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4강(눅8:22-5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7. 19. 19:58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4(8:22-5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 10 5()

 

1.    갈릴리 호수 반대편으로 가자면 가장 빠른 방법이 무엇이며 어느 날 발생한 사건은 무엇인가(8:22-25)

(1)  가장 빠른 방법은 배편인데 가끔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8:22-23, 26)

1)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동편인 거라사 지방)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行船, 배가 나아감)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8:22-23);

2)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동편으로 가고자 하심. 호수 동편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의 마을 거리사로 갈 수 있는(8:26) 가장 빠른 방법은 게네사렛에서 고깃배를 타는 방법임(5:1-3, 10-11).

3)    참고로, 갈릴리 서북 호안의 마을인 게네사렛에서는 그 옛날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 등이 갈릴리 호수에서 어로작업을 하고나서 그곳 어시장에 물고기를 넘기고 어선의 수리나 그물수선을 하고 있던 장소임(5:1-2, 10, 4:18-22).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올라 호수가에 몰려 있는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적이 있음(5:3). 

4)    갈릴리 호수는 특이하게 바다보다 200미터나 낮은 움푹 파인 위치이며 주위에는 높은 산지가 병풍처럼 형성이 되어 있음. 서쪽에는 해발 500미터 이상인 티베리아 산지가  있고, 북쪽에는 해발 2,800미터나 되는 헬몬 산으로 기어올라가고 있는 높은 홀레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에는 바산의 골란고원으로 연결이 되는 높은 지대가 있고, 남서쪽에도 다볼 산이 자리를 잡고 있음. 다만 정남쪽으로 호수보다 낮은 골짜기가 형성이 되어 있어 다행스럽게도 호수의 물이 요단 강으로 흘러내리고 있음.

5)    그 정남쪽을 제외하면 갈릴리 호수는 그야말로 병풍같은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깊은 골짜기의 잔잔한 호수라고 할 수 있음. 그렇지만 갑자기 큰 풍랑이 발생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북쪽 또는 서쪽의 차가운 공기가 산을 타고 내려와서 호수의 더운 공기와 마주치는 경우임; ①첫째는 높은 헬몬 산의 눈바람이 홀레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경우이며 ②둘째는 어쩌다 지중해 쪽에서 형성된 찬 공기가 티베리아 산지를 타고 넘어와서 갈릴리 호수의 더운 공기를 만나게 되는 경우임. 그러한 때에는 돌발적으로 호수에서 광풍이 발생하게 되는 것임(8:23).

(2)  바람과 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8:23-25)

1)    훗날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진술을 하고 있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2)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주의 한 위격(位格)이신데 이 세상에 구원주로 성육신을 하시고 있음(1:1-4, 14). 그런데 사람들이 영적인 어두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사실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임(1:4-5).

3)    마찬가지로 함께 배를 타고서 게네사렛에서 반대쪽인 동편 거라사인의 마을로 가고 있는 사도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의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영적으로 완벽하게 깨닫지를 못하고 있음(8:25b, 1:5). 따라서 호수의 광풍이 예수님의 일갈에 그대로 순종하여 즉시 사라지는 현상에 대하여 도무지 이해를 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임(8:24-25).

4)    그러므로 자연현상에 불과한 갈릴리 호수에서 발생한 광풍에 크게 놀라 죽을 위기를 두려워하고 있을 뿐 그 모든 자연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배 안에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꿈에도 인식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임(8:23-24).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과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소위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음(8:25a). 왜냐하면, 믿음이란 아브라함이 피조물의 생각이나 세상이치 그리고 자연의 현상보다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한 것이기 때문임(15:6).

 

2.    갈릴리 호수의 동편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누구를 가장 먼저 만나시고 계시는가?(8:26-29)

(1)  갈릴리 호수의 동편에는 누가 살고 있으며 그들의 특징은 무엇인가?(8:26-27)

1)    갈릴리 동편과 요단 강 동편에는 헬라 세계의 이방인들이 몰려 들어서 집단적으로 살고 있음. 그것은 갈릴리 서편에 선민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임.

2)    따라서 갈릴리 호수 동편에는 이방인의 마을인 거라사가 있으며(8:26) 요단 강 동편에는 헬라 세계의 이방인들이 10개의 마을을 형성하여서 거주를 하고 있음(5:20). 그것이 이름하여 데가볼리지역임.

3)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갈릴리 호수의 서편과 북편에서 주로 사역을 하셨으며 무리의 수가 많을 때에는 사람이 적게 살고 있는 지역 곧 북동쪽 벳새다의 동편 평원에서 대중집회를 하신 것으로 보임(9:10-12, 6:34-35, 8:1-4).  

4)    갈릴리 서편과 북편의 선민 유대인들에 대한 복음사역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동편의 이방인 마을로 들어가신 것임. 그런데 그곳 이방인 마을의 첫인상이 귀신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의사 누가가 여기서 특징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임(8:26-28).

(2)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귀신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8:28-29)

1)    비록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예수님의 정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고 계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심(1:14). 따라서 마귀의 부하인 귀신들이 그 앞에 설 수가 없는 것임(11:20).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귀신에게 떠나가라고 명령을 하시는 것임(8:29a).

2)    귀신의 정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음;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전10:20).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있는 자는 귀신을 섬기고 있는 것임. 그러므로 창조주가 아니면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영적인 존재가 바로 귀신이라고 할 수 있음(8:29b).

3)    그러한 영적인 더러운 존재의 탄생에 대하여 초대교회의 장로인 유다가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고 있음;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1:6). 창조주의 권위를 탐하던 천사장 루시엘이 쫓겨날 때에 함께 쫓겨난 그 부하인 천사들이 귀신이 되고 있다고 하겠음(14:12-20).

4)    흑암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귀신들 앞에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으니 그 생명의 빛 앞에 감히 귀신들이 설 수가 없는 것임(11:20). 따라서 부디 살려 달라고 읍소를 하면서 아첨을 떨고 있는 것임;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8:28).

 

3.    많은 귀신의 군대가 무저갱보다는 차라리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8:30-33)

(1)  막달라 마리아에게 들어온 7귀신과 거라사인에게 들어온 많은 귀신 군대의 차이는 무엇인가?(8:2, 30);

1)    선민 유대인 가운데 가장 많은 귀신이 들린 자가 막달라 마리아로 보임. 그녀에게서 예수님이 7귀신을 쫒아낸 적이 있음(8:2, 16:9).

2)    선민의 경우 그보다 더 심한 형편이 나타날 수가 있는데 그것이 8귀신이 들어가는 것임;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7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11:26);

3)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기로 하고 성도가 되었으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게 되면(7:21-23)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욱 악화가 되고 만다는 경고의 말씀임.

4)    그렇게 선민 유대인이나 성도의 경우보다 더욱 심한 경우가 이방인 거라사 마을에서 만난 귀신들린 자임. 그에게는 무려 군대로 불리는 무수한 귀신들이 들어가서 그의 영성을 죄와 사망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임(8:30). 그것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영적으로 캄캄한 인생을 말하고 있는 것임.  

(2)  영벌의 무저갱보다는 차라리 곧 죽을 운명인 돼지의 육신에라도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는 귀신들의 생각은 무엇인가?(8:31-33)

1)    악한 영들이 무저갱의 유황 못에 던져져서 영원한 불길의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심판의 결과인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20:10).

2)    그러한 미래를 알고 있는 많은 귀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통사정을 하고 있음;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십시오. 마침 인근 산에서 돼지 떼가 먹이를 찾아서 먹고 있으니 그들에게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8:31-32a 의역).

3)    예수님께서는 귀신 떼의 요청을 들어 주시고 있음(8:32b). 그 이유는 귀신들이 영육합일체인 사람들에게는 영적으로 함께 거주할 수가 있지만 육신과 본능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동물에게는 기생할 수가 없음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임. 그 결과 돼지 떼가 귀신이 지배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견디지를 못하고 비탈로 치달아 호수에서 한꺼번에 익사를 하고 있는 것임(8:33).

4)    많은 귀신 떼가 돼지에게서 다시 뛰쳐나와서 이방인 사회에서 거처할 사람을 찾아다니게 되는 것임. 따라서 거라사 마을에서는 그 귀신 떼를 모두 완전히 쫓아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축사(逐邪, 사악한 영을 쫓아냄)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음(4:35, 41).

 

4.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보다 당장의 경제적 손실이 아까워서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마는 이방인 거라사인들의 선택에 대하여(8:34-37);

(1)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8:33);

1)    하늘에서 추방을 당한 천사장 루시엘이 피조세계를 장악하여 창조주 여호와를 대적하고자 함(20:7-10). 그 이름이 루시퍼이며 사탄을 의미하고 있음. 그와 같은 히브리인들의 전승(傳承)을 자신의 선지서에 이사야가 제14장에 기록하고 있음(14:12-20).

2)    사탄이 땅에서는 천하를 꾀는 자 마귀가 되며 천사장 루시엘과 함께 타락을 한 천사들이(1:6) 귀신이 되어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손발이 되고 있음. 마귀의 부하이며 더러운 영인 귀신들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제16장에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음(16:13-16).

3)    더러운 영인 귀신들은 엄격한 지휘체계와 분담된 고유의 관할지역을 지니고 있음. 따라서 떠돌이가 아니라 특정지역에 붙박이로 살고 있는데 그 모습이 본문에서 군대 귀신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음(8:29-3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직면하게 된 군대 귀신은 통사정을 하고 있음; “무저갱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자기들의 지역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잠시 돼지 떼에게 들어가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임”(8:30-32).

4)    돼지 떼들이 귀신의 지배를 견디지를 못하고 집단 익사를 하게 됨에 따라(8:33) 돼지의 육신에서 탈출한 귀신 떼는 이제 거라사 주민들에게 들어가서 붙박이로 지내게 되는 것임(8:33). 따라서 이방인인 거라사 주민들에게는 귀신을 쫓아내어 주시는 예수님이 절실해지는 것임.

(2)  영생과 구원의 그리스도보다 경제적 손실의 발생을 더욱 못 견디고 있는 이방인들의 잘못된 선택(8:34-37)

1)    그 사실을 돼지를 치던 자들이 급히 마을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음(8:34). 마을사람들이 현장으로 뛰어와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귀신들렸던 자가 멀쩡하게 나아서 예수님의 발치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것까지 확인을 하고 있음(8:35-36).

2)    이제 예수님의 관심사항은 과연 이방인인 거라사 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들어오는 군대 귀신을 쫓아내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할 것인가 하는 점임.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체류를 원한다고 하면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은 빛을 발하게 될 것임.

3)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로 흘러가고 있음;  별수 없이 군대귀신의 침입에 노출이 되고 마는 거라사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축사의 능력이 절실함. 자신들에게 들어오는 귀신들을 쫓아내어 달라고 간청해야만 하는 처지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귀신과 더불어 살겠다고 하면서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임”(8:36-37).

4)    그 이유가 두가지임; ①첫째, 이방인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너무 집착하고 있으며 ②둘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에게 경제적인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용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임. 성도의 거듭난 삶이란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인데 이방인인 거라사 주민들은 그럴 의사가 조금도 없는 것임.

5)    요컨대, 귀신과 더불어 살더라도 현세적인 기득권을 누리고 자기들끼리 즐겁게 살겠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선택인 것임. 따라서 예수님께 부디 자신들의 마을을 떠나 달라고 집단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임(8:37).

 

5.    이방인들의 마을 거라사와 데가볼리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최초의 증인은 누구인가?(8:38-39, 5:20)

(1)  거라사 마을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원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8:38)

1)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8:38);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자신에게서 그 많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된 그 사람이 예수님께 부디 자신의 마을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음.

2)    그러므로 영적인 체험이 있어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게 되는 것임. 그러한 체험이 없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어려운 것임.

3)    의사 누가는 그러한 측면에서 7귀신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쫓겨난 경험을 가진 막달라 마리아가 헌신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도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8:2).

4)    또한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을 귀하게 생각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그녀에게 가장 먼저 보이셨다고 기록을 하고 있음(16:9).

(2)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갈릴리 호수와 요단 강 동편의 이방인 마을에 두루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8:39, 5:20, 12:20-21)

1)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8:39);

2)    그 사람의 복음전파는 자신의 마을인 거라사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님(8:39). 그는 요단 강 동편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 곧 헬라인들의 마을 10곳을 전부 찾아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에게서 그 많은 귀신 떼를 쫓아내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는지를 자세하게 간증한 것임(5:20).

3)    그 사람을 통하여 갈릴리 호수 동쪽 거라사에 살고 있는 헬라인들 그리고 요단 강 동쪽 데가볼리에 살고 있는 헬라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 관심을 가지게 됨. 그 결과 그들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행적이 헬라세계로 널리 퍼져나간 것으로 보임.

4)    훗날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 순례객들이 벳새다 출신인 사도 빌립을 통하여 예수님을 예방하고자 시도하고 있는데 그들이 벳새다 동남부 거라사에 살고 있는 헬라인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음(12:20-23).

 

6.    가버나움 근방의 회당장인 야이로의 신분은 무엇이며 그가 젊은 선지자 예수님께 꿇어 엎드린 이유는 무엇인가?(8:40-42a)

(1)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성전을 대신하고 있는 가버나움 회당에 대하여(4:31, 38, 5:17, 7:1-3);

1)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고 하면 갈릴리 가버나움에는 큰 회당이 자리를 잡고 있음.  가버나움 회당은 갈릴리 지방에 있어서는 예루살렘성전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음; ①첫째, 예루살렘성전에 산헤드린 대 공회가 있다면 가버나움 회당에는 갈릴리 지역의 회당을 관리하는 산헤드린 지방 공회가 있음.

2)    ②둘째,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장로들과 유명한 랍비들이 산헤드린 대 공회의 구성원들이 되고 있는데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갈릴리 지역의 여러 회당의 회당장과 이름난 랍비들이 산헤드린 지방 공회의 구성원들이 되고 있음. ③셋째, 예루살렘성전은 일 개인이 건축한 것이 아니라 거국적으로 건설한 것임. 마찬가지로 가버나움 회당도 개인이 아니라 갈릴리의 유대교인들이 힘을 합쳐서 건축한 것으로 보임.

3)    산헤드린 공회에는 사두개인에 속하는 장로들이 있으며 바리새인에 속하는 랍비들이 있음. 사두개인들은 외세와 타협하고 있으므로 로마군대의 지휘관들과도 친교가 있음. 따라서 의사 누가는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의 백부장이 자신의 친구라고 하면서 유대인 장로들을 예수님께 대신 보낸 사실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임(7:1-3).

4)    갈릴리에서 가장 큰 가버나움 회당은 일개인이 건설한 것이 아니므로 가버나움 회당장이라고 하면 그 회당을 개인적으로 건축했다는 의미가 아님. 다만, 갈릴리 지역의 여러 회당장들이 회의가 있을 때에는 가버나움 회당에 있는 산헤드린 지방 공회에 출석을 하고 있는 것임.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는 가버나움 회당의 장이 아니라 그 인근 지역에 자신의 회당을 가지고 있는 지방유지인  회당장이라고 하겠음(8:41).

(2)  가버나움 인근지역의 회당장으로 추정이 되고 있는 야이로는 어떠한 사람이여 어째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인가?(8:40-42a)

1)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동편에 있는 이방인의 마을 거라사를 떠나서 배편으로 가버나움에 도착을 하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음(8:37, 40).

2)    그들이 예수님을 기다리며 환영한 이유는 복음의 말씀을 듣기 원한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입기 원한 것임. 그러므로 서로 예수님 앞에 나서서 지병과 장애를 치유 받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임.

3)    그런데 갑자기 갈릴리의 지방유지인 회당장 야이로가 무리들 앞으로 나아와서 예수님에게 간청을 하고 있음(8:41). 과년한 자신의 딸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부디 살려 달라는 것임(8:42a).

4)    참고로, 자신의 돈으로 회당을 건축하고 회당장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다음 세가지를 말하고 있음; ①첫째, 재력가라는 것임. ②둘째, 유대교에 헌신적이라는 것임. ③셋째, 지방의 유지이며 명망가라는 것임.

5)    그렇게 그 지역에서 유명하고 지체가 높은 회당장 야이로가 젊은 선지자 예수님께 급히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서 간청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지금 그의 딸의 병이 심히 위독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임.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안내로 그 집으로 발걸음을 급히 옮기시는 것임(8:42b).

6)    사족을 더하자면, 야이로의 딸이 당시 12세이며 외동딸이라고 의사 누가가 묘사하고 있는데(8:42a) 그 말은 과년한 처녀라는 의미이며 야이로에게 무척 소중한 자식이라는 뜻임. 당시에는 보통 13세가 되면 혼인을 하고 있으므로 과년한 나이의 처녀인 것임.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딸이므로 참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것임.

 

7.    야이로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께 발생하고 있는 두가지 일은 무엇인가?(8:42b-44)

(1)  예수님을 둘러싸고 여전히 그 옷에 손을 대고자 하는 수많은 군중들(8:42b);

1)    첫째,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지병이 낫게 된다고 하는 소문이 선민 유대인들에게 퍼진 것으로 보임. 그래서 발걸음을 야이로의 집으로 옮기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둘러싸고서 그 진행을 방해하면서 서로 밀치고 있는 것임(8:42b).

2)    그것은 마치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못가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과 같은 것임. 왜냐하면, 베데스다 못가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병자들과 장애자들이 그 물이 천사에 의하여 요동할 때에 서로 먼저 들어가고자 밀치고 있기 때문임(5:2-7).

3)    그렇지만, 예수님 앞에서 그 진로를 방해하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던 많은 무리들 가운데 치유함을 받은 자가 없음

(2)  갑자기 오랜 불치의 지병을 치유 받게 된 여인(8:43-44);

1)    둘째, 신기하게도 뒤에서 살그머니 예수님의 옷에 매우 조심스럽게 손을 댄 한 여인이 갑자가 놀라운 치유를 얻고 있는 것임(8:44). 장애자도 아니고 눈에 띄는 병자도 아닌 여자가 낫게 된 것이기에 아무도 그녀가 낫게 된 것인지 눈치를 채지를 못하고 있음.

2)    그런데 예수님만은 정확하게 자신에게 손을 댄 그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낫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계심. 그 이유는 자신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갑자가 흘러 나갔기 때문임(8:46).   

 

8.    예수님께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고 누구를 찾고 계시며 혈루증(血瘻症, 몸에서 피가 새어 나오는 증세) 여인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시는가?(8:45-48)

(1)  예수님께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는 이유(8:45-46);

1)    예수님 자신이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빠져나가는 일이 처음으로 발생하고 있음(8:44, 46).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빼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신 예수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열심히 주위를 살피시는 것임.

2)    찾지를 못하시자 무리들에게 묻고 계심;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나?”(8:45a).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밀치면서 서로가 그 옷에 손을 대었는데 그 질문이 상당히 이상한 것임.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경호를 철저하게 하지 못하여 발생한 사건인 줄 알고서 급히 변명삼아  답변을 하고 있음;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8:45b).

3)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문책이 아니라고 말씀하심.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말도 없이 빠져나간 일이 하도 신기하여 그 연유를 알고자 하신다는 것임(8:46).

(2)  혈루증 여인의 힘든 고백과 그녀가 얻은 은혜(8:47-48);

1)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 여인은 드디어 자신이 숨길 수가 없음을 알고서 두려워 떨면서 나아와 엎드려서 자초지종을 아뢰기를 시작하고 있음(8:47).

2)    여성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그녀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음; ①첫째,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으로 고생을 했다는 것임(8:43a). 여인의 몸에서 피가 밖으로 비친다고 하는 것은 대표적인 종교적 부정인 것임(12:5, 15:2, 19, 25). 따라서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는 아니되는 격리의 삶을 12년 동안 살게 된 여인임.

3)    ②둘째, 그 지병을 낫게 하고자 백방으로 약을 쓰고 의원을 찾았지만 재산만 탕진하고 백약이 무효라는 것임(8:43b, 5:26). ③셋째, 마지막 기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를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걸고서 몸을 숨긴 채 감히 접근을 했다는 것임. 자신의 정체가 탄로가 나면 돌아 맞아 죽게 되는 위험을 감수한 것임. 그 결과 놀랍게도 옷깃에 손만 닿았는데도 혈루증이 깨끗하게 치유가 되었다고 하는 고백임(8:43-44, 47)

4)    그 여인의 간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마지막 소망과 믿음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이미 치유의 은혜를 주신 사실을 아시게 됨. 따라서 아버지의 뜻에 맞추어 그녀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8:48)고 선언하시는 것임.

 

9.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전갈을 듣고서도 태연하게 그 집으로 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보통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말씀인가?(8:49-50)

(1)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며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8:50)는 예수님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

1)    죽음과 구원과의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과 사람들의 인식이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임; ①첫째,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음. 그러므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임.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심.

2)    ②둘째, 사람들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도 죽고 나면 그만이고 더구나 구원이라고 하는 것도 현세적인 구원이 중요하지 일단 죽고 나면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심.

3)    ③셋째,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선지자, 그리고 메시아가 모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복을 줄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세적인 능력에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 설혹 내세적인 복이나 형통함을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육신이 죽고 나면 별로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 강한 현세지향적인 물질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음.

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임.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8:50)는 말씀을 야이로에게 주시고 있음.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과 함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외동딸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듣고서 슬픔에 빠지게 된 것임(8:49-50).

5)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의 창조를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임. 구체적으로, ①생명살림의 역사, ②영생의 구원, 그리고 ③새로운 몸의 부활까지를 의미하고 있는 것임.

(2)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창조는 어떤 것들인가?

1)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창조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하여 보여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임.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땅에 묻고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영생의 몸을 창조하여 그 영혼을 담도록 조치하신 것임. 그것이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령한 몸인 것임.

2)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발생한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죽은 사람 되살리기(왕상17:18-24, 왕하4:32-37),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린 3번의 경우(7:11-17, 나인성 과부의 아들, 8:49-56, 야이로의 딸, 11:38-44, 베다니 나사로)는 모두 죽은 몸을 그대로 다시 살려서 향년을 일단 연장시켜준 임시적인 처방에 불과한 것임. 그것은 마치 히스기야 왕의 수명연장과 같은 것이며(왕하20:6) 결코 영생에 이르는 부활이 아닌 것임.

3)    그와 달리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것은 영생의 부활을 의미하고 있음. 왜냐하면 그 몸을 입고서 그대로 승천하시며(24:36-53) 천국에서 큰 대제사장으로 일하시게 되시기 때문임(4:14-16).

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제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믿음은 현세적이거나 피상적인 것이 아님. 그것은 ①생생한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역사, ②영생의 구원, 그리고 ③새로운 몸의 부활까지를 모두 믿고서 ④그 모범을 몸소 역사 가운데 보이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의 역사를 온 세상에 널리 전하라고 하는 것임(24:44-49, 1:8, 28:18-20).

5)    참고로,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믿으라고 주님께서 강조하시는데 그 원형적인 예언은 이사야 제65장에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의 창조로 기록이 되어 있음(65:17-19). 그리고 요한계시록 제21장에서는 새로운 천지창조와 하나님나라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성의 강림을 예언하면서 다음 장에서 성경의 기록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하겠음(21:1-8).  

 

10.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자와 일말의 기대를 거는 자들이 모두 어떠한 현상을 직면하고 누구를 만나게 되는가?(8:51-56)

(1)  죽은 소녀가 되살아난 것을 보게 됨;

1)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다는 급보를 전하면서 이제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8:49). 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심. 왜냐하면 자신이 그 집에 가게 되면 딸이 되살아날 것이며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임(8:50).

2)    따라서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가시면 그 딸이 다시 살아나며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겠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싶은 자가 회당장 야이로이므로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집으로 들어간 것임(8:51).

3)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을 하시자 모든 사람들이 죽은 아이를 위하여 애곡을 하고 있음(8:52a). 그 광경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므로 통곡하지 말라고 말씀하심(8:52b).

4)    야이로의 친지들은 그 소녀가 이미 죽은 줄 알고 있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고 있음(8:53). 그런데 얼마 후에 참으로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림)할 사태에 직면하게 됨. 왜냐하면, 죽은 그 소녀가 예수님에 의하여 되살아나오는 것을 본 것이기 때문임(8:54-56).

(2)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나게 됨;

1)    야이로의 집에 모여서 애곡을 하고 있던 친지들은 나사렛 예수님이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큰 선지자라고 여기게 됨. 그것은 나인성에서 죽은 과부의 아들을 되살려낸 경우와 동일한 것임;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7:15-17).

2)    그러나 회당장 야이로 부부와 예수님의 수행제자 3총사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의 인식은 조금 다름.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아이야 일어나라”(8:54)고 명령하실 때에 그 소녀의 영이 다시 그 몸에 들어가서 소녀를 일으키는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임(8:51, 54-55).

3)    따라서 소녀의 부모와 예수님의 수행 3사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된 것임(11:25-26). 환언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나고 있는 것임(14:6-11).

 

11.  예수님께서 그 소녀의 부모와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시는 이유가 무엇인가?(8:56)

(1)  육신의 부활에 매어 달리는 민심을 경계하고 있는 조치임;

1)    그 영이 다시 소녀에게 들어가서 되살아나자 예수님께서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심(8:55). 그리고 그 소녀의 방 안에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행동을 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자세하게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시고 계심(8:56).

2)    어째서 자세한 내막에 대하여 함구령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육신의 부활에 집착하여 백성들이 죽은 다음에 다시 몸이 살아나서 현세에게 더 오래 장수를 누리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게 되면 영생구원의 하나님나라 건설에서 멀어지기 때문임.

3)    선민 유대인들의 현세주의적인 신앙행태를 예수님께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썩어지는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는 그것을 마치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인 것처럼 인식하고서 함부로 선전하지를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임(8:56).

(2)  믿음의 목적은 썩어지는 육신의 부활이 아니라 영생의 몸을 입는 부활이기 때문임;

1)    예수님께서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고 하는 천국복음으로 백성들에게 전하시면서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디 선민 이방인 차별하지 말고 모두를 구원하여 천국의 백성으로 함께 영생을 누리게 하라고 강조하고 계심.

2)    따라서 선민이거나 성도들이 현세적인 목숨연장만을 의미하고 있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부활이나 야이로의 딸의 부활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천국복음과 영생의 하나님나라의 건설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울리는 신앙생활의 모습이 결코 아니라고 하겠음.  

 

(사진은 갈릴리의 지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