  선민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 들이는데 있어서 후순위가 되고 있는 또다른 이유가 무엇인가?(11:26-28)

1)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59:20),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27:9, 59:21)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11:26-28);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선민 유대인들의 땅에 구원자 그리스도가 오심(59:20). 그리고 새언약의 적용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성령님의 강림도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59:21, 2:1-4). 따라서 순리대로 하면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백성들이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유대교가 기독교로 바뀌는 역사가 발생해야만 하는 것임(11:26-27). 그런데 그렇게 순리대로 복음과 구원의 역사가 진행이 되지 아니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음;

2)    첫째, 선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아니고 후순위로 밀리고 있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먼저 구원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을 관망하셨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이 보고 있음;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된 자요”(11:28a).

3)    둘째, 아무리 선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처형한 기독교의 원수들이라고 강변할지라도 한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고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음;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11:28b). 이 세상 수백을 헤아리는 민족 가운데 유독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택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여호와를 섬기는 인류 최초의 신정국가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임. 그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알기 쉽게 율법으로 주시기도 하신 것임.

4)    셋째,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사랑만 받았지 그 사랑에 보답하는 인생을 살아가지 아니한 것임. 예컨대, 그들은 선민의 권리만 주장했지 선민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고 계신 의무와 책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아니한 것임; “너희가 내게 대하여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가 되며 (죄인들을 회개시켜 구원해 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19:6).

5)    넷째,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대속의 삶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를 아니하였기에 일단 복음에서 멀어지고 후순위로 일시에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는 것임. 그것이 사도 바울이 정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섭리인 것임(11:33-36).

 

6.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었다면 하나님의 긍휼은 그 다음에 누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인가?(11:29-32)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섭리는 결국 성도들에게 무엇을 깨닫도록 하고 있는가?(11:33-36)

(1)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었다면 하나님의 긍휼은 그 다음에 누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인가?(11:29-32)

1)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11:29-32);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과 사람을 불러서 구원해 주심에 있어서는 후회가 없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음(11:29). 그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은사와 구원의 부르심을 주실 것이기 때문임. 그러므로 이제 남은 문제는 언제 누구에게 은사도 주고 구원의 자리에 불러 주시는지 그 순서임. 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음;

2)    첫째,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먼저 나아온 것임. 그들은 애굽제국의 압제 아래에서 거의 노예와 같은 삶을 100년 이상 지냈기 때문에 조상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구원해 달라고 한 목소리로 기도한 것임(2:23-25). 언약의 상대방인 믿음의 조상들을 생각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출애굽의 해방을 선물하심(3:7-12, 12:37-42). 따라서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선민이 되고 여호와의 긍휼하심을 먼저 입은 민족임(11:28-29).

3)    둘째, 이방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도 알지를 못하고 제멋대로 인생을 살고 있음(11:30a). 따라서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긍휼이 임하지를 못하고 있음. 그런데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천국복음으로 선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배척하고 십자가에 처형하고 마는 끔찍한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임.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이제는 이방인들을 긍휼하게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복음의 시대를 열고 계시는 것임(11:30b).

4)    셋째,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이 자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음.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불순종으로 여호와께서는 다시 선민 유대인들을 긍휼하게 보시고 대대적으로 구원하시는 역사의 섭리를 일으키신다는 것임(11:31).

5)    요컨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의 불순종을 계기로 하여 이방인들을 긍휼하게 여기시고 구원의 시대를 여시고 다시 이방인들의 불순종이 있게 되자 이제는 선민들을 불쌍하게 보시고 구원하시는 역사섭리를 하신다는 것임(11:32). 그와 같은 섭리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여호와의 역사섭리의 내용임.   

(2)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섭리는 결국 성도들에게 무엇을 깨닫도록 하고 있는가?(11:33-36)

1)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3-36);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음(11:33a). 그 점을 나름대로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음; “지구의 크기는 모래 알갱이와 같은 작은 입자가 약 10의 24승 개 정도 모여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주의 크기는 지구라고 하는 행성이 역시 10의 24승 개 정도 모여 있는 규모라고 합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의 존재는 우주 바깥에서 그 질서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는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

2)    첫째, 영이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를 하심. 반면에 피조물인 인간은 육신을 입고서 시간과 공간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음.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격차를 실감하게 되는 것임;  ①하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진단하고 있는 인간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시면서 말씀하심. 그러므로 그 판단의 차원을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것임(11:33b). ②또 하나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을 함. 보고 아는 것이 자신과 그 주변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한적임. 그에 비하여 영이신 여호와 앞에는 공간의 크기가 장애가 될 수가 없음.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사정을 전부 감안하여 그 모두를 돌보고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복음으로 제시하시는 것임(11:33c). 그러므로 그 영생구원의 길을 어떻게 사람들이 다 깨달아 실천을 할 수가 있을까요?

3)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한 혼자서 그 역사를 섭리하심. 아무도 하나님의 창조의 작업을 도와주지를 못함. 그와 같은 사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제사장 욥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심(38:3-41).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며 그 생명을 살리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모사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임(11:34b).

4)    셋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고 이기적이며 현세적인 욕심만을 쫓아서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는 백성들을 참으로 불쌍하게 보시고 구원하고자 하심.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시고 3년 반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지내면서 천국복음을 전하게 하심.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가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도록 하심. 그 결과 부활의 아침이 인간의 역사 가운데 찾아오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음. 그와 같은 여호와의 긍휼하심과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마음에 대하여(11:34a)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제2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음(2:5-11).

5)    끝으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관련하여 성도들에게 두가지 당부를 하고 있음; ①하나는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일찍 결심을 하고 실행을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임. 왜냐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사명을 많이 감당하게 됨으로 하나님나라에서 그 상급이 커지는 것이기 때문임(11:35). ②또 하나는 피조물인 세상만물이 결국에는 종말을 맞이하여 그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가게 된다는 것임. 따라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 “이 세상의 만물과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 인생과 역사도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섭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종착역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그 일생의 주관자이시고 그 생명의 고향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끝까지 그 종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11:36 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