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3강(눅8:1-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년 9월 28일(목)
1. 제8장 제1절에서 알 수 있는 사실 두가지는 무엇인가?(눅8:1)
(1)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눅8:1a);
1) 여기서 ‘성’(城, city)은 인구가 밀집하여 살고 있는 도시이므로 자체 방어를 위하여 성곽을 가지고 있음(눅8:1aa). 그리고 성 바깥에는 교외지역에 시골의 마을들이 형성이 되어 있음(눅8:1ab). 시골사람들은 농업과 목축업 또는 갈릴리 지역에서는 어업에 종사하기도 함.
2)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갈릴리 지역에서 수년간 계속이 되고 있는데 그 특징은 도시인 성은 물론 시골마을까지 샅샅이 방문을 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치유사역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임.
3) 그것도 때로는 사도들을 책임자로 하여 제자들을 여러 팀으로 나누어 복음사역을 실시할 지역으로 먼저 파송하고 있음(마10:1-23, 눅10:1-20). 따라서 먼저 여러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한 사도와 제자들이 사전에 예수님과 약속한 장소에 많은 군중들을 데리고 오는 것임. 그에 따라 예수님의 군중집회는 상당히 큰 규모라고 하겠음.
4) 그런데 훗날 사도 바울의 세계선교는 그 양상이 상당히 다름. 그는 로마제국의 대도시들을 징검다리 형식으로 건너 뛰면서 선교를 하고 있음(롬15:19-21). 따라서 시골지역과 오지(奧地, 외딴 지역)가 아예 선교의 대상에서 제외가 되고 있음. 그 점에 대한 보완은 상징적으로 사도 바울이 죄수로 로마로 배를 타고 가다가 난파를 당하여 여러 섬과 오지를 방문하게 됨으로써 일부 선교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음(행28:1-15).
(2) 12제자와 함께 공생애를 사시면서 복음사역을 하시는 예수님(눅8:1b)
1) 여기서 12제자는 12사도를 의미하고 있음(눅6:12-19, 8:1b). 그들은 모두 남자제자 가운데서 선발이 되었으며 8명은 갈릴리 출신이지만 4명은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의 사람들임.
2) 예루살렘과 유다 지역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갈릴리로 예수님의 복음사역 현장을 살피기 위하여 몰려 왔듯이(눅5:17)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전국 각지에서 갈릴리로 몰려온 젊은이들이 꽤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음.
3) 그것이 아니라면 요한복음을 참조할 때에 예수님께서 이미 예루살렘을 방문하시고 유대 땅과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들어오셨기 때문에(요2:13, 3:22, 5:1) 자연히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 출신의 제자들이 함께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임.
4) 선민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선지자가 나타나게 되면 그의 생도가 되겠다고 하는 청년들이 많이 몰려 들어서 일종의 학파(school)를 다음과 같이 구성하고 있음; ①첫째, 그 효시는 주전 11세기에 사무엘 선지자가 은퇴하여 자신의 고향 라마 나욧에 세운 선지자 양성학교에서 볼 수 있음(삼상19:18-20). ②둘째, 주전 9세기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도 볼 수가 있음(왕상19:16, 왕하2:3, 5, 7, 15). ③셋째, 주전 5세기 율법학자 에스라가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제2성전을 돌보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음(스7:1-13). ④넷째,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년만에 선지자 세례 요한이 나타나자 역시 많은 청년들이 그의 제자가 되고 있는 것임(눅7:18-19, 막6:29, 요1:35, 3:25).
5) 선지자 세례 요한이 메시아라고 소개한 바가 있는 나사렛 예수님의 경우에는 더 많은 청년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것임(눅10:1, 18:22-23). 그 가운데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닌 남자 제자가 12명인데 그들이 12사도라고 하겠음(요6:66-71). 그와 같은 미래지사를 벌써 아시고 예수님께서 12사도를 세우신 것으로 보임(눅6:12-16)
2.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지낼 수가 없는 여제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눅8:2-3)
(1) 예수님 일행을 뒤따라 다니면서 보살피고 있는 여인들의 존재;
1)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7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8:2-3);
2) 여성들이 예수님 일행을 뒤따라 다니면서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고 있다고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음(눅8:3). 그런데 그 구절이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이해가 힘드는 대목임.
3) 그 이유는 고대 선민 유대인들의 사회에 있어서는 여성들에게 재산의 소유권이 없었기 때문임. 그러므로 그 표현은 두가지의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임; ①첫째, 사업수완이 있는 독신여성이 다른 남자 친지의 이름으로 재산을 소유하면서 사업을 하고 그 소득을 가지고 예수님 일행을 돕고 있다는 것임. ②둘째, 재산을 지니고 또한 벌이를 잘 하고 있는 남편이 자신은 매우 바쁘므로 아내를 대신 보내어 예수님 일행을 후원하고 있다는 것임.
4) 또한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이거나 자신의 가족이거나 간에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결과 나음을 입은 적이 있다는 것임.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예수님 일행을 돕고 있는 것임.
(2) 대표적인 여성 후원자들;
1) 첫째, 사업수완이 있어서 스스로 많은 소득을 얻고 있는 여성으로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대표적임. 그녀가 예수님과 12사도의 뒤를 쫓아 다니면서 물질로 크게 돕고 있는 것임.
2) 특히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7귀신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어 주신 경험이 있기에 체험적인 신앙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적극 돕고 있는 것임.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는 모두들 신실한 여제자로 보고 있는 것임.
3) 둘째,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라고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데 그녀는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중병이 들었다가 가나에 계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병이 낫게 된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임. 참고로, 사도 요한이 그러한 속사정을 그의 복음서 제4장에서 기록을 하고 있음(요4:46-54).
4) 셋째,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예수님과 12사도들)을 섬기더라”(눅8:3)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수산나’는 익명으로 예수님 일행을 돕고 있는 많은 여성들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인물로 보임. 왜냐하면, 그녀의 정체와 신분에 대해서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임.
3. 갈릴리 여러 동네에서 온 무리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자 ‘땅에 떨어진 4가지 씨앗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눅8:4-8)
(1) 갈릴리 지역에서 몰려온 선민 유대인들의 ‘니즈’(needs)와 예수님의 ‘시즈’(seeds)에 대한 이야기;
1) 선민 유대인들의 ‘니즈’는 두가지임; ①하나는 자신들이나 가족들의 치유가 목적임. ②또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들의 제국을 형성해줄 정치적인 메시아를 만나고자 하는 것임.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 있는 ‘시즈’는 다음 두가지임; ①첫째,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뜻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천국 복음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임. ②둘째, 병든 자와 장애자들을 안수하여 말씀으로 치유하시며 귀신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쫓아내시는 것임.
3) 그 가운데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음. 반면에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에 대한 천국 복음의 말씀은 환영을 받지를 못하고 있음. 그 이유는 선민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선민구원사상과 정치적인 메시아 사상 때문임.
4) 선민 자신들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현세적으로 누리고자 하는데 난데 없이 예수님께서 이방인까지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마5:43-44) 하나님의 축복도 현세적인 복이 아니라 내세의 복이라고(눅22:28-30) 영생의 천국말씀만 강조하시니(마10:28, 18:8)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아니하고 있는 것임.
5) 그러한 백성들의 요구인 ‘니즈’와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으로 제공해주고 있는 ‘시즈’가 서로 맞지 않는 점이 많기에 그 적합성을 4분의 1정도의 확률로 말씀하시고 있음. 그것이 소위 예수님의 ‘4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라고 하겠음(눅8:4-8).
(2) 예수님의 홈 그라운드가 아닌 다른 지역이라면 환영을 받을 확률이 어떻게 되는가?
1) 갈릴리 지역은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과는 다름. 그 이유는 네가지임; ①첫째, 선민들의 유대교의 성전이 있는 수도 예루살렘에서 변방이라는 점임. ②둘째, 로마총독이 군정으로 다스리고 있는 지역이 아니라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가 통치하고 있는 지역임. ③셋째, 갈릴리 지역에는 일부 이방인들이 함께 살고 있어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보다는 갈릴리의 주민들이 훨씬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임. ④넷째,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과 그의 활동무대인 가버나움이 모두 갈릴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임.
2) 한 마디로, 갈릴리 지역은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있어서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 보다는 훨씬 우호적인 지역임. 따라서 예수님의 홈 그라운드라고 부를 수가 있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민사상이 숨을 쉬고 있어 예수님의 천국복음에 대한 수용능력이 25%정도의 확률임. 그렇다면 유대교의 중심지 예루살렘이나 그 주변의 유대 땅의 선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수용능력이 더 떨어질 것이 점쳐지고 있는 것임.
4) 특히 예루살렘성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유대교의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는 유대교지도자들이 기회가 되면 나사렛 예수 일행을 일망타진하려고 벼르고 있으므로 복음사역이 쉽지 아니할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음.
4. 예수님께서 그 비유의 뜻을 제자들에게만 풀이하여 가르쳐 주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눅8:9-10)
(1) 예수님께서 일반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의 내용(눅8:4-8);
1) 한 마디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백배의 결실을 맺을 수가 있다고 백성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임(눅8:4, 8). 그러나 그 확률은 4분의 1에 불과함.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 다른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임;
2) 첫째, 씨앗이 길가에 떨어지는 경우임; 밟히거나 새들이 먹어버리는 것임(눅8:5).
3) 둘째, 씨앗이 바위 위에 떨어지는 경우임; 습기가 없으므로 말라버리는 것임(눅8:6).
4) 셋째,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는 경우임; 가시가 함께 자라서 그 씨앗의 발아와 식물로서의 성장을 막아버리는 것임(눅8:7).
(2) 제자들에게 그 뜻을 풀이하여 주시는 이유(눅8:9-10);
1) ①첫째,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알기 위하여 묻고 있기 때문임(눅8:9). ②둘째, 복음을 전파하여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그 말씀의 뜻을 가르쳐줄 수가 있다는 것임(눅8:10a, 24:44-48).
2) 그 뜻의 풀이를 구하지도 아니하며 그 말씀의 뜻을 복음으로 깨닫고 온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사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일반백성들에게는 들어도 그 뜻을 잘 알 수가 없도록 비유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임(눅8:10b).
3)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이 진작에 선지자 이사야에게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6:9-10).
4) 겉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말씀을 비유로 하셔서 백성들을 영적으로 소경과 귀머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임. 그러나 그 속의 내용은 그것이 아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제대로 실천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문의하거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임.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이기적으로 왜곡하여 살아가고 있는 이상한 선민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임.
5.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듣는 자는 백성들인데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그 씨앗이 제대로 자라나서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눅8:11-15)
(1) 씨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선민사회에서 제대로 발아를 하지 못하고 식물로 자라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1)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근본적으로 창조주의 피조물 사랑의 마음을 그 속에 담고 있는 것임. 따라서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돌보고 그들의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심. 그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며 절대적인 선함과 의로움인 것임.
2) 그런데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은 그것이 아님. 육신적인 탐욕과 이기심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며 집단이기주의와 현세적인 하나님 축복의 독점을 교묘하게도 선민사상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임.
3) 따라서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고 하는 천국복음으로 쉽게 설명해주시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선민사상과 동떨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아니하고 있는 것임.
(2) 기타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있는 여러가지 이유들은 무엇인가?
1) 첫째, 하나님말씀의 씨앗이 길가에 떨어졌다는 비유는 마귀가 믿지 못하는 완악한 마음, 딱딱한 마음을 주고 있다는 것임(눅8:12).
2) 둘째, 바위 위에 떨어졌다는 비유는 처음에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들이지만 나중에는 실천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시련을 당할 때에 배신을 하고 말씀을 떠나게 된다는 것임(눅8:13).
3) 셋째,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비유는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마음을 빼앗겨서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게 되고 그 결실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임(눅8:14).
4) 넷째,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비유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임(눅8:15). 그 경우가 참으로 귀한 것임. 따라서 그러한 경우를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어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임재시켜 주시는 것임(요14:16-17, 행1:8).
6. 캄캄한 밤에 등불을 켜는 이유와 그것을 관리하는 방법에서 엿볼 수 있는 하나님말씀의 생명력은 무엇인가?(눅8:16-17)
(1) 밤에 등불을 켜는 이유와 그것을 관리하는 방법(눅8:16);
1)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8:16).;
2) 첫째, 밤에 등불을 켜는 이유는 주위를 밝히고자 하는 것임.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서 주위를 살필 수가 있게 되는 것임(눅8:16c).
3) 둘째, 등불을 켜서 주위를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등경 위에 올려 두어야 함(눅8:16b). 곧 높은 곳 그리고 바람이 불지 아니하는 곳이 등경 위인 것임. 따라서 등불이 주위를 비추게 할 수 없도록 그릇으로 덮어버리거나 평상 아래에 내려버리는 것은 올바른 등불관리의 방법이 아닌 것임(눅8:16a).
(2)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하나님말씀의 생명력(눅8:17);
1)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8:17);
2) 첫째,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빛이 이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몰아낼 수 있도록 역사를 섭리하시는 것임(요1:5, “세상의 어두움이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고도 해석이 되고 있음).
3) 둘째,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음(요3:1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의 빛이 세상의 영적인 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도록 역사를 하신다는 것임(눅8:17).
4) 셋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으로 온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성도들에게는 성령님께서 내주하여 역사를 하심(눅24:49, 행1:8, 2:1-4). 그 결과 영적으로 성부와 성자께서도 성령님의 전에 함께 거하시면서(요14:16-20) 창조주의 능력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임(요3:16).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말씀의 심판과 구원의 능력인 것임(눅8:17).
5) 참고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창조주의 빛 앞에 피조물들의 진면목과 감추인 것이 생생하게 드러나게 된다고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음;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7.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온전히 파악하여 실천하는 자는 누구이며 말씀의 뜻을 제대로 새기지 아니하고 종교행위를 한 자는 또 누구이며 어떻게 되는가?(눅8:18, 마25:28-29)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온전히 파악하여 실천한 자;
1)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눅8:18a); 여기서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온전히 파악하여 실천한 자임.
2) 그 자에 대한 설명이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음; “5달란트 받았던 자는 5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5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5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0-21).
3)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재능과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죽어가는 생명을 많이 돌보고 살린 자를 말하고 있음. 그러므로 종들에 대한 결산을 할 때에 주인의 칭찬을 받으며 더 많은 재능과 능력을 얻어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실천하게 된다는 것임.
4) 그와 같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음; “그에게서 그 1달란트를 빼앗아 10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8-29).
(2) 하나님말씀의 뜻을 제대로 새기지 아니하고 종교행위를 한 자;
1)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눅8:18b);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와의 종인 그 사람의 마음에 없는 경우는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임.
2)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선민 유대인들의 율법생활이 타산지석이 되고 있음; ①첫째,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서 율법생활을 하고 있음.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눈도 속일 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임. 그것이 이른바 ‘외식적인 신앙인’의 비참한 모습임.
3) ②둘째, 구원을 줄 수 있는 의로움에 대한 판정이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지도자와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임.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 놓은 히브리경전의 진짜 뜻을 깊이 묵상하거나 깨닫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 특히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임. ③셋째, 유대교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선민의 종교는 만민구원사상이 아니라 선민만의 구원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임.
4) 그렇게 하나님말씀의 뜻을 진실되게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선민사상을 강조하고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용인하고 있는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산헤드린 대 공회는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하였음. 그 때문에 40년이 못되어 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성전이 붕괴되는 역사적인 심판을 받고 만 것임.
8.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갈릴리에서 복음사역 중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와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눅8:19-21)
(1) 고향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외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 자매들(눅4:16-29, 8:19-20);
1)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여 안식일날 회당에서 설교를 하심. 그 내용이 히브리정경 이사야 제61장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여 메시아의 사명이란 선민사상이 아니라 만민구원사상이며 고향사람과 동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구원하고 그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말씀하신 것임(눅4:16-27).
2) 자신들의 산골마을 나사렛에서 큰 선지자이며 메시아인 예수가 나왔다고 생각하여 잔뜩 고향사람들에게 돌아올 이익을 기대하고 있던 그들에게는 한없이 섭섭한 이야기이며 배신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설교였던 것임(눅4:28). 따라서 고향사람을 몰라보고 있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동네에서 쫓아내어버린 것임(눅4:29).
3) 예수님은 그때부터 고향 나사렛을 떠나서 갈릴리의 다른 성과 마을을 다니면서 복음사역을 하시고 계시지만 고향에서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모친 마리아와 동생들의 입장은 그것이 아님(마13:55-56). 한없이 동네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것임. 따라서 예수님과 고향사람들 사이에 화해의 자리를 마련해보고자 모친 마리아가 다른 자식들을 이끌고 맏이인 예수님의 복음사역 현장을 찾아오고 있는 것으로 보임(눅8:19-20).
4) 그런데 그들이 방문하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은 대단한 규모이며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음(눅8:19). 고향 나사렛에서는 그토록 차갑게 냉대를 받은 예수님이시지만 갈릴리의 다른 마을에서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엄청난 치유사역과 천국복음의 선포를 하고 계시는 것임(마13:57). 따라서 쉽게 예수님을 만나지를 못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나와서 방문한 사실을 예수님께 전달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임(눅8:20).
(2)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입장은 무엇인가?
1) 제자로부터 자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방문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듣고 계심. 그리고 그들이 어째서 자신의 복음사역의 현장을 방문하고 있는지 그 이유까지 훤히 꿰뚫고 계심.
2)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족의 소중함을 잘 알고 계심. 그런데 문제는 고향사람들이 자신에게 바라고 있는 것, 그리고 선민 유대인들이 메시아에게 원하고 있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고 있다고 하는 것임.
3) 그 옛날 시내 산에서 여호와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을 터이니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여호와께 드려주는 제사장나라가 되며 마치 아브라함처럼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창18:23-32)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심(출19:4-6).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선민의 의무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는 것임.
4) 그 결과 선민 유대인들의 사회에 하나님의 뜻을 마지막으로 전해주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그마저 고향 나사렛 사람들을 비롯하여 선민 유대인들이 배척하고 있는 형편임. 그 이유는 대대로 율법생활을 하면서 육신적인 선민구원사상과 선민우월사상에 너무나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임(사6:9).
(3) 모친 마리아와 동생들에게 주고 있는 예수님의 답변의 의미(눅4:30, 8:21);
1)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과 선민 유대인들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하여 자신을 방문하고 있는 모친과 동생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눅8:21)고 하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해주시고 있음.
2) 그것은 세상적인 가족관계나 혈통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영구적이며 더 중요한 것은 영생과 구원의 관계라는 진리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음(요1:12-14).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고향에서 배척을 받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벌써부터 인상적으로 다음과 같이 의사 누가에 의하여 기록이 되고 있음;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눅4:28-30).
9. 선민사상과 만민구원사상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무엇인가?(눅8:21, 요7:5, 행1:14)
(1) 하나님의 뜻에 의한 거듭난 인간관계를 더욱 중시하심(눅8:21, 창12:1-4);
1)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천국복음으로 듣고 만민구원을 위하여 복음사역에 나서는 성도가 바로 예수님의 새로운 영원한 가족이라는 것임(눅8:21, 마28:18-20). 왜냐하면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과 영광을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임(눅22:28-30).
2) 둘째, 선민사상에 빠져서 이기적이며 현세적으로 살다가 인생이 끝나게 되면 영생의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됨. 그러므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영적으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인간관계가 더욱 중요한 것임. 그러한 의미에서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눅8:21)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임.
(2) 대속의 죽으심과 영생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심(요7:5, 행1:14);
1) 첫째, 예수님께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천국복음을 외치면서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펼치고 있지만 모친과 동생들이 진심으로 예수님의 노선에 동조하고 있지를 못함.
2) 그 사실을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그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1-5).
3) 둘째, 어떻게 하면 육신적으로 얽혀 있는 인간관계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로 바로 잡을 수가 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도 바울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롬4:16) 아브라함의 행적에서 다음과 같이 발견이 되고 있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세였더라”(창12:1-4).
4) 셋째, 육신적인 죽음과 영적인 부활이 있은 다음에 새로운 인간관계가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음.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과 같음.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고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시자 그때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들이 되어 초대교회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것임;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모인 무리의 수가 약 120명이나 되더라”(행1:14-15).
5) 그때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게 되고(행2:1-4) 초대교회의 역사가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임(행2:36-47).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동생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서 그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천국에서 다시 만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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