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5강(눅9:1-3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7년 10월 12일(목)
1.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 전도를 위하여 12사도를 파송하신 이야기가 어째서 공관복음에 공히 기록이 되고 있는가?(눅9:1-6, 마10:5-15, 막6:7-13)
(1) 사도들과 제자들의 전도여행이 가능한 이유;
1) 물세례에 있어서 예수님 일행과 세례 요한 일행과의 차이점이 있듯이 전도여행에 있어서도 차이점이 발생하고 있음. 가장 큰 차이점은 예수님께서는 물세례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위임해주고 있음에 비해서 세례 요한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임(요3:22-30, 4:1-4).
2) 선지자인 세례 요한의 증거에 따르게 되면,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사도들에게 물세례를 베풀어 줄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해줄 수가 있지만(요4:2) 자신은 그 종이므로 주인의 그 권한을 침범할 수가 없다는 것임(요3:27). 따라서 주인은 흥하여야 하지만 종은 그것을 보고 기뻐할 따름이라는 것임(요3:29-30). 따라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주님의 종들은 살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임(요3:28).
3) 전도의 능력도 마찬가지임;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3:27), “오직 성령이 너희(제자들)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함께 모여 열흘 동안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3-4).
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12사도들에게, 나중에는 70명의 제자들에게 전도팀을 만들어 독자적으로 전도여행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복음사역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 있음; “예수께서 12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 보내시며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눅9:1-4), “그후에 주께서 따로 70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10:1-3).
(2) 사도와 제자들의 전도여행이 필요한 이유;
1) 처음 갈릴리 지역에서는 12사도들의 전도여행이, 나중 사마리아 지역에서는 별도로 70인의 제자들의 전도여행이 필요했던 이유는 3년 동안에 선민 유대인들이 흩어져서 살고 있는 그 옛날 가나안 땅인 ‘고토’(故土, 연고지 또는 본래 살고 있던 땅)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빠짐 없이 그리고 빨리 복음사역을 마치고 싶었기 때문임.
2) 그러므로 먼저 사도와 제자들을 조직하여 전도여행을 하게 하고 그 다음에는 전도대상자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서 대규모 복음사역을 예수님께서 직접 주관하신 것으로 보임. 그 결과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수만명의 군중집회가 가능했던 것임(막6:44, 8:9, 마15:38).
3) 온세상에 골고루 빠짐 없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전도여행과 선교여행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것을 지원하고 교육하기 위하여 교회가 형성이 되어야 하는 것임. 그렇게 중요한 대목이므로 그 선례로서 사도와 제자들의 전도여행과 복음사역에 대하여 공관복음에서 공히 기록을 하고 있다고 하겠음(눅9:1-6, 10:1-2, 마10:5-15, 막6:7-13).
(3) 전도팀의 구성에 대하여;
1)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자 오순절 때까지 전도의 능력을 얻기를 간구하고 있던 약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임재를 하시고 드디어 그 120명의 성도들이 모두 길거리로 나아가서 120개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 행하심을 증언하는 전도와 선교의 역사가 발생하고 있음(행2:1-22).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서부터 초대교회가 형성이 되고 있는 것임(행2:36-47).
2)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제자들과 함께 사시면서 복음사역을 하고 계시는 동안에는 두 차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독자적으로 팀을 만들어 전도여행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시고 계심.
3) 그 가운데 본문에서는 먼저 12사도들에게 치유와 축사의 능력을 부여하시고 갈릴리 여러 성읍과 마을로 떠나가서 전도를 하라고 명령하심(눅9:1-2). 후에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가서는 70인의 제자들을 2명씩 짝을 지어서 복음사역을 먼저 하도록 명령을 하시고 계심(눅10:1-2).
4) 그와 같은 행간의 뜻으로 미루어 볼 때 12사도를 전도여행에 내보내실 때에도 여러 제자들을 이끌고 가서 함께 복음사역을 하도록 조치하신 것으로 보임.
(4)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다음에는 어떻게 전도와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가?(행2:1-11)
1) 그렇지만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이 있게 되자 성도들에게 개인적으로 성령님께서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시는 시대가 전개가 되고 있음. 그에 따라 집사 스데반이나 집사 빌립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팀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전도여행을 하는 일이 널리 발생을 하고 있는 것임(행6:8, 8:26).
2) 사도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살고 있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성령세례를 베풀 때에도 혼자였음(행10:17-23).
3) 물론 초창기 예루살렘 전도에 있어서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팀을 이루어 함께 복음사역을 했으며(행3:1-10), 서방선교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행13:3-4), 나중에는 사도 바울과 실라가 함께 팀을 이루어 크게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음(행16:25).
4) 따라서 필요에 따라 팀 전도 및 선교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또는 개인전도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는 것임.
2. 전도여행의 기본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계시는가?(눅9:1-6)
(1) 12사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눅9:1-2);
1) “예수께서 12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눅9:1-2);
2) 첫째, 예수님께서 12사도에게 능력을 주시고 전도여행을 하게 하는 목적은 두가지임(눅9:2); ①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한 것임. 그것은 복음사역을 말하고 있음. ②또 하나는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는 것임. 그것은 치유사역을 의미하고 있음.
3) 둘째, 그 일을 위하여 역시 두 가지 종류의 권능을 주시고 계심(눅9:1); ①하나는 병을 고치는 권능임. ②또 하나는 모든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과 권위임.
4) 여기서 특히 ‘모든 귀신’을 언급하고 그것들을 ‘제어하는 능력과 권위’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은 두가지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임; ①하나는 영체인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와서 그 육신을 괴롭히고 각종 질병과 장애를 발생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것임. 따라서 그러한 귀신을 사람의 육신에서 쫓아낼 수 있는 ‘축사(逐邪)의 능력’을 12사도에게 주신 것임.
5) ②또 하나는 귀신이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면서 온갖 기만과 거짓말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자꾸만 왜곡하고 변질시키고 있기 때문임. 따라서 히브리정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말씀의 진정한 뜻을 밝히기 위하여 백성들을 비진리로 그리고 영적인 타락으로 이끌고 있는 악한 영들을 쫓아내고자 하는 것임. 그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말씀의 참된 뜻을 천국복음으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능력과 비진리를 설파하고 있는 귀신들을 제어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위가 필요한 것임(눅9:1).
(2) 간편한 여행준비로 떠나면 누가 어떻게 복음사역을 책임지는가?(눅9:3-4)
1)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눅9:3-4);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지시사항임. 집을 떠나 여행을 하게 되면 짐을 챙기고 현찰을 상당히 지니고 가야만 하는 것임.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시고 계심.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2) 첫째, 복음사역을 하기 위하여 전도여행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그 파송자이신 주님께서 그 일을 모두 책임지고 계시기 때문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육신을 입고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살아가고 있으므로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정확하게 체험적으로 알고 계심.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는 곳마다 준비하여 주시는 것임. 따라서 복음사역을 위하여 전도여행에 나서는 성도들은 최대한 간편한 차림으로 나서야 하는 것임(눅9:3).
3) 둘째, 전도자가 의식주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은 오히려 불신앙이며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도움을 주고자 하시는 것을 외면하거나 눈을 감게 만들고 있는 것임. 어디까지나 복음사역과 전도여행이라고 하는 것이 널리 복음을 전파한다고 하는 유익이 있는 한편, 전도자 자신에게도 영적인 성숙을 얻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임. 즉,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보살핌과 은밀하신 돌보심을 새삼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임. 그러한 전도여행이 사실은 거듭난 성도들의 인생살이의 모습이라고 할 것임.
4) 셋째, 하나님께서는 전도대상지역에 성도가 들어서게 되면 함께 현지에서 복음사역을 할 수 있는 집을 이미 준비하시고 계심. 그렇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제공하고 있는 그 집을 외면하지 말고 다소 불편하더라도 그 집에서 끝까지 기숙을 하라고 주님께서 지시를 하심(눅9:4). 그렇게 그 집 식구들과 함께 그 마을에 대한 복음사역을 마치게 되면 그 집에서 교회가 발생하게 되는 것임. 그러한 모습을 훗날 사도 바울과 실라가 유럽의 첫 성읍인 빌립보에서 자주색 옷감장사를 하고 있는 루디아의 집에 머물면서 그 집에 교회를 세우는 모습에서 잘 엿볼 수가 있다고 하겠음(행16:11-15).
(3) 영접하지 아니하는 성읍에 대해서는 어떻게 조치하면 되는가?(눅9:5-6)
1)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눅9:5-6); 먼지를 떨고 미련없이 다른 마을로 이동하여 다시 복음사역을 하라는 것임. 그 성읍에는 더 적합한 복음사역자를 준비하여 다시 보내어 주시기 때문임.
2) 첫째,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눅9:5a)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 성읍에 두가지가 없다는 것임; ①하나는 기숙을 제공하고자 하는 동역자가 없다는 것임. ②또 하나는 복음을 받아 들이고자 하는 백성이 없다는 것임. 모두가 천국복음을 외면하고 창조주 여호와를 멸시하고 있으므로 그 성읍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임.
3) 그와 같은 경우를 그 옛날 선지자 엘리야의 경우에서 볼 수가 있음.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이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치하에서 모두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버린 것임. 따라서 군대를 동원하여 선지자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이세벨이 나서자 모든 백성들이 엘리야를 숨겨주고자 하지를 아니하고 있음(왕상19:1-3). 따라서 엘리야는 조국을 떠나 남쪽 유다 왕국으로 피신하고 있는 것임.
4) 둘째,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눅9:5b)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도들이 그 성읍을 소득없이 떠나면서 자신들의 발에서 아예 그 성의 먼지까지 떨어버리게 되면 훗날 그 성읍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사도 야고보나 요한 형제의 제안대로 그 성읍에 불심판을 바로 내려버리는 것일까요?(눅9:52-54)
5)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님(눅9:55-56). 비근한 예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상문화에 깊이 빠져버린 북조 이스라엘 왕국 백성들의 회개를 위해서도 7천명의 의인을 남겨두고자 하심(왕상19:18). 따라서 엘리야가 아니라 그의 새로운 제자 엘리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을 그 후에 감당하게 되는 것임(왕상19:16, 19-21).
6) 참고로, 선지자 엘리사가 지극정성으로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둘리고자 노력함(BC 852-798, 요람 왕부터 여호아하스 왕까지). 그러나 50년 이상의 애씀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돌아오지를 아니하고 있음. 그 결과 그가 죽고 나자 70여년 후 BC 722년에 마침내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되고 마는 비참한 역사가 그 땅에 임하고 있는 것임.
3.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가 예수님의 복음사역과 전도여행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눅9:7-9)
(1) 헤롯 안디바가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체포하고 죽인 이유;
1) “(세례 요한이) 또 그 밖에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눅3:18-20);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의 마을에서 몰려드는 백성들에게 회개의 물세례를 주다가 북상하여 고향이 있는 갈릴리 지방으로 들어 감.
2) 갈릴리 지방의 왕도인 가버나움에서 세례 요한이 용감하게도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의 율법위반 사실을 질책한 것임. 안디바가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를 이혼시키고 자신의 왕비로 삼고 있기 때문임. 그 때문에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훗날 참수가 되고 있음(눅3:20, 마14:5-12).
3) 세례 요한이 무모하게도 헤롯 안디바의 잘못을 질책하면서 외세에 저항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이미 나타났기 때문임. 선민 유대인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메시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그 옛날 선민 이스라엘의 다윗제국을 재건하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시온의 영광을 떨치는 인물임.
4) 따라서 세례 요한은 가버나움의 감옥에서 메시아 예수의 활약과 자신을 감옥에서 구출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허무하게 되고 말았음. 그 이유는 그가 기대한 다윗의 후계자인 메시아가 아니라 예수님은 그 정체가 만민을 모두 회개시키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임(눅7:18-23, 9:20).
(2) 뒤이어 나타난 새로운 선지자 나사렛 예수님에 대한 소문들;
1)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헤롯이 이르러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눅9:7-9);
2) 의사 누가가 적고 있는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음; ①첫째, 예수님께서 12사도들에게 권능을 주고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전역을 12개로 나누어 방문하면서 샅샅이 한꺼번에 복음사역을 하게 하자 전체 갈릴리가 선지자 예수님의 소문으로 떠들썩하게 된 것임. 그 소문을 듣고서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가 당황해서 심히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임(눅9:7a). 그가 불안한 이유는 선지자 세례 요한을 얼마 전에 참수(斬首, 목을 벰)했는데 마치 세례 요한이 나사렛 예수로 되살아난 것과 같다고 백성들이 말하고 있기 때문임(눅9:7b).
3) 둘째, 또 어떤 백성들은 그 옛날 아합 왕가의 잘못을 크게 질책했던 선지자 엘리야가 다시 나타난 것이며 그 다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가 임하게 된다고 종말론을 입에 담고 있기 때문임(눅9:8a, 말4:5-6).
4) 셋째, 옛날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아니했을 때에 선지자가 나타나서 왕들과 제사장들의 잘못을 크게 질책한 적이 있는데 그때와 같이 헤롯 왕가와 유대교지도자들이 영적으로 타락하였으므로 세례 요한에 이어 또 선지자가 계속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임(눅9:8b).
5) 이상의 다양한 소문을 종합해보더라도 헤롯 안디바에게 유리한 내용은 하나도 없는 것임. 따라서 헤롯은 신하들을 시켜서 비밀리에 나사렛 예수 일행의 동태를 감시하고 만약 헤롯 왕가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움직임이 있으면 즉시 보고를 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보임(눅9:9).
4. 12사도들이 전도여행을 한 결과 대규모 전도집회가 어디에서 어떻게 개최가 되고 있는가?(눅9:10-11)
(1) 12 사도들이 갈릴리의 여러 지역에서 전도여행을 한 결과가 성공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눅9:1, 10-11)
1) 12사도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전도여행을 하면서 여러 고을에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되는 복음사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알 수가 있음;
2) 첫째, 전도지역에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온 사도들로부터 결과보고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시지 않으시고 다음 일정을 위하여 벳새다로 걸음을 옮기시고 계시기 때문임(눅9:10). 만약 문제가 발생했다면 별도의 언급을 하셨을 것임.
3) 둘째, 훗날 사마리아 지역에서 70명의 제자들을 2명씩 짝을 지어 35개 마을로 전도여행을 보낸 결과 그 복음사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눅10:1,17). 그러므로 12사도들의 전도여행과 복음사역도 그에 못지않게 성공적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임.
4) 셋째, 예수님께서 이미 12사도들에게 주신 복음사역의 권능은 충분한 것이기 때문임(눅9:1-2). 창조주 여호와께서 자신의 일을 선하고 의롭게 수행하는 종에게는 충분한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것을 성경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기 때문임(마25:15, 21, 28-29, 28:18-20, 행1:8).
5) 넷째, 미리 12사도들을 갈릴리 여러 성읍과 마을로 보내어 복음사역을 전개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전체 복음사역의 현장에 엄청나게 많은 백성들이 몰려 들고 있는 것임(눅9:11, 14). 그와 같은 대규모 군중집회는 12사도들이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 전 지역을 직접 뛰어다닌 그와 같은 사전 홍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하겠음.
(2) 예수님이 주관하는 대규모 전도집회는 어디에서 개최가 되고 있는가?(눅9:10-11)
1)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눅9:10-11);
2) 사도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자기들의 전도여행의 결과를 보고한 장소는 갈릴리의 대도시 가버나움으로 보임(눅9:10a). 보고를 듣고 예수님께서는 12사도들을 데리고 동쪽 벳새다로 이동을 하시고 있음(눅9:10b).
3) 12사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 지역 전체를 나누어 다니면서 복음사역을 하였기에 많은 백성들이 이제는 직접 12사도와 수많은 제자들의 스승이 되시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천국복음도 듣고 자신과 가족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게 됨(눅9:11, 막6:33).
4) 그에 따라 벳새다로 몰려드는 수많은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 일행이 더 넓은 들판을 찾아서 자꾸만 갈릴리 호수 동남쪽 풀밭으로 이동을 하시고 있다고 하겠음(눅9:11, 마14:13). 그곳에서 수만명의 군중집회를 하다가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이 발생하게 된다고 하겠음(눅9:12-17, 막8:1-10).
5. 빈 들에서 하루 종일 군중집회를 한 결과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가?(눅9:12-14)
(1) 어째서 날이 저물어 갈 때까지 대규모 복음사역이 계속이 되고 있는가?
1)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이유로 말미암아 당일의 대규모 복음사역이 날이 저물 때까지 진행이 되고 있다고 하겠음;
2) 첫째,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나라도 더 운집한 군중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시는 그 열심이 지나쳐서 말씀사역에 시간이 많이 걸린 것으로 보임(막6:34).
3) 둘째, 예수님께서 병자와 장애자들에게 일일이 안수를 하시고 치유를 하여 주시는데 그 수가 워낙 많아서 오래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임(눅4:40, 마14:14).
4) 셋째, 가난한 갈릴리의 백성들이 돈벌이를 하루 쉬고서 귀한 날을 잡아서 병자와 장애자들을 모두 데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대규모 집회에 참석한 것임. 따라서 무조건 그날 중으로 치유를 받고서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임. 그렇게 되어야 내일 아침에는 또 돈벌이에 나설 수가 있기 때문임.
(2) 발생하고 있는 2가지의 문제점;
1) 날이 어두워지고 있으므로 이제는 그 수많은 군중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야만 하는 것임. 그런데 문제는 하루 종일 별로 먹은 것이 없이 그 대규모 집회에 참석한 백성들이라는 것임. 따라서 그냥 돌려 보내게 되면 허기로 인하여 길에서 쓰러질 가능성이 큰 것임(막8:3).
2) 또 하나의 문제는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워낙 인가(人家, 사람이 사는 집)가 별로 없는 빈들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개최하였기 때문에 음식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임(요6:5). 그러므로 사도들과 제자들은 빨리 해산을 하고 군중들이 스스로 여러 고을로 찾아가서 먹을 것과 숙박할 곳을 찾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계속 건의를 하고 있음(눅9:12).
3) 그렇지만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무책임하게 군중들을 해산하고 말 것이 아닌 것임. 잠자리까지는 돌보아주지를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허기라도 면하게 해주고서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도록 조치해주고 싶은 것임.
4) 그에 따라 1,400년 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놀라운 ‘만나의 기적’(출16:14-21)과 같은 ‘오병이어(五餠二魚,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의 기적’이 예수님에 의하여 벳새다 동남편의 들판에서 다시 발생하고 있는 것임(눅9:13-17).
6. 세상적인 방법으로 복음사역의 현장에 있는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가 없게 되자 어떠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는가?(눅9:15-17)
(1) ‘오병이어의 기적’이 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1) 첫째,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자리에서 먹을 것을 구하여 그 많은 군중들에게 먹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임. 그것은 세상의 의술로써는 자신의 병을 고칠 수가 없는 경우와 같은 것임(막5:26).
2) 둘째, 하나님의 복음을 온종일 들은 백성들이 굶고서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다가 허기로 말미암아 길에서 쓰러지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못하기 때문임.
3) 셋째,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갈릴리 백성들이 그 날의 벌이도 포기한채 병자와 장애자들을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 데리고 와서 고쳐서 돌아가겠다고 하여 해가 저물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서 그 무리들을 진실로 불쌍하게 여기시고 계시는 것임(마14:14, 막6:34 8:34).
4)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최소한 먹을 것이라도 구해서 그들의 허기를 면하게 하고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고 싶어하시는 것임. 그것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직접 보여 주신 것임.
(2) ‘오병이어의 기적’을 임하게 하고 있는 예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1) 첫째,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눅9:13a)는 예수님의 말씀임. 먼저 ‘십시일반’(十匙一飯, 한 숟가락씩 밥을 덜어서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임. 열 숟가락이면 한 사람이 먹을 양이 된다는 것임)으로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자 하는 마음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임.
2) 둘째, “우리에게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밖에 없으니”(눅9:13b)라고 하는 한심한 현실임; 백성들이 먼저 허기가 진 자신의 배부터 채우고 나니 굶주린 남을 돕고자 내어 놓는 음식이 고작 물고기 2마리와 떡 5개에 불과하다는 것임. 그것이 이기적인 어른들의 사회이며 생존경쟁의 현장인 것임. 그러한 현실을 예수님께서 슬프게 바라보신 것임.
3) 셋째, 어른들은 모두 먹어 치우고 없는데 어린아이 하나가 먹는 것을 아끼다가 차제에 그것을 남을 돕고자 내어놓고 있는 것임(요6:9). 그와 같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귀하게 보신 것임. 그것이 천국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어린아이의 마음인 것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4) 넷째,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임; 군중들을 50명씩 구분하여 질서 있게 풀밭에 앉히고 있는 것임(눅9:14). 한꺼번에 먹을 것을 서로 가지겠다고 밀고 당기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임.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려고 하면 먼저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임.
5) 다섯째, 군중들이 질서 있게 앉은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들고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축사를 하신 후 사도와 제자들에게 그것을 백성들에게 나누라고 말씀하심(눅9:15-16, 마14:19).
(3) 하늘의 축복은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
1) 그 떡은 백성들이 나눌 수록 자꾸만 생겨나고 있는 것임; 그 결과 수많은 군중들이 전부 배불리 먹고서도 남은 조각이 12바구니임(눅9:17, 마14:20). 특히 그 떡과 생선을 먹은 사람이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고 계산을 하더라도 남자 장정만 5,000명이나 된다고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려 2만명이 먹었다는 의미인 것임(마14:21, 눅9:14).
2) 하늘의 축복은 목숨을 연장하고 육신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떡을 주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님. 하나님의 축복은 성도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하고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것임.
3) 요컨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임.
4) 그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6:47-51).
7.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세상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묻고 계시는데 그 장소가 어디이며 그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가?(눅9:18-20, 마16:13-28)
(1) 그 장소가 어디이며 그 시기가 언제인가?
1) 헤롯 빌립의 왕궁이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의 인근 지역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 수가 있음;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눅9:18),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8:27);
2)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평가가 어떠한지를 제자들에게 묻고 계시는 그 시기는 빌립보 가이사야 지방의 여러 마을에서 제자들과 함께 전도여행을 통하여 복음사역을 하고 계실 때임.
3)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주로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고 있는 갈릴리 서부지역에서 전도여행도 하시고 복음사역을 집중적으로 하신 것임(눅4:14-8:25, 8:40-9:17). 잠시 갈릴리 호수에서 배편으로 동쪽의 이방인 마을 거라사를 방문하여 군대귀신을 쫓아내신 적이 있지만 곧 되돌아 오신 것임(눅8:26-40).
4) 이제는 갈릴리 북쪽으로 올라가서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의 인근 마을에서 모처럼 한가하게 복음사역을 하고 계시는 것임. 바로 그 시기에 제자들에게 선민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그 점을 물으신 것임(눅9:18).
(2) 그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가?
1) 첫째, 지난 2년 이상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가나안의 북부지역을 주로 여행하면서 복음사역을 실시하였는데 그 성과가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 하시는 것임. 그 성과는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임(눅9:18-20).
2) 둘째, 이제 남은 공생애 기간에는 갈릴리에서 남하를 하면서 사마리아와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복음사역을 하여야 할 것인데(눅9:51-62) 그 전에 은밀하게 중간평가를 해보고 싶은 것임(눅9:21).
3) 셋째,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면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대 공회로부터 유대교의 이단아로 정죄가 되고 마침내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데(눅9:22) 그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눅9:25-36)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무엇인지를 미리 알려주고 싶어하시는 것임(눅9:23-27, 22:28-30).
8.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함구령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예언 등에 대하여(눅9:20-22);
(1)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내용과 특징은 무엇인가?
1)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눅9:20),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기타 선민 유대인들의 이해 및 평가와는 전혀 다른 것임.
2) 왜냐하면, 선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다음 세가지 중의 하나로 보고 있기 때문임(눅9:19); ①첫째,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는 경우. ②둘째, 엘리야와 같은 큰 선지자로 생각하는 경우. ③셋째, 마치 세례 요한처럼 선민 유대인들에게 회개의 물세례를 주면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그러한 선지자로 보는 경우 등임.
3) 그러한 백성들의 인식의 공통점은 나사렛 예수님이란 그들이 오랜 세월 학수고대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임. 선민 유대인들이 바라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모조리 물리치고 선민 이스라엘의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마치 그 옛날 다윗대왕과 같은 자임.
4) 그런데 돌연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은 선민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러한 메시아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마16:16 의역)라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신앙고백을 위와 같이 하고 있는 것임(눅9:20).
(2) 어째서 예수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리시면서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그곳에서 처음으로 예언을 하시는가?
1) 만약 선민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와 그 사명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사렛 예수가 자신들의 메시아 사상에 찬물을 끼얹는 그러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장 선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할 것이며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복음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말 것임.
2) 선민 뿐만 아니라 선민들이 미워하고 있는 이방인들까지 전부 용서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만민구원사상을 결코 환영하지 아니할 것이므로 이제 사마리아와 유대 땅과 예루살렘으로의 전도여행을 앞두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와 사명에 대하여 강력한 함구령을 내리고 계시는 것임(눅9:21).
3) 그렇지만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에 대해서는 미리 마음의 준비들을 하도록 제자들에게 예언으로 알려주시는 것임;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눅9:22).
9.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 곧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무엇인가?(눅9:23-25)
(1)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만으로 영생을 얻을 수가 있는가?
1) 영생의 구원을 얻자면 성도들이 두 단계를 밟아야 하는 것으로 복음서에서 드러나고 있음; ①하나는 회심이며, ②또 하나는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성도의 삶인 것임(마7:21).
2) 첫째 단계는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백성들이 그 속죄의 희생이 죄인인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임. 그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속죄의 제사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성도들에게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임.
3) 둘째 단계는 성도가 이제 의인으로 여김을 받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영이 그 심령 속에 임재하여 영적으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게 됨(요14:16-17).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육신의 탐욕과 정욕을 말씀과 기도와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기면서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임(마28:18-20, 행1:8).
(2) 확실하게 영생을 얻자면 성도가 거듭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가?
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의 내용이 다음과 같음;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2) 예수님의 공생애와 복음사역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 희생 등의 고난이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고자 하는 사도와 성도들에게도 장차 있게 된다는 것임. 그것을 기쁘게 감수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의 구원과 천국에서의 놀라운 상급이 주어진다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이 다음과 같음;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28-30).
3)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음;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6-18).
4) 예수님께서는 미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제자의 길에 대하여 쉽게 가르쳐 주심;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9:23-25). 한 마디로, 만민구원의 하나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제자는 현세적인 자신의 이익 대신에 대속의 삶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유익을 추구하고, 한시적인 목숨 대신에 영생의 구원을 선택하도록 하라는 것임.
10.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구원의 방법이 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눅9:26-27)
(1) 죽은 지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약속이 함께하고 있으며 실제로 역사 가운데 그 사실이 진실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임(눅9:22, 27);
1) 성도들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목숨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고 나면 과연 영생구원의 미래가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답변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대속의 죽음과 3일후 무덤 속 부활로 증명하고 계시는 것임;
2) 첫째, 예수님께서는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스스로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만민구원을 위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임.
3) 둘째,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고 계심. 즉, 창조주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무덤 속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시키고 40일 후에는 천국으로 승천하는 광경을 수많은 성도들이 볼 수 있도록 조치하신 것임(눅24:4-7, 50-53, 행1:9).
4) 셋째,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일부 사도들에게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심(눅9:27). 그리고 실제로 그 모습을 ‘변화산상의 예수님의 모습’으로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에게 보여주시는 것임(눅9:28-36).
(2) 그와 같은 새 언약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육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성도들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눅9:26-27);
1)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직접 보지 못한 성도들에게는 영적인 눈으로 그것을 보고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심. 따라서 성도들은 그것이 역사적인 진실이라고 믿고서 자기 희생적인 대속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임.
2) 그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음;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8); 풀이를 해보자면 ①첫째, 만삭이 되지 못하여 일찍 세상 빛을 보게 되면 눈을 감기 마련임.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가 랍비 사울이었을 때에 다메섹 도상에서 태양보다 더 강한 창조주의 영광의 빛 가운데 자신의 육신의 눈이 소경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영적인 눈으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으로 만났다는 것임(행9:3-19). ②둘째, 그 체험이 너무나 생생하기에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조금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간증인 것임(행22:17-21).
3)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바울 자신처럼 그렇게 영적인 눈으로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만나고 궁극적으로 영생의 부활을 얻는 그러한 복음전파와 대속의 삶에 동참해 달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임(고전11:1, 빌3:10-16).
4) 성도들이 복음전파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게 되면 놀라운 영광의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말씀하심;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9:26).
5) 요컨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헌신하는 성도들에게는 영광으로 재림하시는 주님께서 영생과 천국의 상급으로 함께하신다는 것임(눅22:28-30).
(참고자료;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
통일 왕국
사 울 1,050-1,010
다 윗 1,010-970
솔로몬 970-931
선한 왕 / 악한 왕
남 왕국(유다) B.C 930-586 · 르호보암 931-917 · 아비얌 916-914 · 아사 913-873 · 여호사밧 873-848 · 여호람 848-842 · 아하시야 842 · 아달리야 841-835 · 예호아스 835-796 · 아마샤야 796-767(웃시야를 790부터로 보기도 함) · 아지리아(웃시야) 767-739 · 요담 739-731 · 아하스 731-715 · 히스기야 715-686 · 므낫세 686-641 · 아몬 641-639 · 요시야 639-609 · 예호아스 609 · 여호야김 609-597 · 여호야긴 597 · 시드기야 597-586 예루살렘 함락 586 · 처음 80년 : 번영하고 강함 · 다음 70년 : 상당한 재난, 바알 숭배시작 · 다음 50년 : 웃시야 아래서 가장번영 · 다음 15년 : 아하스 아래서 앗수르의 조공이 됨 · 다음 30년 : 히스기야 아래서 독립 · 마지막 100년 : 주로 앗수르에 예속 |
북 왕국(이스라엘) B.C 930-722 · 여로보암 930-912 · 나답 912-911 · 바아사 911-888 · 엘라 888-887 · 시므리 887 · 티브니 887-883 · 오므리 883-877 · 아합 876-853 · 아하시야 853-852 · 요람 852-841 · 예후 841-813 · 여호아하스 813-798 · 여호아스 798-781 · 여로보암(II) 781-753 · 스가랴 753-752 · 살룸 752(1개월 통치) · 메나헴 752-741 · 브가히야 741-739 · 베가 739-731 · 호세아 731-722 북 왕국의 명망 722 · 처음 50년 : 유다와 시리아에게 시달림 · 다음 40년 : 오므리 통치아래서 번영 · 다음 40년 : 예후와 여호아하스 아래서 쇠퇴 · 다음 50년 : 여로보암 2세 아래 가장 번영 · 마지막 30년 : 무정부, 몰락, 포로 |
**참고사항; 약간의 연도를 수정하였습니다.
[출처] 유다, 이스라엘 왕들 (통일왕국포함)|작성자 하늘본향
'누가복음 강의 골자(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7강(눅10:1-42)(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7.23 |
---|---|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6강(눅9:37-62)(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7.21 |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4강(눅8:22-56)(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7.19 |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3강(눅8:1-21)(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7.19 |
누가복음 강의 골자 제12강(눅7:24-50)(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2.07.18 |