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1강(눅7:1-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7. 17. 03:52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1(7:1-2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 9 14()

 

1.    예수님께서 12사도를 세우시고 많은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가르치시며 또한 백성들에게 비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 그 대목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6:12-7:1)

(1)  백성들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내용에 대한 기술(6:17-19, 46-49);

1)    첫째,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 복음사역의 현장으로 몰려오는 이유는 두가지임; ①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임(6:17a). ②또 하나는 병고침을 받으려고 하는 것임(6:17b). 치유의 은사 가운데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逐邪)의 능력도 포함이 되고 있음(6:18).

2)    둘째, 모든 무리들이 예수님 가까이 나아와서 그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애를 쓰고 있음. 그 이유는 만지기만 하더라도 치유의 능력이 예수님으로부터 전이가 되고 있기 때문임(6:19). 그렇게 서로 밀치고 있으므로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질서를 잡기가 힘이 들고 있음. 그에 따라서 제자들을 나누어서 사도들이 직접 효과적으로 진두지휘를 할 수 있도록 조편성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6:12-16).

3)    셋째, 백성들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선포에 있어서는 말씀을 듣는 것에 그치지를 말고 실천하는데 힘을 쓰라고 하시는 말씀이 뒤따르고 있음(6:46-49). 왜냐하면,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영생의 구원이라고 하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가 없기 때문임(6:49, 7:21).

(2)  사도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기술(6:12-16, 20-45, 7:1);

1)    첫째, 직분자를 임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뜻을 물은 다음에 시행을 하라는 본을 보이시고 계심(6:12-16).

2)    둘째, 별도로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소위 팔복’(八福)의 내용을 가르쳐 주심(6:20-26, 5:1-12).

3)    셋째, 그리스도께서 마귀와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그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라는 것임(6:27-38). 구체적으로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며 선대하라는 것임. 그들도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임.

4)    넷째, 바리새인들처럼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심(6:39-45). 사람의 심령 속을 통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명심하라는 것임.

5)    다섯째, 복음사역은 익숙하고 편한 지역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지 못한 지역으로 계속 이동하고 움직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몸소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임(7:1).

 

2.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의 대도시 가버나움에 오자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곳 로마군대의 백부장의 역할과 그 권세는 어느 정도인가?(7:1-6)

(1)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의 역할과 그의 권세에 대하여(7:1-2);

1)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가 호수 북안(北岸, 호수의 북쪽 접경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가버나움임. 그곳에는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의 왕궁이 있고 유대인들의 큰 회당과 산헤드린 지방공회도 위치하고 있음(4:31-33, 14:10).

2)    로마제국에서는 비록 헤롯의 왕가에 가나안 일대의 통치를 위임하고 있지만 그들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것이 아님. 따라서 별도로 로마의 군대를 현지에 주둔시켜서 헤롯 왕가의 독자적인 무력사용을 통제하고 있는 것임(7:1-2).

3)    시리아총독부에는 몇 개의 로마군단이 주둔하고 있는데 그 군단병력이 시리아 전역과 가나안 일대까지 전부 군사력으로 장악하고 있는 것임. 따라서 가나안 가이사랴에 있는 유다의 총독부에는 평소에 적은 수의 로마군을 파견하고 있을 뿐임. 그 수는 4-5명의 천부장이 지휘하는 로마군대 정도이며 가이사랴의 로마총독이 그 병력으로 가나안 일대의 치안정도를 유지하고 있음.

4)    그에 따라 유대의 총독은 평소 예루살렘에 한 사람의 천부장이 이끄는 로마군대만을 파견하고 있음(18:12, 22:24). 그리고  큰 절기 때가 되면 더 많은 병력과 함께 예루살렘에 임시 주둔하여 국내외 유대인 순례객으로 붐비고 있는 예루살렘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임(23:1).

5)    기타 헤롯 왕가의 분봉 왕이 다스리고 있는 지역에는 평소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주둔하고 있음(7:1-2). 만약 위급상황이 현지에서 발생하면 먼저 가이사랴에서 파병이 되고 여의치 않으면 시리아에서 대규모의 파병이 있게 되는 것임.  그러므로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은 가히 갈릴리 지역에 있어서는 주둔 사령관에 해당하는 인물임(7:1-2).

(2)  백부장이 유대인 장로들을 보낸 이유는 무엇인가?(7:1-3)

1)    로마에서 함께 파견나와서 주둔하고 있는 자신의 부하군인이 중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기 때문임(7:2).

2)    그 백부장은 로마군인이지만 평소에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관심이 있는 자임. 따라서 어떤 병자라도 고칠 수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선지자라고 하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것임(7:3a).

3)    그렇지만 이방인인 자신이 예수님의 사역현장을 군사를 데리고 불쑥 찾아갈 수는 없는 것임. 따라서 평소 친분이 있는 산헤드린 지방공회의 장로들에게 부탁하여 예수님의 왕진을 요청하고 있는 것임(7:3b).

(3)  유대인 장로들이 앞장 서서 진심으로 이방인 백부장의 편을 들고 있는 이유(7:4-5);

1)    첫째, 백부장은 비록 로마군대의 지휘관이지만 유대인들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대접을 해주고 또한 사랑을 베풀고 있다는 것임(7:5a).

2)    둘째, 가버나움 지역에 유대교의 회당을 지을 때에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임(7:5b).

3)    그와 같은 유대인 장로들의 설명은 상당히 이채로운 것임. 특히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흘려 들을 수가 없는 것임. 피지배 민족까지 사랑하는 그 백부장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임(12:30-31).

4)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에 대하여 호의적이심. 따라서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병영(兵營)을 향하여 즉시 발걸음을 옮기고 계시는 것임(7:6).

 

3.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7:7)라는 백부장의 말은 어떠한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가?(7:3, 6-8)

(1)  자기 대신 유대인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낸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7:6-7a);

1)    유대인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 일행이 로마군대의 병영으로 향하고 계심(7:6a). 그때 백부장이 유대인 친구들을 다시 보내어 말씀을 전해오고 있음(7:6b).

2)    전갈의 내용이 세가지임; ①첫째,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자신의 집이 초라하다는 것임(7:6c). ②둘째, 로마의 백부장에 불과한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가기도 비천하다는 것임(7:7a). ③셋째, 멀리서 예수님께서 한 말씀만 하셔도 자신의 부하가 금방 낫게 되는 줄 믿고 있다는 것임(7:7b).

3)    그 가운데 예수님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세번째의 이야기인 것임.

(2)  예수님은 직접 안수가 아니라 멀리서 말씀만 하셔도 병을 고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백부장이 이미 알고 있음(7:7b-8);

1)    로마군대의 백부장은 자신의 군대경험을 가지고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하겠음; “군대는 계급과 지휘권이 확실합니다. 상관이 명령을 하면 부하는 반드시 따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영적인 세계에도 계급이 있는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피조세계의 모든 질병까지 명령 하나로 떠나가게 할 수 있는 높은 신분의 분이십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멀리서 그저 저의 부하의 질병이 떠나가도록 명령만 해주셔도 충분한 줄 압니다. 저의 친구를 보내어 대신 머리 숙여 부탁을 드립니다”(7:7b-8 의역).

2)    그와 같은 백부장의 인식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음. 그 근거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훗날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음;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신하가 가버나움 자신의 집에서 아들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멀리 가나까지 예수님을 찾아옴. 그가 엎드려 왕진을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가시지 아니하시고 그 아들이 살아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만 말씀하심. 설마하고 집으로 달려간 신하가 도중에 하인들을 만나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그 때에 아들이 곧바로 낫게 된 사실을 확인하고 있음. 그것을 보고서 그 신하의 집안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로서 천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게 된 것임”(4:46-53 의역).

3)    그러므로 로마군대의 백부장은 헤롯 분봉 왕의 신하인 그 사람과 평소 친분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신하를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하겠음.

4)    참고로 그 헤롯 왕의 신하는 의사 누가의 복음서를 참조하면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로 보이며 그의 아내가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을 그후 재물로 섬기고 있는 것임(8:3).

 

4.    예수님께서 이방인 백부장 로마사람의 믿음을 선민 이스라엘 사람의 믿음보다 더 칭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7:8-10, 벧전1:17-19)

(1)  형식적인 행동과 말로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선민 유대인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

1)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선민 유대인들의 문제점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심;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6:46),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7:6-8).

2)    사람들의 눈만 의식하는 율법생활이나 형식적인 속죄의 제사만으로는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임.

3)    그러한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영위하면서 선민만의 이기적인 축복과 현세적인 하나님의 구원만을 원하고 있으니 그들을 계속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을 실익(實益, 실제적인 이익)이 없다는 것임(13:28).

4)    그 결과 선민 이방인 구별을 떠나서 이제는 누구든지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모두 구원하겠다고 하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임(1:12-13, 5:24, 6:39).

(2)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고 있는 믿음에 대하여;

1)    예수님의 구원하심의 특징은 선민 이방인 구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음;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7-19).

2)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자는 그 출신성분이 선민이기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고 선민 이방인 상관이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주라는 사실을 믿는 자라는 사실을 사도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임.

3)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7:9).

4)    그 결과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즉시 그 백부장의 부하에게 임하고 있는 것임;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7:10).

 

5.    나사렛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인성에서 외아들의 상여를 따라가고 있는 과부를 예수님께서 불쌍하게 여기시는 이유가 무엇인가?(7:11-13)

(1)  재산을 소유할 수 없는 고대 선민사회;

1)    여자는 고대 선민 이스라엘 사회에서 재산을 소유할 수가 없음. 따라서 여자가 먹고 사는 문제는 그 일생을 통하여 재산소유권을 가진 친정 아버지, 남편, 아들의 순서로 넘어가고 있는 것임(38:11, 26-30).

2)    그러므로 선민사회에서는 재산권이 없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역시 이스라엘에서 재산을 가질 수가 없는 이방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으로 규정이 되고 있는 것임(10:18-19, 14:29b, 26:12b).

3)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들이 다른 직업을 가질 수가 없음. 그리고 기업을 경영할 수 있는 농토를 가질 수도 없음. 따라서 유대교의 십일조가 부족하여 레위인들이 굶고 있을 때에는 그 생계를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이 돌보아 주라고 하는 율법도 존재하고 있는 것임(14:29a, 26:12a).

(2)  독자인 아들이 죽어버린 과부의 난감한 신세;

1)    의사 누가가 상세하게 묘사를 하고 있음; “그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7:11-13).

2)    남편이 없는 과부인데 이제는 외아들마저 죽고 만 것임. 아들 명의로 되어 있던 재산을 계속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그 처지가 심히 딱하게 된 것임. 그 생계의 막막함이 예수님의 눈에 비쳐오고 있음.

3)    그와 같은 처지와 형편을 예수님께서 그 영적인 능력으로 벌써 통찰하고 계시는 것임. 그 점을 표현하기 위하여 여기서 의사 누가가 예수님을 라고 적고 있음;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7:13).

 

6.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가 있는 과부의 아들을 말씀으로 되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7:14-17)

(1)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임(7:16a);

1)    모세가 일찍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30:19-20).

2)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생명과 장수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모세가 증거하고 있는 구절임. 그러므로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는 것임.

3)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4)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상여의 관에서부터 말씀으로 살려 내시고 있음(7:14-15).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발휘인 것임. 따라서 그 광경을 본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임(7:16).

(2)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자가 큰 선지자(7:16b);

1)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백성들이 부르짖고 있음(7:16b). 그 말은 나인성의 주민들이 히브리정경에 적혀 있는 큰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임.

2)    주전 9세기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였던 엘리야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 마을의 과부의 아들이 죽자 하나님께 기도하여 되살려낸 적이 있음(왕상17:17-24).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의 제자인 엘리사도 수넴 여인의 아들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죽음에서 되살려내고 있음;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왕하4:32-34).

3)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임.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고 있음. 그러므로 그 두사람이 큰 선지자임.

4)    이제 800년이 지나서 나사렛 예수님께서 그와 똑 같은 기적을 나인성에서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임. 따라서 백성들이 모두 놀라고 그 옛날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큰 선지자가 다시 출현했다고 선민사회에 두루 소문을 내고 있는 것임(7:17).

 

7.    예수님의 제자로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 사도들은 누구이며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려낸 경우는 몇 번인가?(9:40-42, 20:6-12, 7:15, 8:55, 11:43-44)

(1)  예수님의 제자로서 죽은 자를 살려낸 사도들;

1)    먼저 사도 베드로가 죽은 자를 다음과 같이 살려내고 있음; “욥바에 다비다 또는 도르가라 이름하는 여성도가 있는데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다가 병들어 죽게 됨. 모든 과부가 베드로에게 생전에 그녀들의 속옷과 겉옷을 많이 지어준 도르가의 선행을 울면서 이야기함. 베드로가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다락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말하고 있음. 그러자 그녀가 눈을 뜨고 죽음에서 살아나고 있는 것임. 그 일로 말미암아 욥바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된 것임”(9:36-42 요약).

2)    그 다음으로 사도 바울이 죽은 자를 다음과 같이 살려내고 있음; “3차 세계선교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첫 항구인 드로아에서 7일간 머물게 됨. 주일(그 주간의 첫날)에 그곳 성도들과 함께 떡을 떼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있는데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이 됨. 윗다락에서 바울이 오래 강론을 하고 있는데  3층 난간에서 강론을 듣던 청년 유두고가 그만 졸음 때문에 아래로 떨어져서 죽게 됨. 바울이 아래로 급히 내려가서 그 몸에 엎드린 후에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선언을 하고 있음. 그 청년은 되살아나고 그날 강론은 은혜 가운데 밤새도록 계속이 된 것임”(20:7-12 요약).

(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려낸 경우들;

1)    히브리정경을 보면 죽은 자를 살려낸 선지자는 엘리야와 엘리사임. 그들이 각각 한번씩 죽은 자를 되살려 내고 있음(왕상17:17-24, 왕하4:32-34).

2)    의사 누가가 작성한 사도행정의 기록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또 각각 한번씩 죽은 자들 되살려내고 있음(9:36-42, 20:7-12).

3)    그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나 죽은 자를 살려 내시고 있음; ①첫째,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려 내심(7:14-16). ②둘째, 갈릴리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되살려 내심(8:51-56). ③셋째, 베다니 나사로를 죽은지 4일만에 되살려 내심(11:39-44).

 

8.    선지자와 사도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하여 죽은 자가 되살아난 경우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24:1-12, 30-31, 39, 50-51)

(1)  죽은 자를 하나님께 기도하여 되살려낸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어떻게 되고 마는가?

1)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여호와께 간구하여 죽은 자를 살려 내고 있음. 그러나 되살아난 그들이 다시 향년을 맞이하고 죽게 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

2)    예수님께서 세 차례나 죽은 자를 살려 내셨지만 그들 역시 다시 향년을 맞이하고 죽게 되는 것임.

3)    백성들이 칭송하는 큰 선지자로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 하나님의 기적까지 선보인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바울도 모두 목숨이 다하자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 것임.

4)    그들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를 만나 부활하여 천국으로 인도가 된다고 하겠음(5:24-29, 22:28-30).

(2)  예수님 자신은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고 또한 어떻게 부활하고 계시는가?

1)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그 이후의 역사는 일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과 다음과 같이 다르다고 하겠음; ①첫째,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의 몸을 속죄의 제물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고 있음(23:34, 43, 46-47. 1:29).

2)    둘째, 그로 말미암아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게 됨(1:12-13, 3:16-17).

3)    셋째, 예수님께서 스스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공생애와 대속의 죽으심으로 실천하셨기에 그 공로로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무덤속에서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임(24:5-6, 46-53).

4)    그로 말미암아 이제는 예수님처럼 그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주님처럼 부활하여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게 된 것임(5:24, 22:28-30). 그것이 한 마디로, ‘천국복음이라고 하겠음.  

 

9.     옥중의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 2사람을 예수님께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7:18-20)

(1)  갈릴리 가버나움의 감옥에서 세례 요한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1)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은 자신의 석방임. 그러므로 세례 요한 역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을 구출해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임.

2)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앞길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반년 먼저 이 세상에 온 전령임(1:17). 그러므로 그는 메시아께서 가시는 길을 안내하고자 미리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의 잘못을 질책하면서 선민사회에서 백성들을 선동하고자 외세 배격의 봉화를 올리고 있는 것임(14:3-4).

3)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고 하겠음;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는 놀라운 여호와의 능력으로 외세인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를 물리치시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실 것임”. 그 일에 자신이 앞장을 서기 위하여 먼저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의 잘못을 질책하면서 투옥이 되고 있다는 것임.

4)    그러나 갈릴리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 요한 자신을 전혀 돌아보지 아니하고 계시는 것임. 여러 달이 지나가도 감감무소식이므로 세례 요한이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여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의 복음사역 현장에 보내어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것임(7:18-19).

(2)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무엇을 확인하고 있는가?

1)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세례 요한이 두 제자를 보내어 예수님께 질의하고 있는 것임(7:19). 그 질문의 뜻은 예수님 당신이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하기 위하여 외세인 강대국 로마제국과 얄미운 에돔 출신의 헤롯 왕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실 것인지 아닌지를 지금 말씀해 달라고 하는 것임.

2)    만약 예수님께서 그 옛날 다윗대왕처럼 외적을 무찌르고 선민 이스라엘 제국을 건설하신다면 메시아임이 틀림없겠지만 그러하지 아니하다면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임. 그러한 뜻을 완곡하게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는지 답변해 달라고 하는 것임.

 

10.  세례 요한에게 전달하라고 주신 예수님의 답변의 내용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7:21-23)

(1)  옥중에 갇힌 세례 요한의 내심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

1)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어떠한 메시아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지를 벌써 알고 계심. 그것은 한 마디로, 선민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메시아 사상과 같은 것임.

2)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앞길을 인도하기 위하여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고 있음. , 헤롯 안디바의 비도덕적인 율법위반사항을 질책하면서 감옥살이의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것임. 그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벌써 알고 계심.

3)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례 요한이 상정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전혀 아닌 것임. 한 마디로, 선민의 선지자인 세례 요한은 전통적인 선민우월사상과 선민만의 구원사상에 입각하여 당장 선민을 현세적으로 구원하기 위하여 선민을 지배하고 있는 외세를 하나님의 능력이나 무력으로 전부 쳐부수는 그러한 정치 군사적인 메시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임.

4)    그렇지만 그러한 정치적인 메시아는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이나 영생구원의 뜻과는 먼 이야기인 것임.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시고 계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하나님의 것까지 훔치고 빼앗고자 하는 강도에 불과하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1:11-15).

(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냉정하게 답변하시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가?

1)    마침 그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7:21-23);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그 의미가 다음과 같다고 하겠음;

2)    첫째,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자, 질병과 장애로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자, 육신적인 부귀와 영광만을 추구함으로써 그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자 등의 모습은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별로 다르지가 않다는 것임. 그러므로 메시아는 선민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있는 모든 이방인까지 전부 구원해야만 한다는 것임.

3)    둘째, 여호와의 구원을 갈구하고 있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두 메시아의 구원의 대상인 것임. 그러므로 선민만의 구원을 소원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나 그와 동일한 사상을 지니고 있는 세례 요한의 메시아 사상은 이제 바뀌어져야만 한다는 것임.

4)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두 제자에게 자신의 말을 그대로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세례 요한에게 전할 것이며 부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뜻을 오해하여 믿음생활에서 실족하지를 말라고 꼭 전하라고 강조하시는 것임(7: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