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2강(눅7:24-5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년 9월 21일(목)
1.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메시아를 만나자면 어찌해야만 하는가?(눅7:24-26)
(1) 세례 요한이 오랜 광야생활 그것도 금욕과 고행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선민만을 구원하는 메시아사상임을 한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눅7:24);
1)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눅7:24); 세례 요한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세상의 이치를 보지 말고 그 갈대를 흔들고 있는 영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심(요3:5-8).
2) 실제로, 세례 요한의 메시아사상이 현세적인 것이며 선민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아사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기에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임. 그는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여 외세인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를 모두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주기를 바라고 있음.
3) 따라서 그 앞길을 인도하기 위하여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잘못을 질책하고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것임. 그러한 세례 요한의 행위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대속의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과는 크게 다른 것임.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광야생활과 고행의 결과가 그 점 때문에 별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한탄을 하신 것임(눅7:24).
(2) 하나님의 능력으로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자가 메시아라고 믿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의 하나님나라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시는 자가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심(눅7:25-26);
1)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눅7:25-26).
2)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돌려보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계속하여 이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임(눅7:24a). 그 이유는 사도들조차 예수님을 따라 나선 이유가 예수님이 바로 선민의 제국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하는 메시아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임.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메시아는 그 정도의 선민구원의 일만을 수행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더 훌륭한 일 곧 만민구원이라고 하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신다는 것임(눅7:26).
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차제에 세례 요한과 같은 좁은 생각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임. 하지만 제자들은 끝까지 그 점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음. 따라서 훗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사도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에게 선민 이스라엘의 제국을 재건하실 때에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임(막10:35-37). 그것이 바로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는데”(눅7:25) 사도들이 그렇게 장차 지내기를 희망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다는 예수님의 지적인 것임.
4) 선수를 치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 대하여 화를 내고 있는 기타 사도들의 마음도 똑같은 것임(막10:41). 그들 모두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길이므로 멀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시며 유대의 왕이 되시는 줄 알고 있는 것임. 그와 같은 기대가 무너지자 12사도들은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게 체포를 당하시는 예수님을 떠나서 뿔뿔이 흩어져버린 것임(막14:27, 50).
2.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평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근거는 무엇인가?(눅7:27-28a, 요1:15, 27, 29-40, 3:29-30, 마3:13-17)
(1) 세례 요한의 장점과 헌신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1)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7:27-28a).
2)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공생애를 시작하여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역할과 그 마음가짐이 실로 훌륭한 것이기에 위와 같은 칭찬을 받고 있는 것임.
(2)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평가를 하시는데(눅7:28a)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임;
1) 첫째, 전심전력으로 선민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가 곧 오시기 때문에 그 전에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하여 회개의 물세례를 받으라고 외친 것임(눅3:3).
2) 둘째, 자신은 메시아의 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음(눅3:16, 요1:15, 27).
3) 셋째,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의 제자로 보내어 줌(요1:40).
4) 넷째, 나사렛 예수에게 물세례를 주고서 그가 메시아임을 백성들에게 증거함(요1:29-36).
5) 다섯째, 메시아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하여 진작에 광야로 나가서 엣세네인처럼 히브리정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선지자로서 금욕생활에 노력한 것임(눅1:80, 3:2, 마3:4).
6) 여섯째, 자신의 제자들에게 메시아인 예수님은 흥해야 하지만 세례 요한 자신은 사명을 마치고 조용히 사라져야 하는 종임을 분명히 한 것(요3:28-30) 등임.
3.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성도라도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고 예수님이 평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눅7:28b, 마11:11-15)
(1) 하나님의 나라에서 세례 요한이 꼴찌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눅7:28b)
1)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다음과 같은 관문을 통과해야만 함; ①첫째, 예수님을 대속자로 인정을 해야만 함. 따라서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서 진심으로 회개를 해야만 하는 것임. ②둘째, 선민사상에서 벗어나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 그리고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해야만 하는 것임. ③셋째,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하는 사도와 제자로 한평생을 살아가야만 함. 구체적으로, 온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임(마28:18-20).
2) 그 가운데 세례 요한이 실천한 것은 첫번째 관문에 불과함. 그는 나사렛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속자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만을 선민 유대인들에게 선포하는데 그쳤기 때문임(눅3:21-22, 요1:26-34).
3) 그후 세례 요한은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의 비도덕적인 행위를 율법의 위반이라고 질책을 하다가 그만 가버나움의 감옥에 갇히고 만 것임(눅3:18-20, 레18:16).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선민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일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음. 그러므로 외세인 헤롯 왕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몰아내고 자신을 감옥에서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임.
4) 그 일이 늦어지자 세례 요한이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은근히 독촉을 하고 있는 장면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눅7:20)하는 질문인 것임.
(2)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마태복음 제11장에 대한 검토(마11:11-15);
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 세례 요한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대속자로 받아 들이고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고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없다는 것임(요3:5-15).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데 있어서는 그만 꼴찌가 되고 마는 것임.
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근본적으로, 영생의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하나님의 방법과 선민 유대인들의 방법이 차이가 나고 있음; ①하나님의 방법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속죄의 제사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는 것임. 그에 따라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성도들이 만민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게 되는 것임.
3) ②그와 달리 선민 유대인들의 방법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마치 그 옛날 다윗대왕처럼 선민의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는 것임. 그 선민의 제국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것임. 그와 같은 선민만을 위한 지상천국이 바로 시온의 영광인 것임. 세례 요한은 그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는 선민들의 지상천국을 이 세상에 메시아의 능력을 빌려서 재건하고자 하는 것임.
4)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마11:13-15); 세례 요한은 선민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 입각하여 여전히 다윗대왕의 후계자인 일종의 정치적 군사적인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선지자임. 그러한 세례 요한의 입장은 모든 선지자의 글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민구원사상과 선민우월사상을 뒷받침하는 율법으로 해석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유대교의 입장과 동일한 것임.
5) 그 옛날의 선지자 엘리야가 다시 와서 우상문화를 청산하고 종교개혁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선민들의 여호와 신앙이 그와 같은 선민우월사상과 정치적 군사적인 메시아 사상에 매어 달리고 있으니 그것은 자신의 아들을 온세상을 구원하는 대속의 제물로 보내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멀다는 것임. 그와 같은 중요한 차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하도 답답하여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마11:15)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임.
4. 세례 요한이 주고 있는 회개의 물세례를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받지 아니한 이유가 무엇인가?(눅7:29-30, 18:10-12, 롬10:2-3)
(1)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백성들과 세리들;
1) 세리들 가운데 특히 마태나 삭개오와 같은 세관원들은 선민 유대인들로부터 매국노이며 종교적으로 죄인들이라고 지탄을 받고 있음(눅5:27-30, 19:5-7).
2) 그 밖에 사회적으로나 양심적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는 백성들은 마치 세리처럼 자신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라고 여기고서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를 하면서 부르짖고 있다는 것임(눅18:13).
3) 그러므로 그렇게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백성들과 세리들은 세례 요한의 외침에 따라 차제에 회개의 물세례를 받고 있는 것임(눅7:29).
(2) 이웃이 보기에 율법을 온전히 지킨 것으로 보이기에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
1)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인 랍비의 인식은 전혀 다름.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적인 행위가 이웃사람들이 보기에 죄인으로 지탄을 받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임. 따라서 사람들의 눈에만 율법을 위반하고 있는 죄인의 모습으로 비치지 아니하고 있다면 의인으로 행세를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임.
2)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의 종교생활은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보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창39:9, 히4:12-13) 전혀 인식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임(롬10:2-3). 그것이 영적인 타락이며 세속화된 종교생활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임.
3) 그렇게 외식적이며 가식적인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자칭 의인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므로(눅18:11-12) 그들은 회개할 것이 없다고 여기고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결코 물세례를 받지 아니한 것임(눅7:30)
4) 그에 따라 대부분의 유대교지도자들은 만민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배척하고 있으며(눅22:66-23:2) 훗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조차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끝까지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고 있는 것임(행8:1-3).
5. 하나님의 지혜가 어린아이에게는 임할 수 있지만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 그리고 자칭 의인으로 자처하는 선민에게는 임할 수가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눅7:30-35, 18:15-17)
(1)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구원의 의미임(눅7:31-32);
1) 훗날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제21장에서 새 예루살렘성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2-4).
2) 하나님 아들이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살아가신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구원의 의미가 되고 있음.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그 눈물을 닦아 주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시기 때문임.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백성들의 애환과 고통을 친히 체험하셨다고 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임(히4:14-16).
4)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백성들과 함께 진심으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그들을 이해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제적인 삶과 괴리가 된 율법생활을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계시는 것임(눅7:31-32).
(2) 엣세네파와 사두개파의 잘못만을 공격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자세의 문제점(눅7:33-34);
1)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상대방들의 신앙생활을 폄하하고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심(눅7:33-34). 구체적으로 엣세네파와 사두개파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난이 그와 같은데 그것이 여기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게도 적용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심;
2) 첫째, 엣세네인들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를 반대하고 속세를 떠나 광야나 외딴 섬으로 들어가서 금욕생활과 고행을 한 자들임. 그들과 비슷하게 세례 요한이 수행을 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다음과 같이 비난하고 있는 것임;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눅7:33).
3) 둘째,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배우고 외세와 적당히 정치적으로 타협하고 제휴하여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임. 그러한 사두개파의 예에 따라 나사렛 예수님의 행위를 바리새인들이 비난하고 있음;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7:34).
(3) 어린아이에게서 무엇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인가?(눅7:35, 18:15-17)
1) 바리새인들의 양비론(兩非論, 양쪽 모두가 틀렸다고 보는 견해)적인 태도가 그들의 율법생활이 의롭다고 하는 근거가 되지를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보고 계시는 것임.
2) 그것은 순수하지도 못하며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태도가 아니라고 하심.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시는 것임;
3) 첫째,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7:35); 자녀들이 부모님을 존경하고 그 믿음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면 그것은 바람직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임.
4) 둘째,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8:15-17); 어린아이가 부모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듯이 그렇게 백성들이 세상적인 자신들의 지혜와 경험을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그 뜻을 따른다고 하면 그것이 가장 좋은 신앙의 자세이며 천국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임.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세상적인 지혜와 경험으로 유권해석을 하고 재단(裁斷)할 수가 있다고 여기고 있으니 그것은 열심이 있으나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따르고 있는 신앙태도가 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임(롬10:2-3).
6. 한 바리새인과 한 죄인인 여자와의 절묘한 대비가 향유를 부은 사건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그 사건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평가와 바리새인의 평가는 어떻게 다른가?(눅7:36-39, 47-49)
(1)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인가?
1)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2)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려는 예수님의 발에 갑자기 향유를 붓고 울면서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긴 죄인인 여자를 예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그 죄를 사해주시는 것임(눅7:36-38, 48).
(2) 바리새인의 평가는 무엇인가?
1)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눅7:39);
2) 죄인인 여자가 하나님의 사람인 의인 선지자의 발을 만져서는 안되는 것임. 바리새인들의 율법에 따르게 되면 의인들은 죄인과 함께 앉거나 식사를 같이 하거나 그 손에 닿아서도 아니되는 것임(눅5:30). 그것은 부정이 타서 거룩한 백성에게 누가 되는 것임(요4:9).
3)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당연히 그 여인을 꾸짖으시고 물리치실 것이라고 바리새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임(눅7:39).
7.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눈물로 진심으로 영접할 수 없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눅7:25, 36, 40-47)
(1) 선민사상에 입각하여 히브리정경을 해석하고 있는 바리새인들(눅7:25);
1)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눅7:25);
2) 바리새인들은 청소년시절부터 율법학자인 서기관이나 율법선생인 랍비의 문하에서 히브리정경과 히브리전승 그리고 주석을 공부하고 배워서 30세가 되면 젊은 랍비가 됨. 그때부터 선민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있음.
3) 그들은 장차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다시 건설해주는 것으로 믿고 있음.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메시아사상임.
4) 선민의 영광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천국복음으로 전파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전혀 반대노선인 것임.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거나 복음사상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것임.
(2) 자칭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시각(눅7:36, 40-47);
1) 예수님은 선민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면 죄인들이라고 보고 있음. ‘바리새인과 세리와의 기도의 비유’에서 그 사실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음(눅18:9-14).
2)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인식은 다른 것임. 그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율법을 전부 지키고 있으므로 스스로 의인으로 행세를 하고 있음. 따라서 자신들을 외식하는 신앙인이라고 질책하고 있는 예수님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임(마23장).
3) 하나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영이신 여호와의 눈을 의식하면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임. 오로지 사람들의 눈만 속일 수 있으면 하나님의 눈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고 믿고 있으니 그것이 큰 문제인 것임.
4) 그와 같이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면 스스로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발견하여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리에 나아올 수가 없는 것임. 한 마디로,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를 않는 것임.
5) 따라서 본문에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초청하여 식사자리를 함께하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섬기지를 아니하고 있음(눅7:36).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고 그저 호기심의 대상으로 식사대접을 하고 있을 뿐임. 그 점이 진심으로 구속자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회개를 하고 있는 죄인인 여인과 극명하게 대조가 되고 있다고 하겠음(눅7:40-47).
8. 죄인인 한 여인이 향유를 부은 사건이 갈릴리에서 발생했다고 한다면 그녀는 누구로 추정이 되고 있는가?(눅7:18-19, 36-37, 8:2)
(1) 막달라 마리아의 행적에 관한 의사 누가의 기록;
1) “그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12제자가 함께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7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8:1-3);
2) 막달라 마을은 갈릴리 호수 서안에 자리를 잡고 있음. 그곳 출신인 마리아는 일찍 예루살렘으로 진출하여 숙박업과 유흥업 등으로 돈을 많이 번 여인으로 보임. 그러나 병이 들어 고향 막달라에 와서 휴양을 하고 있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함을 받은 것으로 보임.
3) 의사 누가는 예수님께서 안수를 하시고 그녀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었다고 기록하고 있음(눅8:2). 그때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여제자로서 헌신한 것으로 보임(눅8:3).
(2) 갈릴리에서 발생한 향유부음 사건의 주인공에 대하여;
1) 한 바리새인의 식사초대는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하던 때에 발생하고 있는 것임(눅7:18-19, 36). 그러므로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죄 많은 여인은 갈릴리 출신이라고 하겠음(눅7:37).
2) 자신이 아끼던 향유를 들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씻는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은혜를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음.
3) 그러므로 의사 누가의 글을 참조하면 그녀는 막달라 마리아일 가능성이 농후함.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7귀신을 쫓아내고 자신의 중병을 치료하여 준 은혜를 막달라 마리아가 벌써 입고 있기 때문임(눅8:2).
9.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바리새인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그 여인에게 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눅7:44-50)
(1)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어째서 바리새인에게 임하지를 못하고 있는가?
1) 바리새인이나 죄인인 여자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임. 그러나 바리새인은 상대적으로 자신은 의인이며 그 여자는 죄인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것임(눅18:9-12).
2) 따라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논리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또한 바리새인 시몬에게 질문을 하심;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눅7:41-42).
3) 바리새인 시몬의 답변과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음;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 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눅7:43-46).
4) 의사 누가는 예수님의 ‘바리새인과 세리와의 비유’를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거나 구원으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9-12);
5) 요약을 하자면 ①첫째, 율법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의인인 체 하는 가식이 지나쳐 스스로 속고 있으며 ②둘째, 상대적인 의로움을 너무 내세우다가 그만 자신들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임. ③셋째,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거나 그리스도에게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임.
(2) 어째서 죄 사함의 은혜가 죄인인 그 여인에게 임하고 있는가?
1) 첫째, 바리새인 시몬과 달리 그 여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임(눅7:37-38).
2) 둘째, 그녀는 예수님께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를 붓고 눈물로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임(눅7:44, 46).
3) 셋째, 더구나 그녀는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임(눅7:45).
4)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회개와 구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을 보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7:48)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선포하시는 것임.
10.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베다니 마리아와 또 다른 익명의 여인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눅7:36-38, 요12:1-3, 막14:1-3)
(1) 막달라 마리아의 향유부음 사건(눅7:36-38);
1) 첫째,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있을 때에 발생한 일임(눅7:18-19).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던 도중에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여인으로서 그것도 죄를 지은 여인으로 표현이 되고 있는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과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것임(눅7:36-38).
2) 둘째, 그 여인은 갈릴리 호수 서쪽의 호안도시 막달라 출신인 마리아로 추정이 됨.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7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적이 있으며 그 이후부터 그녀가 물심양면으로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으로 의사 누가가 기록을 하고 있기 때문임(눅8:1-3).
3) 셋째,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신 그 집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인데(눅7:40) 훗날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동쪽 근교마을인 베다니에서도 역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어(막14:1-3) 두 사건이 동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임.
4) 넷째, 그러나 발생한 시점과 장소가 크게 다르다고 하는 측면에서 그것은 동일사건이 아닌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음.
(2) 베다니 마리아의 향유부음 사건(요12:1-3);
1) “유월절 6일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1-3);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음;
2) 첫째,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해 유월절 6일 전에 예루살렘의 동쪽 근교마을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서 발생하고 있는 향유부음 사건임.
3) 둘째,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여인의 이름은 사도 요한이 마리아라고 적고 있음. 그 앞에 마르다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여인은 마르다의 여동생인 베다니의 마리아라고 하겠음.
4) 셋째,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를 일전에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나 되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살려 준 일이 있어 나사로와 마르다는 그 일이 고마와서 다시 들리신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열어주고 있는 것임(요11:39-44, 12:1-2).
5) 넷째, 그 좌석에 마리아가 나타나 자신의 향유를 붓고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씻어주고 있음(요12:3). 그 의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자신의 장례준비를 베다니의 마리아가 미리 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심(요12:7).
(3) 또다른 여인의 향유부음 사건(막14:1-3);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막14:1-3);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음;
2) 첫째, 유월절 2일 전에 발생한 사건임. 그러므로 6일 전에 발생한 요한복음 제12장의 사건과는 다른 것임.
3) 둘째, 마을 이름은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 마을과 같은 것임.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식사하신 집은 나사로의 집이 아니라 나병환자 시몬의 집임.
4) 셋째,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께 향유을 부은 여인은 그 발이 아니라 머리에 붓고 있는 것임(막14:3). 그 점이 누가복음 제7장이나 요한복음 제12장의 기록과 차이가 나고 있다고 하겠음(눅7:38, 요12:3).
5) 그와 같은 차이점 때문에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여인은 베다니에 살고 있는 또다른 익명의 여인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임. 따라서 예수님께 향유을 부은 여인은 모두 3명이라고 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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