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공화국(손진길 소설)

너와 나의 공화국38(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7. 16. 01:57

너와 나의 공화국38(손진길 소설)

 

20098월 하순에 열린 상록회 모임은 그 장소가 특이하게도 야당의 5선의원인 이민욱의 저택이다. 그것도 점심식사를 한 다음에 그의 지하 서재에서 열리고 있다. 그곳은 일산 호숫가에 있는 단독주택이라서 그런지 방음시설이 아주 좋다;

그동안 상록회의 계절모임은 강북에 있는 음식점의 특실을 빌려서 개최했다. 그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그곳에 있는 특실을 빌려서 개최해온 것이다. 그런데 2009년 여름모임은 특별히 자신의 집에서 낮시간에 개최하자고 이민욱 의원이 제안한 것이다.

이민욱이 오랜 친구들의 모임을 자기 집에서 가지자고 제안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기분 좋게 그 집에서 점심식사를 먼저하고 지하실에 있는 이민욱의 서재로 장소를 옮겨서 서로가 진중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에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민욱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1)  동아일보에서 오랜 세월 정치부기자로 이름을 날린 이민욱이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것은 1992년초에 현대그룹의 정주영 왕회장이 정치참여를 선언하면서 통일국민당을 만들게 되었을 때이다;

 이민욱은 그해 19923월 총선에 통일국민당 공천으로 수도권에서 출마하여 다행히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실시된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정주영이 3등을 하고 이듬해 3월에 정계를 떠나게 되자 통일국민당의 존폐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소속의원들이 여당인 민자당으로 들어갔지만 이민욱은 제1야당 민주당에 들어가서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2)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대에는 민주당이 제1야당이었으나 1995년에 김대중이 새 정당으로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어 정계에 복귀하게 되자 민주당 의원들이 대부분 그쪽으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민욱 의원도 새정치국민회의로 들어가서 오래 DJ 김대중과 정치행보를 같이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1997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이 되자 이민욱은 이듬해 19983월부터는 여당의원이 되어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200212월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DJ의 후광으로 노무현 후보가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민욱 의원 자신은 계속 여당의원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3)  이민욱은 20043월에 여소야대의 국회에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고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을 때에는 가슴이 아팠다. 따라서 한달 뒤 4월에 실시된 총선에는 우당인 열린우리당의 공천으로 출마하여 다시 재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에 노무현 대통령이 수석당원으로 들어와서 진보정치를 마음껏 펼치게 되자 이민욱 자신도 의정활동을 힘있게 할 수 있게 되어서 그것이 좋았다. 구체적으로, 전임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계승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간의 긴장관계를 크게 완화하는 한편 국내에서 경제성장의 효과가 많은 국민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복지정책의 확충에 노력하는 것이 보기에 좋았다.

(4)  그런데 200712월에 실시된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그만 정권교체가 되고 말았다. 야당인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당선이 된 것이다. 이듬해 2008225일에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고 한국정치가 보수로 회귀하게 되자 두가지 측면에서 전임 노무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하여 뒤집기를 시작했다; 하나는, 대북관계에 있어서 불법송금을 하여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자금을 지원한 셈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노대통령 일가에 비리혐의가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이 끈질기게 1년동안이나 집중적으로 수사를 계속하여 마침내 2009430일에 노무현 전임대통령을 소환하여 검찰조사를 받게 했다. 그 결과 다음달 곧 523일에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이 고향에서 사망하고 만 것이다;

(5)  그때부터 이민욱 의원 자신은 한국의 정치에 있어서 깊은 회의와 절망감을 맛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소회를 절친인 상록회원들이 아니면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개인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벌써 3달이 지난 일에 대하여 이민욱이 아직도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강훈조영백은 가슴이 아프다. 그렇지만 검찰의 수뇌부인 나아문은 달리 생각하고 있다. 그의 말이 다음과 같다; “민욱아, 나는 검찰조사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지위의 고하에 상관없이 누구나 범죄행위가 있으면 검찰조사와 기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너무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보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6)  그 말을 듣자 이민욱이 반론을 제시한다. 그가 구체적으로 들고 있는 사실이 다음과 같다; 첫째, 20081월초 이명박 당선자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노무현 대통령이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와 같이 정권의 교체를 둘러싸고 신, 구 세력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이명박 정권이 전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하여 보복을 하겠다는 하나의 빌미가 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노정권은 재벌의 비리에 대하여 강하게 단속한 것이다. 삼성의 임직원들이 그 때문에 특검의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이명박 정권은 불편하게 생각했는지 대부분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을 하고 나중에는 이건희 회장을 불러 검찰조사를 받게 하면서도 그 형량을 줄이기에 애를 쓰고 있다. 셋째, 보수정권에 대하여 북한이 위협적으로 나오고 있다. 특히 지난 5월달에는 북한이 풍계리에서 핵실험에 성공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이명박 정권은 모든 책임이 북한에게 송금을 해준 전 정권의 햇볕정책의 과오 때문이라고 몰아가고 있다. 그것이 과연 그러한 것인가?...  

그와 같은 나아문과 이민욱과의 설전을 보고 있는 강훈과 조영백의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다. 진보정치와 보수정치와의 차이가 어느 사이에 좌익과 우익의 차이만큼 커져서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의 모임을 끝내기 전에 강훈 교수가 한마디를 하고 있다; “지금은 21세기가 시작되고 벌써 10년이나 지나고 있어. 그런데 우리는 지난 20세기의 유물인 좌우익 이념투쟁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야… “;

좌중을 둘러본 다음에 강훈이 결론을 맺고 있다; “나는 1980년에 벌써 중공이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경제개발에 나섰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해. 우리가 이렇게 이념적으로 대립하여 못난 갈등과 내분을 겪고 있으면 이웃나라 좋은 일만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부디 명심해주기 바란다”.  

그러자 그날 조용히 좌중의 갑론을박을 계속 듣고 있던 조영백 의원이 한마디를 보태고 있다; “바로 며칠 전 818일에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고 말았지 않니? 5월에 노무현 대통령이, 8월에 김대중 대통령이 모두 별세하였으니 이제 와서 과거 햇볕정책의 잘잘못을 계속 따지는 것이 이상한 거야. 그러니 차제에 우리의 자주적인 국방과 안보를 튼튼히 하는 방안을 마련하여 더욱 강하게 추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

맞는 말이다. 그 말에 모두들 할 말이 없다. 그래서 그날의 뜨거운 논쟁을 마치고 다음을 기약하면서 헤어지고 만다. 아직도 일산과 서울의 늦여름 날씨가 무더운 편이다.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