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9강(눅6:1-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7. 15. 04:09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9(6:1-2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 8 31()

 

1.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밀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은 사건은 어째서 율법위반이 되는가?(6:1-2)

(1)  남의 밀을 서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1)    한국에서도 1960년대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시행되어 몇 차례 성공을 거두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시골 냇가에서는 밀을 재배한 밭이 더러 있었음. 그곳을 지나가다가 제법 익어 보이는 밀을 좀 따서 냇가에서 불에 그슬린 후 대충 손으로 비벼서 그 알갱이를 먹는 소위 밀 서리가 있었음.

2)    그것은 당시 전근대(前近代) 농업사회에서 배가 고픈 아이들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밀 서리를 하거나 늦은 봄에는 똑같은 방법으로 보리 서리를 더러 하고 있었음. 그런데 그것이 절도죄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그 피해가 크지 않다면 주의만 주고서 용서를 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그 시절에는 심심치 아니하게 있었던 것임.

3)    그와 같은 경우를 주후 1세기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제자들의 밀 서리장면으로 다시 보고 있음(6:1). 그것은 밀을 잘라서 불에 그슬리지도 아니하고 생밀을 그대로 손으로 비벼서 먹고 있는 딱한 광경임.

4)    얼마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팠으면 생밀 알곡을 손으로 탈곡하여 그냥 먹고 있는지 안스럽기 그지 없는 것임. 그러므로 그 배고픈 사정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별도의 야단을 치지 아니하시고 있음. 그 대신에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벌이고 있는 것임(6:2).

(2)  요리를 해서는 안되는 안식일 규정의 위반;

1)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이미 요리한 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16:23-25).

2)    그 나머지를 아침까지 간수하라고 하는 문장이 두가지로 해석이 가능함; ①하나는 상당한 양을 먼저 요리해놓고 나머지 만나를 다음날을 위하여 남겨 두는 것으로 볼 수가 있음. ②또 하나는 모조리 요리를 해놓고 다음날 안식일 먹을 분량을 나머지로 남겨두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음.

3)    그 가운데 율법학자들은 후자로 보고서 안식일에는 요리를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생활율법을 정하고 있는 것임.

4)    그러한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남의 밀을 꺾어서 손으로 비벼서 먹은 행위는 탈곡의 잘못과 조리의 잘못까지 범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임.

(3)  집과 회당 사이만 왕복할 수 있는 안식일 규정의 위반;

1)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17:29-30).  

2)    안식일에는 바깥출입이 금지가 되고 있음. 하지만 안식일 예배를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이나 회당을 방문할 수 있어야 함. 따라서 백성들이 집에서 성전이나 회당까지 1.5km정도까지를 왕복하는 것은 허용을 하고 있음.

3)    그런데 예수님 일행은 그 수가 13명이나 되기 때문에 회당이 있는 도시지역에 머물지를 못하고 변두리나 교외지역에서 숙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따라서 밀밭 길을 건너서 한참을 걸어서 회당에 가고 있는 것임.

4)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안식일날 먼 길을 이동하고 있는 것도 세부적인 율법규정에 어긋나고 있다고 할 것임. 그러나 그 점까지 시비를 걸고 있지는 아니함. 왜냐하면, 안식일에 남의 밀을 잘라서 탈곡의 일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게 율법위반에 해당이 되고 있기 때문임(6:2).

 

2.    예수님이 제자들을 변호하기 위하여 예로 들고 있는 것 곧 진설병을 먹은 다윗 일행의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인가?(6:3-4)

(1)  어째서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다윗과 그의 수하들에게 주고 있는가?(삼상4:21, 14:3, 21:1-6, 22:18-23, 삼하15:35, 왕상1:7)

1)    다윗은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사울 왕의 내심을 확인하게 되자 심복들과 함께 피신을 하고 있음. 사울 왕이 진을 치고 있는 벧엘을 떠나(삼상13:2) 라마로 가서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 자초지종을 알린 후에 다윗은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 나욧에 피신하고 있음(삼상19:18). 그렇지만 사울 왕이 라마 나욧까지 추격하고 있으므로 기브아로 가서 요나단의 도움을 받고 다시 남쪽으로 피신을 하고 있음(삼상13:2, 20:1, 42).

2)    다윗과 그의 심복들은 3일을 도망하여 예루살렘 약간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놉 땅에 이르고 있음(첨부한 지도 참조 요망). 그곳에는 그 옛날 실로에 있던 언약궤가 대제사장 엘리의 증손자인 대제사장 아히멜렉에 의하여 성막 안에 모셔져 있음(삼상21:1, 4).

3)    다윗은 급히 심복들과 남쪽으로 도망하느라고 무기와 식량을 미처 챙겨오지를 못했음. 따라서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음(삼상21:3-6, 9). 대충 상황을 눈치챘지만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어 준 것임.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가 없는 진설병 상에서 물린 떡을 다섯 덩이나 주고 그 옛날 골리앗의 칼도 다윗에게 준 것임.

4)    대제사장 아히멜렉의 생각은 과연 무엇일까요? 일부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이 율법을 완화하여 함부로 다윗에게 호의를 베품으로써 훗날 사울 왕으로부터 정치적인 보복을 당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해석하고 있기도 함(삼상22:18-23). 그러나 그것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하겠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해석이 여기서 달리 나타나고 있기 때문임; “배고픈 다윗 일행에게 진설병 상에서 물린 떡을 준 것이 옳다는 것임. 그것이 안식일 취지에 맞다는 것임”(삼상13:1-2 의역).

(2)  진설병 12덩어리를 여호와께 바치고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먹는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1)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임. 그 감사의 방법이 평소 진설병 떡을 바치고, 절기 때에는 추수한 첫 곡식과 각종 열매 가운데 좋은 것을 바치는 것임.

2)    그것을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일꾼인 제사장들에게 먹거리로 주고 있음. 그 의미는 여호와께 속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신다는 것임. 마찬가지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이므로 하나님께서 땅과 비를 주시고 작목을 자라게 하셔서 먹이고 입히신다는 것임.

3)    요컨대, 모든 먹을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말씀의 뜻에 따라 사용을 하라는 것임. 그 사용의 방법 가운데 분명히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레위인과 나그네가 포함이 되고 있는 것임;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10:18-19).

4)    특히 먹을 것이 없는 나그네에게 떡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고 있음. 그러므로 대제사장 아히멜렉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결코 아닌 것임. 그에 따라 홀로 살아남은 그의 아들 아비아달이 훗날 다윗 대왕에 의하여 대제사장의 반열에 오르게 됨(삼하15:35).  

(3)  진설병 떡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먹는 자는 자신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1)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함(삼상21:4-5, 19:10-11, 15). 육체적인 깨끗함과 정신적인 깨끗함을 모두 의미하고 있는 것임.

2)    진설병 떡은 훗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의미하게 됨(6:51). 그러므로 주님의 복음을 듣고 그 의미를 깨달아 실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정결하고 경건한 삶의 태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임.

3)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생명의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성도가 그 삶이 지저분하거나 더러워서는 되지 않는 것임.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경건함과 거룩함이 있어야만 하는 것임.  

 

3.    놉 땅에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세마포 에봇을 입은 자 85명이 있다고 하는 기록(삼상22:11, 18), 사울 왕이 이방인 에돔 사람 도엑에게 제사장들을 죽이도록 명령하는 기록(삼상22:16-18), 유일하게 피신한 아비아달의 성공과 실패의 기록(삼상 22:20-23, 삼하15:35, 왕상1:7) 등의 의미가 무엇인가?

(1)  어째서 놉 땅에는 에봇을 입은 제사장이 85명이나 있는가?(삼상22:11, 18)

1)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85명을 죽였고”(삼상22:18)

2)    대제사장과 제사장은 그 복장에서 차이가 나고 있음. 대제사장인 아론만이 에봇을 입고 있으며 그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은 금실과 보석으로 치장한 에봇을 입을 수가 없는 것임(28:1-4, 40). 다만 아론의 대제사장 직을 세습하고 있는 한 사람의 아들만이 아론의 예복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임(29:29, 20:28).

3)    그렇게 대제사장만이 입을 수 있는 예복과 에봇을 제사장들이 마구 제작하여 입고 있기에 놉 땅에 에봇을 입은 85명의 제사장들이 있는 것임. 그것은 종교적인 타락을 의미하고 있음. 따라서 그들이 한꺼번에 살해를 당하고 있는 것임.

4)    참고로, 대제사장의 예복이란 권력을 가진 자가 소유하고 싶어하는 옷임.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대 사사 기드온조차 에봇만은 만들어서 보관을 하고 있는 것임(8:27).

(2)  사울 왕의 주둔지인 벧엘에 가까운 놉 땅에서 왕의 가축을 치고 있는 수많은 목자들을 관리하고 있는 총책임자가 어째서 에돔 사람 도엑인가?(삼상22:16-18)

1)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이 이방인을 자신의 충복으로 부리고 있음. 에돔 사람 도엑을 자신의 가축을 치고 있는 목자들을 감독하는 총책임자로 삼고 있는 것임. 그는 선민 이스라엘의 하나님신앙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이방인들까지 신하로 부리면서 제멋대로 정치를 하고 있는 인물임.  

2)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인 도엑을 좋아할 리가 없음. 따라서 도엑은 오로지 사울 왕에게 절대 충성을 하고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고 있는 자인 것임. 사울 왕이 그 점을 잘 알고서 자신의 절대왕권의 확립에 에돔 사람 도엑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3)    그 결과 사울 왕의 명령을 받은 도엑이 서슴지 아니하고 놉 땅의 제사장 85명을 살해하고 있는 것임(삼상22:18).

(3)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의 성공과 실패가 주고 있는 교훈(삼상22:20-23, 삼하15:35, 왕상1:7);

1)    도살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자가 아비아달인데 그는 엘리 대제사장의 증손자인 대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임. 참고로 아히멜렉은 다른 이름 아히야로도 불리고 있음(삼상14:3).

2)    아비아달은 피신 중인 다윗을 찾아가서 그 사실을 알리고 그때부터 다윗의 제사장으로 성공의 길을 가게 됨. 훗날 사독과 더불어 복수의 대제사장이 되고 있음(삼하15:35).

3)    그러나 정종분리(政宗分離, 정치와 종교의 분리)의 원칙에 충실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후계자로 아도니아 왕자를 옹립하는 일에 주동자가 되어 그만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임(왕상1:7, 2:26-27).

(4)  놉 땅의 제사장들이 모두 살해가 되자 성막과 언약궤의 행방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삼하6:2, 12-15)

1)    본래 실로에서 아론의 후손인 대제사장 엘리가 성막을 짓고 언약궤를 모시고 있었음(삼상1:9). 그런데 그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불리해지자 전세를 뒤집기 위하여 실로에서 언약궤를 전쟁마당으로 옮겨간 것임(삼상4:2-4).

2)    그 결과 역전이 아니라 도리어 완패를 당하고 그들은 전사헸으며 언약궤는 블레셋의 수중에 들어감(삼상4:11).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언약궤는 재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음(삼상5-6). 따라서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게 됨. 그 결과 우여곡절 끝에 성막의 심장인 언약궤가 이스라엘 족속인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들어가고 20년 동안 보관을 하게 됨(삼상7:1-2). 그 기간이 엘리의 제자인 사무엘의 실로에서의 성장시기임.

3)    그런데 대제사장 엘리의 죽은 아들 비스하느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아히둡과 이가봇임(삼상4:21, 14:3). 아히둡의 아들인 아히멜렉이 유능하여 놉 땅에서 성막을 세우고 언약궤를 모시고 와서 대제사장 가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임(삼상14:3, ‘아히멜렉아히야로도 불리고 있음, 삼상21:1).

4)    그렇지만 그가 도피중인 다윗을 도운 일로 사울 왕에 의하여 가문이 도륙이 나고 있음. 그 결과 언약궤는 놉 땅을 떠나서 산()동네 바알레유다로 가게 되고 아비나답과 그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집에 모시고 보관하게 되는 것임(삼하6:2-3). 말이 그렇지 사울 왕의 통치기간 내내 언약궤와 성막은 거의 방치의 수준이었다고 하겠음.

 

4.    예수님의 결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6:5)는 선언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안식일이라는 날자를 모실 것인가? 아니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모실 것인가?

1)    초대교회 시대 안식일 논쟁이 심각해지자 그 논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음;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5-8).;

2)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임; ①첫째, 안식일 토요일을 중히 여기는 유대교나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중히 여기는 기독교나 모두 일리가 있다는 것임. ②둘째, 특정한 날을 중시하더라도 그것을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중시하라는 것임. ③셋째, 평생동안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기타 문제들 예를 들면, 어떤 날을 귀중히 여기고 어떤 음식을 가려서 먹고 하는 문제는 주인의 뜻을 실천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각자 마음속으로 확정하여 행하면 된다는 것임.

3)    참고로 그리스도의 종인 성도들이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주님의 뜻은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리고자 하는 것임. 그러므로 안식일도 주일도 특정 식단도 모두 그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이 되어야만 하는 것임. 결코 그 수단이 그 목적을 훼손할 수는 없다고 하겠음.

4)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결론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누구나 안식일이라는 날자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부활의 주님 그리스도를 모시고 오직 당부하신 바 지상명령의 실천을 위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임. 그러므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온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는데도 시간이 바쁜데 날자문제 식단문제 등으로 발목을 잡지 말라는 것임.

(2)  안식일 규정에 대한 마지막 유권해석은 주인의 권한이라는 말씀;

1)    안식일에 관한 세부규정은 유대교지도자들이 제정하고 있음. 그것은 모세오경에 적혀져 있는 안식일 율법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임.

2)    그 안식일 규정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규정의 위반임이 확실함. 그러나 그 자리에 안식일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와 모든 피조된 율법의 주인이 되시는 창조주 독생자께서 함께하시고 계심.

3)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영적인 안목이 있다면 먼저 주님을 경배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들부터 안식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임.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의 행위를 나무라지 않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주제넘게 자신들이 만든 안식일 세부규정의 위반이라고 질책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a nonsense happening’에 불과하다고 하겠음.  

4)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그 의견을 묻고 유권해석을 맡겨 드리는 것이 선지자와 메시아를 존중하는 태도라고 하겠음.  

(3)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것이지 율법을 믿은 것이 아님을 음미해야 할 것임;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옳다고 그 믿음의 성격을 칭찬하신 대목이 창세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져 있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아브라함이 율법이나 규정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님. 오로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있으므로 그것이 의롭다는 판정을 받고 있는 것임.

2)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창조주 여호와를 믿으며 그 말씀의 본래의 취지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율법규정과 자신들이 제정한 세부규정을 목숨처럼 중시하고 있는 것임. 그것은 피조물의 생각을 말씀을 주신 여호와의 뜻보다 앞세우고 있는 잘못인 것임.

3)    참고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올바로 실천한 유일한 사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임.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제12장 제1절에서 말하고 있음.

4)    그리고 제2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세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음; ①첫째,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창조주의 선하신 뜻임. ②둘째,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 ③셋째, 하나님의 온전한 뜻은 온전한 보상을 말하고 있음. 그것은 성도가 헌신하고 희생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상급을 이 땅에서는 영생의 부활로 그리고 하나님나라에서는 기업의 상속으로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임.

  

5.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히브리정경의 풀이를 통하여 회중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시는가?(6:6)

(1)  히브리정경에서 선지자들이 메시아의 오심에 대하여 어떻게 예언하고 있는지를 가르쳐주심;

1)    주로 대선지자인 이사야의 예언의 대목을 인용하고 계심. 특히 이사야 제7장과 제9장 그리고 제11장의 내용이 그러함.

2)    그리고 모세오경과 시편에도 메시아의 존재와 이 세상에 오심에 대하여 적혀져 있음을 밝혀 주시는 것임(24:44).

(2)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의 사명과 선민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의 역할이 어떻게 다른가를 가르쳐주심;

1)    선민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의 사명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여 시온의 영광을 온세상에 떨친다는 것임.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고향사람들에게 회당에서 그들의 속셈을 꼭 집어서 설명하신 내용과 동일한 것임(4:23-30).

2)    그러나 실제 그리스도의 사명은 그것이 아님. 한 마디로, 요나 선지자의 기적을 다시 보여주는 것임(12:39-41, 11:29-32).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그들이 멸망을 당하기 전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임. 그것을 위하여 깊은 바닷속과 같은 죽음에서 3일만에 다시 살아나는 요나 선지자의 기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임.

3)    그와 같은 의로운 여호와의 종의 대속의 사명에 대해서는 이미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예언이 되어 있음. 특히 이사야 제52장과 제53장 그리고 제61장이 그러한 것임(4:17-19, 24:44).  

 

6.    예수님을 회당예배에서 설교자로 내세우고 있는 회당장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율법위반이라는 증거를 확보하고자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상반된 모습에서 당시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유대교 내에서는 어떠한 파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는가?(6:6-7, 11)

(1)  예수님의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말씀풀이에 호의적인 갈릴리의 회당장들;

1)    예수님의 히브리정경에 대한 말씀풀이는 바리새인들의 입장과 상당히 다른 것임. 바리새인들이 선민사상에 의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만민구원사상에 의거하여 유대교의 개혁과 개방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시고 계시는 것임.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지역의 회당장들이 안식일이 되면 서로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회당에서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있음. 그 이유는 그들의 생각이 예수님의 주장과 상당히 어울리고 있기 때문임.

(2)  갈릴리 지역에서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이 큰 이유는 무엇인가?

1)    역사적으로 갈릴리는 예루살렘에 수도를 두고 있는 다윗왕조에서 보았을 때 북쪽의 변방 지역이며 갈릴리 사람들은 괄시를 받고 있었음. 특히 갈릴리 호수 서편 산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나사렛, 야비아, 가드헤벨, 가나 등 스불론의 땅이 그러함. 그리고 갈릴리 호수 북쪽 호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대도시 가버나움을 비롯한 동쪽의 납달리 땅도 예외가 아니었음. 그와 같은 사실을 이사야가 그의 선지서 제9장 제1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임.  

2)    정치적으로, 예수님 당시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을 통치하고 있는 헤롯 왕가의 분봉왕이 안디바임. 그리고 가버나움 동쪽 교외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가난한 어부들의 마을인 벳새다를 위시하여 그 이동(以東)지역은 분봉 왕 빌립이 다스리고 있음(3:1). 헤롯 빌립은 갈릴리의 북쪽 헬몬산 남쪽 기슭에 왕도인 빌립보 가아사랴에 살면서(16:13) 갈릴리 호수의 동편 거라사 지역과 요단 강 동쪽의 10개의 이방인 도시 10개로 구성이 되어 있는 데가볼리 지역까지 통치를 하고 있음(5:1, 20).

3)    그러므로 갈릴리 지역의 전체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음; ①첫째, 그 옛날 북조 이스라엘 10지파의 후손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혼혈이 되어 살고 있음(왕하17:24). ②둘째, 예루살렘을 탈출한 명문출신인 유대인들과 레위인들이 산골에 많이 숨어서 살고 있다는 것임(1:26-27, 2:22-23). ③셋째, 갈릴리 호수 동편 거라사 지방과 요단 강 동편 데가볼리 지역에는 집중적으로 이방인들이 헬라시대부터 이주를 하여 거주하고 있으므로 전반적으로 갈릴리 지역 주민들은 벌써 다민족사회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임.

4)    그와 같은 갈릴리의 특징에 따라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살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유대교의 노선을 추종하고 있는 이른바 샴마이 학파의 지지자들이라고 한다면,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벌써부터 전통적인 유대교의 개혁과 개방을 부르짖고 있는 힐렐 학파의 입장에 은근히 동조하고 있는 세력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임.

5)    따라서 갈릴리 지역은 예수님의 홈 그라운드이기도 하지만 그곳 유대인들의 개방적이고도 개혁적인 분위기가 예수님의 만민구원사상과 잘 어울리고 있다는 장점이 있음.

(3)  예루살렘 성전의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갈릴리로 파견하여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을 감시하고 있는 이유;

1)    개방적인 갈릴리의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개혁노선을 지지하면서 회당장을 중심으로 은근히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을 감싸고 돌자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바짝 긴장을 하고 있음.

2)    따라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을 위시한 산헤드린 대 공회원들은 유대교리에 밝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현지에 급파하고 있는 것임.

3)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자주 시비를 걸고 있는 인물들은 갈릴리의 지방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나 회당장들이 아니고 주로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파견한 바리새파 서기관과 랍비들 그리고 유대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인 장로들이라고 하겠음.

 

7.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면서 안식일 제정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선포하시는가?(6:8-10)

(1)  오른손 마른 사람의 병증의 특징과(6:6) 그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긍휼하심(6:10);

1)    피가 부족하거나 혈관이 막혔을 경우에 신체의 말단인 손에 공급이 되고 있는 혈액이 부족하기 마련임. 따라서 협심증이나 혈전이 생긴 경우 손에 마비가 생기고 이를 손이 마른다는 병증으로 나타나고 있음. 만약 혈액 덩어리가 뇌의 모세혈관을 막아버리게 되면 중풍이 발생하는 것임.

2)    주로 남자의 경우에 오른손 마비가 생기고 여성인 경우에 왼손 마비가 되고 있으므로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환자는 남자일 가능성이 큼. 그가 병 낫기를 간구하면서 안식일 회당예배에 참석을 하고 있는 것임(6:6).

3)    그 환자의 믿음과 간구의 내용을 이미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환자처럼(5:1-10) 그의 병을 고쳐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심. 그러나 안식일에 의원의 일을 행하는지 아니하는지 곧 안식일 율법을 지키는지 않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시선이 따가운 것임(6:7).

4)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 병자를 낫게 해줌으로써 당하게 되는 고초보다는 메시아를 찾아온 사람들을 낫게 해주고 천국으로 인도해야만 하는 자신의 사명이 훨씬 중차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그 자리에서 말씀의 능력으로 그 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것임(6:8-10).

(2)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안식일 제정의 목적(6:9-10);

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쪽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돌아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6:9-10).

2)    안식일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인생 가운데 실천하기 위한 것임.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선한 목적을 실천하는 것임. 따라서 안식일의 목적이 생명을 살리는데 있음을 알 수 있음.

3)    그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손을 치유하여 이제는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만들고자 하시는 것임.

4)    따라서 그 어떠한 율법규정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을 살리지 아니하고 해치는 악한 일에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폐기되거나 수정이 되어야만 하는 것임. 곧 유대교는 예수님의 천국복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그 미래가 없다고 하겠음.

5)    그러나 이에 반발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까 이때부터 궁리를 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임(6:11).

 

8.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밤새 산기도를 하시고 난 후 새벽에 제자들을 전부 부르시고 그 자리에서 따로 12명을 선발하여 사도라고 칭하고 계심(6:12-13). 그렇다면 12사도의 임무와 그 선발과정의 특징이 무엇인가?(6:19, 6:66-71, 1:21-23)

(1)  12사도의 임무;

1)    첫째 임무는 예수님과 끝까지 공생애를 함께하는 것임. 3 6개월간 함께 먹고 마시며 복음사역을 하고 천국복음의 내용을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실습을 하는 것임(6:66-71, 1:21-22).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남녀가 함께 전도여행을 한다고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용이 되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12사도는 남자제자 가운데서 선발이 되고 있는 것임(6:13-16).

2)    둘째 임무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임. 서로 예수님의 신위적인 치유를 먼저 받겠다고 밀치고 나서는 무리들을 정리정돈시키고 순서대로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을 사도들이 앞장서서 제자들과 함께 수행하는 것임(6:19).

3)    셋째 임무는 훗날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와 부활 승천의 의미를 목격하고 깨달은 그대로 온세상에 앞장서서 전하는 것임(28:18-20, 24:44-49).

4)    넷째 임무는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 등 3인은 예수님이 어디에 가시든지 끝까지 수행하면서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것임(17:1, 26:37). 그 이유는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해치우고자 노리고 있기 때문임.  

(2)  12사도의 선발과정의 특징;

1)    그들의 미래를 통찰하고서 선발을 해야만 함. 따라서 기도가 엄청 필요한 것임. 예수님께서는 12사도를 선발하는 인사문제를 두고서 밤새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상의를 하신 것으로 보임(6:12-13).

2)    사도로 12명을 선택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장차 스승을 배신하고 유대교지도자들에게 팔아 치우게 되는 가룟 유다를 포함시킨 것이 의외의 인사조치임(6:16).

3)    그러나 깊이 생각을 해보게 되면 그것은 절묘하면서도 상당히 예수님께 유리한 인사조치임. 왜냐하면, 12명의 사도 가운데 오로지 12분의 1에 해당이 되는 가룟 유다 한사람만이 스승님을 배신하고 적들에게 넘겨주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이기 때문임.

4)    보통 인간세상에서는 배신자의 비율이 12분의 1정도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높은 수치임.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나병환자를 한 자리에서 낫게 해주신 적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오직 한사람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자신의 결심을 밝히고 있을 정도인 것임(17:17-19). 그러므로 그것은 굉장히 잘된 선발인 것임(6:12-13).

5)    특히 배은망덕한 것이 인간세상인데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가룟 유다 한사람의 배신만을 이야기하고 있으니(6:16, 22:21-23, 13:10-11) 훗날 예수님의 체포를 보고서 비겁하게 하나같이 도망을 치게 되는 나머지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그 말씀이 진실로 고마운 것임(14:27, 31, 50).

 

9.    12사도에 대한 의사 누가의 분류방식이 어떠하며 그 특징이 무엇인가?(6:14-16)

(1)  제자로 부름을 받게 되는 순서로 적혀져 있음;

1)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6:14-16).

2)    첫째, 12사도 가운데 가장 먼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있는 제자는 누구일까요? 다음과 같이 4복음서에서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음; ①첫째, 시몬 베드로로 보고 있는 경우(5:10-11) ②둘째, 시몬의 동생인 안드레로 보고 있는 경우(1:40-42) ③셋째,  두사람이 동시에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경우임(4:18-20, 1:16-17). 의사 누가는 여기서 역시 동생인 안드레보다는 서열상 시몬 베드로를 앞세우고 있다고 하겠음(6:14).

3)    둘째,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 다음에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것은 3개의 공관복음이 공통적으로 적고 있는 순서임(4:21-22, 1:19-20, 6:14). 물론 의사 누가는 그의 복음서 제5장에서는 시몬과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선 것으로 기술하고 있음(5:10-11). 그렇지만 최종적인 12사도의 서열과 함께 그 전체명단을 수록함에 있어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부르심을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다음에 기술하고 있는 것임(6:14).

4)    셋째, 빌립과 바돌로매의 부르심에 대해서는 오로지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음;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1:43-45). 여기서 나다나엘의 또다른 이름이 바돌로매임을 알 수가 있다고 하겠음(6:14).

5)    넷째, 12사도에 관하여 관심이 많은 제자는 막내 사도인 요한임. 그는 동향 갈릴리 출신인 사도들의 부르심의 순서가 기타 지역 출신의 사도들보다 앞서고 있다고 은근히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고 있음; “그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심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다른 제자 둘이 있더니”(21:1-2). 참고로, 갈릴리 출신의 기타 사도로서는 도마의 서열이 앞서고 있으며 그 다음이 다른 두 사도인데 그들의 이름은 안드레와 마태라고 하겠음. 그런데 의사 누가는 본문에서 마태 다음에 도마를 열거하고 있는 것임(6:15). 그 이유는 세관장 레위인 마태는 그 부르심이 확실하고 도마의 경우에는 자세한 설명이 생략이 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임(5:27-28).

(2)  출신지역이 갈릴리에서부터 남쪽으로 적혀져 있음;

1)    북쪽의 변방인 갈릴리 출신 8사도를 빼고 나면 유대 땅과 예루살렘에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4명임. 그 순서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6:15-16).

2)    그들 가운데 가룟 유다가 가장 후순위로 열거가 된 이유는 두가지로 보임; ①하나는 가룟 지방이 유다의 남부이므로 북쪽인 갈릴리지역에서부터 제자를 부르실 때에 가장 후순위가 되고 있기 때문임. ②또 하나는 배신자 가룟 유다의 순서가 고의적으로 복음서의 저자들에 의하여 가장 뒤로 밀리고 있는 것임.

3)    참고로, 부친의 이름이 제자들 앞에 붙여지고 있는 경우는 유명한 가문이라는 의미임; 예를 들면,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아들 유다 등임.

4)    그리고 셀롯이라는 의미는 열심당이라는 것임. 그것은 무장독립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무리라는 뜻임.

(3)  갈릴리의 개방적인 성향과 예루살렘의 수구적인 성향을 알 수 있도록 적혀져 있음(6:13-16);

1)    12사도 가운데 예수님의 고향이 있는 홈 그라운드 갈릴리 출신이 8명이고 기타 예루살렘과 유다 출신이 4명에 불과함.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과 갈릴리 출신을 좋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2)    그 이유는 단순하게 애향심이 많아서가 아니라고 하겠음. 그 근본이유는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개방성향과 개혁성향이 예수님의 만민구원사상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음. 즉 천국복음에 대한 이해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임.

3)    반면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다 지방에 살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은 전통적인 선민사상이 아주 강함. 그 이유는 그 옛날 다윗제국의 중심이 그곳이었으며 그들은 일찍 우상문화에 빠져서 망해버린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후손들인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람들을 이방인처럼 되어버렸다고 종교적으로 멸시하고 있기 때문임.

4)    따라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다 지방의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선민종교인 유대교의 파수자라고 하는 자부심이 아주 강한 것임. 그에 따라 개혁과 개방에 앞장을 서고 있는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을 감찰하고 그를 정죄하고 처형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임.  

 

10.  갈릴리 평지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제1무리와 제2무리는 누구이며 백성들이 앞으로 밀치고 나와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6:19, 8:44-46, 5:4) 그리고 그들을 제지하는 제자들을 지휘하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6:17-19)

(1)  군중집회의 현장과 같은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의 모습;

1)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제1무리는 제자들임.

2)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제2무리는 백성들임.

3)    그 모습이 상당히 역동적임. 그 이유는 백성들이 제자들을 제치고 서로 앞다투어 예수님께 나아와서 병이 낫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임.

(2)  예수님의 안수와 그 옷자락을 만지게 되면 실제로 병이 낫게 되는가

1)    의사인 누가는 실제로 예수님을 만지면 병이 낫게 되는 효험 때문에 많은 군중들이 서로 앞으로 밀고 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음;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6:19).

2)    의사 누가가 구체적인 경우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음; “이에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8:43-46).

3)    사도 요한도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5:8-9).

(3)  아우성을 치고 있는 복음사역의 현장을 어떻게 질서 있게 유지하고 있는가?

1)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의 앞을 막아 서서 무리들이 경계 앞으로 밀치고 나아오는 것을 강력하게 제지하며 복음사역 현장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음(6:19).

2)    효과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수많은 제자들을 지휘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12제자들임.

3)    그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의 바로 옆에서 개인경호의 업무까지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하겠음.

 

11.  예수님께서 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따로 가르쳐 주시는 산상수훈의 첫째 대목,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6:20) 가운데 가난한 자는 과연 누구이며 그 대목의 풀이만으로 팔복(八福, 5:1-12)을 대신하고 있는 의사 누가의 견해는 무엇인가?(6:21-23)

(1)  가난한 세 종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1)    첫째, 이 세상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있음(6:21a); 그들이 선민 유대인 사회에서는 재산상속을 받을 수가 없었던 고아와 과부 그리고 생계수단이 사라진 레위인들과 이방 나그네들임.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 선민들의 율법적인 의무인 것임(10:18-19).

2)    둘째, 이 세상에서 슬픔으로 통곡하는 자들이 있음(6:21b); 초상이 난 경우나 사랑하는 사람이 중병에 걸렸는데 불치인 경우가 그러함. 그것은 도저히 사람의 능력으로는 낫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당사자나 보호자가 모두 가난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임. 그리고 회복할 수 없는 엄청난 상실감과 무력감을 초래하고 있는 것임.

3)    셋째, 이 세상에서 인자(人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자들(6:22-23); 종교적 정치적인 박해와 환난이 실로 무서운 것임. 그것을 성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막을 수가 없으므로 세상적인 힘 앞에서 무기력한 것임. 그러나 이 세상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음(16:33, 8:35-39).

(2)  팔복(八福)의 내용이 그 속에 모두 들어 있다고 보고 있는 의사 누가의 견해에 대하여;

1)    사도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3-12). 이상의 팔복은 ①물질적인 가난, ②인간의 능력에 대한 가난, ③예수님의 제자가 겪는 세상적인 무력함 등 세가지로 분류가 될 수 있음. 그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

2)    첫째, 물질적인 가난에 속하는 것이 ③온유, ⑤긍휼, ⑦화평 등임. 그 이유는 가난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참고 견디는 것이 온유이며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서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는 것이 긍휼이며 세상을 화평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은 것이기에 그 결과는 물질적으로 자신이 가난하게 되는 것임.

3)    둘째, 인간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겪고 있는 가난함이 바로 ①심령, ②애통, 그리고 ⑥마음의 가난으로 표현이 되고 있음; 그 이유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것임. 그리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치의 병자나 장애자를 낫게 할 수가 없으며 죽은 자를 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은 애통해하고 있는 것임. 또한 사람들은 죄성을 지니고 있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에 그 마음이 선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결코 거룩하거나 깨끗한 자가 아님.

4)    셋째, 피조물인 인간들은 ④창조주의 의로움인 ⑧공의의 정신을 올바로 실천할 수가 없기에 가난한 자들임. 자기나 자기집단이 우선이며 타인이나 타집단을 희생시키더라도 자신들만이 먼저 살고 이익을 얻고자 추구하고 있는 것이 사회생활임.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집단 내에서 정의를 실천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모든 피조물을 공평하게 돌보고 자신과 같이 귀하게 여기며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는 진정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는 결코 없는 것임.

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면 기존의 세상권력자들로부터 배척과 박해를 받으며 그 삶이 환난에 처하게 되는 것임. 그에 따라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도우심과 구원을 부르짖고 있다고 하겠음. 그들 가난한 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복이 소위 팔복인 것임.  

 

(예루살렘 북쪽 놉의 위치)

(법궤의 이동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